Rudolf Karl Bultmann (German: [ˈbʊltman]; 20 August 1884 – 30 July 1976) was a German Lutheran theologian and professor of the New Testament at the University of Marburg.   
 
루돌프 칼 불트만, 스위스 사람 칼 바트 가 1886년생이고, 두살 먼저고, 서독 마르부르크 에서 죽어 92세. 올덴부르크 지역 태생에, 루터 신학자. 
 
A prominent critic of liberal theology, Bultmann instead argued for an existentialist interpretation of the New Testament. His hermeneutical approach to the New Testament led him to be a proponent of dialectical theology.  
 
리버럴 신학을 비판 반대하는데 주요인물이고. 그런데 또 이그지스텐셜리스트 야 신약번역은. 그러면 불트만은 실존주의자야? ㅋㅋㅋ. 아니야 그런게. 실존주의 우산아래 넣는게 아냐 불트만도. 
 
흔히 아는 실존주의 는, 신을 부정해. 물론 웨스턴애들의 넓은 실존주의 는 신을 부정하고싶지는 않다, 는 주의 지만. 나중에 썰하고. 
 
하이덱거 와 교류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다, ㄱ소리야. 
 
하이덱거 란 애는 , 사상도 쓰레기 인간도 쓰레기야. 이 독일땅 인간들은 대게, 후져. 너무나 열등해 버려서. 그래서 등장한게 아리안이즘이고, 이 아리안이즘에 안티 쎄마이티즘은 19세기 에 너무나 유행한거고, 너무나 후져버려서 우월감 정체성 놀이를 하는거야. 이게 끝물 받아서, 극동 애들 조선 중국이 내셔널리즘의 민족놀이를 하는거고. 가장 열등한 애들이, 위대하다는건 환장하는겨 저게. 정신병인데 너무나 깊게 박혀서, 치료 불가야. 나중에 웨스턴애들이 쟤들을 다 지워. 
 
 
The Dunning–Kruger effect is a cognitive bias[2] whereby people with low ability, expertise, or experience regarding a certain type of task or area of knowledge tend to overestimate their ability or knowledge.  
 
더닝 크루거 이펙트. 열등 저능한 인간들에게 심어있는 인식의 삐끗. 열등한애들이 지들이 잘난줄 안다. 흔한 현상이야 이게. 이게 집단으로 스며버리면, 전쟁의 박멸 외엔, 답이 없어. 
 
이사람도 역시다 월드워 두개를 겪지만, 의외로 평탄하네 삶은. 넘어가 찾을 의미가 없어 이사람 인생살이에선.
 
헤겔 에 하이덱거 에 접하지만, 쟤들 생각은 용납이 안돼, 너무 좁아. 불트만은 쟤들을 버려. 
 
What arose from this friendship was a "sort of comradery" grounded on an active and open dialogue between Bultmann and Heidegger from 1923 to 1928.[24] However, Bultmann himself stated that his views could not simply be reduced to thinking in Heideggerian categories, in that "the New Testament is not a doctrine about our nature, about our authentic existence as human beings, but a proclamation of this liberating act of God."[  
 
하이덱거 를 안게, 40 전후, 5년간 접하다가, 애가 기괴한거지. 신을 부정하는 애들, 은, 피해. 신을 믿는다 라는게 애매하지만, 신을 확실히 죽여버린 애들은, 상종하는게 아냐. 걘, 너를 죽이게 되어있어. 
 
헤겔애들의 생각으로 그렇게 간단히 취급할 수는 없었다. 신약 이란게, 쟤들 말대로, 우리의 네이쳐, 우리의 오뗀틱 이그지스턴스 에 대한 독트린은 아니라 해도, 그래서 쟤들은 신약을 무시하지만, 그게 아니다. 신약은, 신의 리버레이팅하는 액트 를 프로클러메이션 한다. 
 
오뗀틱, 아주 쎈말이야 이건. 오떠, 작가, 에 인증 으로 가는 말인데, 이건, auto 아우토 에서 오는겨. 스스로 작동하는게 아우토 이고, 궁극의 E 야. 앱스트랙트 오브젝트야. 진짜 이고 오르토 오쏘독사 의 참. 이야. 오뗀틱 이그지스턴스 라는건, 궁극의 E 야. 이그지스턴스 라고 해서 실존의 피상 이 아니라. 
 
신의 의지, 가 신약에 있어. 불트만 은 신을 믿어. 윤리적 으로 신을 써먹는 리버럴 애들이 아냐. 
 
칼 바트 와 같이, 컨페씽 처치 에 참여해. 
 
Form criticism as a method of biblical criticism classifies units of scripture by literary pattern and then attempts to trace each type to its period of oral transmission  
 
불트만의 단어는, 폼 크리티시즘 인데, 이게 머 대단한게 아니라, 문장을 자구적으로 보지 말라 해석말라, 그 문장의, 그 책의, 포름 에 기반해서 봐야 한다, 는 거야. 포름 을 비판하는게 아니라, 포름에 기반해서 크리틱 엄밀히 봐라. 
 
내 말이자, 비트겐슈타인 이 내 생각을 받아서 한 말이 있잖니. 언어 게임. 집단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하물며, 개인 개인마다, 어법 이 달라요, 어법이 쓰여진 문법 이 다르고. 
 
언어게임 이야기 하는겨 불트만 이. 이 이야길 그대로, 이전에, 키에케고 가 또한 해 . 키에케고 는, 사람들이 언어질, 말질을, 메타포 로 한다고 했거든. 이게 모두 같은 말이야, 메타포로 언어질 말한다, 비트의 언어게임, 불트만의 포름 크리틱.
 
언어가 교환 되는 그 마당은, 그 마당 의 언어의 법칙, 언어 쓰는 방식 의 어법 이 있어요. 이게, 불트만 의 포름 이야. 
 
그 언어의 글의 마당 마다, 보이지 않는 포름 이 각각 존재해. 그 포름을 이해해야 해. 걔들만의 언어 룰 을 이해해야 해. 
 
비트겐슈타인은, 키에케고 의 메타포 를 보고, 후대에 다시 풀었을 뿐이야. 참 웃긴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똑같은데, 보다 더 쉽게 말하려고 자기만의 사전으로 단어 만들어서, 머 대단한척 썰 푸는게 인간 생각세상이야. 이런 구분을 극동 조선애들은 할줄 몰라서, 오 시바 불트만의 , 가만, 포름은 양식이냐 형상이냐 멀로 쓰까, 눈깜꼬 돌려 아잉 양식 나오네 양식, 크리티시즘은 비평 비판 아 시바 머냐 또 돌려, 오메 음청난 양식비평 의 불트만, 풀은 말들은 대체 먼 ㄱ 소린지. 
 
불트만 은, 더 가서, 지금식, 장르 라고 구분하잖니, 문학 장르, 픽션에 논픽션에, 나레이트 니 신화 니, 남녀 로망스니 괴기 니 , 그런 장르 마다의 포름 어법이 있어. 그걸 이해한 바닥에서, 성서 번역을 해야 한다는거야. 
 
가장 문제가 머여? 신약에서, 신화적인 이야기야. 슈퍼내추럴. 슈퍼내추럴은 신화다, 짜가다, 역사적 예수 구분하자, 얘들이 리버럴 신학 이라고 했잖니. 
 
 
"Form criticism is the endeavor to get behind the written sources of the Bible to the period of oral tradition, and to isolate the oral forms that went into the written sources. Insofar as this attempts to trace the history of the tradition, it is known as tradition criticism."[2] Form criticism seeks to determine a unit's original form and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literary tradition  
 
성서 가 쓰여질때, 신약은 마가 를 시작으로 최초 의 코덱스 시작이 아마도 1세기 후반이다, 라고 단정 비슷하게 져. 신약은 그리스어 로 쓴 쓴 쓴 거야. 예수 의 복음은 오랄 이야. 예수는 오직, 오랄로 입으로만 말했어. 자기가 써서 팜플렛을 뿌린게 아냐. 쓰여지기 이전의 오랄의 저당시 의 포름, 언어게임을 파악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겨 이게. 그래서 당연히 트러디션 크리틱 이야. 그 역사의 흐름 마다 시대마다 의 포름 사정 을 이해하고 그 시대의 어법 을 파악해서 이해 번역 설명 해야 한다. 너무나 너무나 당연한거야 이건. 조선 애들은 먼말인지 모르지만.
 
그게 그 시대마다 의 장르마다의, 유닛 마다의 오리지널한 포름 이 있다는거고, 이건 당연히 머여? 그 시대 에 콘텍스트 상황을 파악 해야 한다는 거지. 신약의 허뮤니틱스 를 이런식으로 해야. 
 
그런데, 머 시바 오리진 도 그렇게 구약 신약을 , 허뮤니틱스 해석 하고 엑써지써스 주석을 , 안했다고 말할 수 있나? 
 
여하튼 간에, 그 시대 에 직접 발담궈서 이해하는것은 물론이고, 신화 는 신화 의 장르, 신화 의 포름 으로 이해 해야 한다는거야. 지저스의 슈퍼내추럴 은, 신화 다. 그래서 리버럴 애들은, 가짜다, 신약 버려라, 해대는데, 어찌 그따위 ㄱ 소리를 하냐 말이야. 
 
신약을 코덱스 로 쓴 고대그리스 사람들이, 저게 진짜 라며 생각하고 그렇게 썼겠니?
 
너무나 역사를 모르는거 아니니? 너무나 미개한거 아니니? 고대그리스사람들이 니덜 마던 애들보다 천만배 이성적인 영혼인건 , 아니?
 
중세사람들이 저 신약의 슈퍼내추럴을 자구적으로 이해한줄 알아 웨스턴 애들 조차. 
 
연극 이 서기 천년 직후에 바로 등장한다고, 독일땅에서, 기록이. 바로 프랑스 에 스페인 에 잉글랜드 로 연극이 가. 하이미디벌 중세 로 접어들면. 연극 을 관람한 민들의 모습을 써요 수도사가. 머 사탄 의 형상에 천사 나오고 하면, 그걸 보는 관객들이 시바 웃어요 웃어. 당시 사람들도, 그게 다 , 비유 고 알레고리 에 돌려말하기 인걸 다들 알아요. 
 
마던 애들이 너무나 미개한게, 중세 인간들이, 저걸 자구적 으로 믿는줄 알아 ㅋㅋㅋ. 
 
신학하는 애들은 역사 를 전혀 모르니, 지들끼리 상상의 역사소설을 쓰는거고. 
 
.불트만 의 포름 비판 을, 스피노자 어쩌고 부터 시작했다, 말도 안되지. 이미 하이미디벌 접어드는 13세기 전후 에도, 신화 속에서 의미 를 찾으려 해요 중세 유럽인들은. 그걸 미쳤다고 사실로 인지하냐. 조선 같은 미개한 오컬트 신학에서나 여전히 그리 떠들겠지만. 
 
Demythologization as a hermeneutic approach to religious texts seeks to separate cosmological and historic claims from philosophical, ethical and theological teachings. Rudolf Bultmann (1884–1976) introduced the term demythologization (in German: Entmythologisierung) in this context,[1] but the concept has earlier precedents.  
 
포름 크리틱 에서, 가장 문제로 보는게 역시나 신화적인거야. 불트만이 만든 단어가, 엔트 미톨로기저룽. 영어로 굳이 데 를 붙였지만, 엔트, 는 어웨이 프럼, 에 데로 영역한건, divest 제거 스트립 벗기는건데. 이건 스피노자 도 꺼냈던 프레임 이라 이거지. 
 
불트만이 이건, 단어 를 잘못 만든거야. 저걸 비신화화 어쩌고 해서, 신화 를 제거해라, 이렇게 해석해버려서 지금도 극동에선 이런 개념으로 저게 돌아다녀요.
 
이것의 궁극의 의미는. 불트만이,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라여. 신화 에 대해 상당히 가치부여 하는게 불트만 이고, 불트만은 어쩌면, 신화 가 전부여. 저걸 비신화 로 단어만들면서, 잘못 만들었다고, 불트만이 말을 했어. 저건 제거 의 엔트 Ent 가 아니라, from 프럼 의 엔트 야. 신화관련된 것은 신화의 의미로써 제대로 보자. 이게 불트만이 의도한 사전 이야 저 단어에 대한. 
.
 
사람들이 신화 를 모른다 이거야 또한, 불트만은.
 
신화 가 참 중요한겨 이건. 중복 설명 넘어가고. 
 
그리스 신화, 아 엄청난겨 저거. 거기에 게르만 오딘 의 에다, 사가, 저걸 모르면, 게르만들이 이해가 안돼. 저걸 보면, 게르만 애들 역사 보는게 상당히 편해져 쉬워지고. 그리스 로마 신화 모르면 그리스 로마 역사 를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시안하게 말이야, 신화 이야길 제대로 보면, 그 나라의 인간의 역사 가 잘 보여. 
 
로마 이야기 하는데, 로마의 시작, 아이네이쓰 를 모르면, 로마 이야기 해선 안돼. 멀 안다고 로마 어쩌고 저쩌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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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 은, 지금의 싸이언티픽 의 시대에, 누가 저걸 진짜로 믿겠냐. 그러면 오히려, 믿음의 강도 만 흐려진다. 신화 의 포름에서 거기서, 미닝, 의미 를 찾아라., 당연한거 아냐?
 
또한, 그 의미 를, 모랄, 에띡스 로만 찾으면, 이건, 신을 부정하는 에이띠스트 무신론자 야. 이런 애들이 조선빠닥에도 아주 흔해 도포자라가 쳐입고 나는 신을 그따위로 안믿는 에이띠스트 요 해대던데 누군. 아 정말 저 지능 의 미개함이란. 시바 저런애 구독자도 이삼십만이던데. 정의놀이 적폐놀이 하면 백만이던데. 졸 부러. 
 
불트만, 은, 머 그리 내가 취할게, 별론데, 물론 저런 불트만 의 해석이 지금은 안받아들여진대 ㅋㅋㅋ. 니덜 무시기 들한테나 안받아들여지는거겄지. 
 
Inspired by Martin Heidegger, Bultmann outlines a view of Christianity based on existentialism.  
 
이런문장들이 불트만에 흔한데, 말도 안되는 문장이고. 그 시대를 반영한다, 그 시대를 본다는건 이그지스턴스다 그래서 이그지스텐셜이즘 에 바닥을 둔다, 참 저게 먼 ㄱㄸ같은 ㄱ소리냐. 
 
BY MEANS OF SCIENCE MEN TRY TO TAKE POSSESSION OF THE WORLD, BUT IN FACT THE WORLD GETS POSSESSION OF MEN - RUDOLF BULTMANN  
 
싸이언스 라는 자연과학이성으로, 인간은 세상을 소유하려하겠지만, 사실은, 세상이 인간을 먹을 뿐이다.
 
세상은 팩트다, 인간도 세상속의 팩트 일 뿐. -비트겐 형. 
 

In a nutshell, Bultmann is saying that progress has not made us happy. Our lives are comfortable but lack meaning.
This leaves people trapped. Because we are limited and contingent creatures, we are doomed to feel "sorrow and anxiety". The only alternative is to bury yourself in inauthentic ways of living that offer bogus solutions to life, such as throwing yourself into your job or hobby, living for your family or social respectability - or sacrificing your understanding by believing in the mythological world of religion. 
 
한마디로 말해서, 불트만은 말한다, 나아감의 욕망추구는 우리를 해피하게 못한다. 그런 삶은 편할 뿐 미닝은 부족하다. 
 
여기서 사람들은 갇혀. 우린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창조물이라서, 슬픔과 불안 을 느낄 수 밖에 없어. 그래서 우리가 찾는 차선책은, 우리를 벼라별 허섭의 삶의 방식에 몰입하는거지, 일이나 취미에 빠지거나, 가족을 위해서, 사회적 존경심을 위해서 산다는 둥 하는 보거쓰 적인 피상적 해결책으로, 이런 짓들은, 신앙을, 신앙이란건 신화적 세상 인데, 이 신화적 세상을 이성 리즌 으로 믿는것에 기인하는거다. 
크리스찬 의 삶은, 저런 것에서 다른 대안을 줘
 
Bultmann believes there is a Christian way of living that is free from anxiety because it does not fear death. Living in this way involves letting go of selfish desires and no longer clinging to things like money or power or popularity. He thinks the New Testament describes a programme for living life in this way. Bultmann calls this the 'Word of God'
 
불트만은 믿어, 불안으로 부터의 해방의 삶의방식인 크리스쳔 웨이 를. 거기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이런 크리스채니티 는, 이기적 욕망을 벗어나는 것, 돈 권력 인기 같은 것들에 기대지 않는 것, 을 말해. 신약은, 이런 삶의 방식을 서사해. 신약에 나와있어 이런 그리스도의 방식이. 불트만은 이것을, 워드오브갓, 이라고 말해. 
 
워드 오브 갓. 불트만 이 꺼낸 단어야. 불타만이 기대는 빛 이야. 불타만이 다른 미닝 개념을 꺼내면서. 
 

There's nothing SUPERNATURAL about Bultmann's use of 'Word of God'. It's very different from the way the phrase is used in John's Prologue or by Karl Barth. Bultmann's 'Word of God' is a way of life based around fearlessness, love and honesty. It's a psychologically healthy frame of mind.

According to Bultmann, a lot of people - even religious people (perhaps especially religious people) - don't understand this 'Word of God'. Atheists just dismiss the Bible as irrelevant to them and Christians focus on all the wrong things in it. Bultmann wants to draw everyone's attention to the REAL 'Word of God' in the Bible, which offers the solution to modern life. However, first we need to disentangle the 'Word of God' from the mythology surrounding it. 
 
불트만의 워드오브갓 에는, 슈퍼내추럴 이 없어. 요한복음의 갓이 로고스 라느니, 칼 바트 가 자기 도그마 에서 정의하는 것과 달라. 불트만의 워드오브갓 은, 두려움없음, 러브, 아니스티, 에 기반을 둔 삶의 방식 이다. 싸이콜로지컬리로, 건강한 마음의 프레임이다. 
 
워드오브갓, 은 케리그마 라는걸로 푸는데, 가보면
 
Bultmann doesn't regard myths as fairy tales or nonsense. He thinks that they contain deep wisdom about the meaning of life.
MYTHS EXPRESS THE KNOWLEDGE THAT MAN IS NOT MASTER OF THE WORLD AND HIS LIFE, THAT THE WORLD WITHIN WHICH HE LIVES IS FULL OF RIDDLES AND MYSTERIES AND THAT HUMAN LIFE ALSO IS FULL OF RIDDLES AND MYSTERIES - RUDOLF BULTMANN
Since we no longer have a mythological world view, people can't understand myths any more. They either treat them literally (which Bultmann thinks misses the point) or else dismiss them as silly. That's why Bultmann argues for de-mythologizing the Bible: focusing on the meaning behind the myths. This meaning Bultmann calls the KERYGMA (the Greek word for 'preaching').  
 
불트만 은 신화를, 애들동요 귀신이야기나, 논쎈쓰 로 여기지 않아. 신화야 말로 찐한 지식을 담고 있어 삶의 의미 에 대해. 
 
신화는 드러낸다 이러한 참인 문장들을,
인간은 세상과 자기인생의 마스터 주인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사는 세상은 수수께끼 와 미스테리 모름들 로 가득하다는 것,
인간의 삶 역시나, 수수께끼 와 미스테리 로 가득하다는 것.
 
 
마던의 우리는 이런 미스테릭한 세계관 을 더이상 갖고 있지 않아서, 신화 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신화를 자구적 으로만 바라본다, 또한 신화들을 어리석다고 무시한다. 불트만이 성서 를 디미톨로자이징, 하는 이유다. 신화 의 배후 의 의미 에 집중하라 면서. 신화의배후 의 미닝 개념을, 불트만 은 케리그마 라고 부른다. 
 
κηρύσσω  (kērússō) 케룻소, 내가 알리는거야. 소리소리 지르면서. 케룩쓰, 가 메씬져 고, 헤럴드 herald 의 그리스어야. 
 
전령, 소리소리 지르는겨 이건. 고대에, 전령들은, 소리소리 지르면서 정보 를 알리는거야. 
 
프로클러메이션 클레임 claim 이란건, 크라이 아웃, 소리 높여 울부짖는거야. 
 
케리그마 는 케룻소 의 내용 이야. 외침의 소리. 
 
신약에, 지저스 만의 케리그마 가 있거든. 소리 짖으며 울브짖는 찐한 , 지저스 만의 문장들 소리들, 그야말로 케리그마 가 있어. 
워드오브갓, 은 케리그마 야. 신의소리, 야. 워드 는 쓰여진글자 가 아냐 이전 말했듯이. 워드, 란건, 원래는, 소리 야. 말 이야. 신의 소리야. 신의 워드 는 인간의 워드 와는 또한 달라. 
 
소리소리 지르며 울리는 그 진동의 내용을 이해하란겨. 미스테릭하게. 
 
이걸, 자구적 리터럴리 니, 이성으로 리즌으로 이해해서, 세속의 삶이 불안하다 우울하다 는거야. 그 역사의 현장에 빠져! 그리고 거기서, 아잉 시바 결국 또 키에케고의 리프오브 페이뜨 야. 
 
나는, 키에케고 의 리프오브페이뜨 로 저걸 접하지 않았어. 세계사 를, 생물사 를 훑는, 그러면서 또한 인간의 이야기인 자연과학의 내용도 디다보고 해대면서, 이성적으로, 너무나 이성의 리즌이 광활하다보면, 이성적으로 페이뜨 가 돼. 
 
자연과학 하는애들이, 깊이 파 들어가면, 신앙 이 생길 수 밖에 없어. 왜? 너무나 광활한 미스테릭한 세상을 접하게 돼. 
 
프랜시스 베이컨 의 얘기야. 지식이 얕은 애들이 무신론자 행세 한다. 깊게 알게 되면, 이성의 작동이, 그러면, 신을 안믿을 수 가 없다. 
 
키에케고 는 덴마크 깡촌이라서, 리프오브페이뜨 만이 유일한 방법일 뿐이었던거야. 
 
This last point is important. Bultmann is not arguing that the Bible is just a collection of moral messages. He thinks the kerygma of the Bible is more than just ethics: it's a total way of life.  
 
불트만은, 성경이 모랄 의 메쎄지 총체 가 아니다, 모랄 로써의 성서 를 말하는건 무식하다. 얘들도 결국 무신론자일뿐. 
 
성서의 케리그마 는 에띡스 이상이며, 삶의 총체 다. 
 
케리그마 를, 불트만은, 예수 의 시대 에 흠뻑 빠지면서, 예수의 소리를 들은거야. 거기서, 표현못할 페이뜨 를 경험한거고. 
 

The kerygma of the Bible is about living your life like Jesus lives his and being free from false security, fear and anxiety.  

 

성서의 케리그마, 여기서 성서 라는건 , 신약이야. 지저스 처럼 산다는 것이고, 그래서 잘못된 안전망의 불안, 공포, 걱정에서 자유로와 지는것, 이게, 케리그마 이다. 

 

It's also important to note that Bultmann is not an atheist. He believes in God and he believes that Jesus uniquely reveals the 'Word of God'. However, he doesn't accept the mythological view of God as a super-powerful being inhabiting Heaven overhead or the mythological view of Jesus performing miracles and coming back to life.  

 

불트만은 무신론자 가 아니다. 그는 신을 믿는다. 지저스 는 유니크 하게 워드오브갓 을 드러냈다, 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신을 슈퍼파워를 지닌, 머리위의 하늘에 존재하는 것을 받지 않는다, 그런게 아니라며, 또한 지저스 가 기적을 보이면서 재림한다는 것도 반대한다. 

 

칼 바트 의 신은 엑쏘테릭 한 나와분리되서 내려오는 게 신, 이라는 문장과, 불트만 의 저 말들과, 다를까 ? 

 

칼 바트 는, 신을 알려말라 모른다, 그러나 분명하게 있다 신약의 내용상, 이란거고, 더하여 신은 동떨어져 있다, 이걸, 불트만은 부정할 지도 모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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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린 말이지, 슈퍼파워 의 전지전능의 신 과, 송수신 하는 그 하우투 를 원하는데. 그래서슈퍼파워 를 내재하고픈데. 

솔직하자고, 나만 그런가? 아잉 그런데 이런 말 하면, 미친놈 취급 받겄지. 

 

어쨌거나, 아직은, 칼 바트, 불트만 류가, 가장 앞선 신학적 사상 이야. 

 

그렇다고, 칼 바트 와 불트만 에 만족 할 수는 없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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