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ysius Lilius (c. 1510 – 1576), also variously referred to as Luigi Lilio, Luigi Giglio, was an Italian doctor, astronomer, philosopher and chronologist, and also the "primary author" who provided the proposal that (after modifications) became the basis of the Gregorian Calendar reform of 1582

알로이시우스 릴리우스. 루이지 릴리오, 루이지 질리오. 이 사람이 1582년 그레고리력 제안서를 낸 제1저자 인거고. 죽고나서 6년후 채택해 이사람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또한 저 그레고리력 에 정보제공자 도 코페르니쿠스야

Paul of Middelburg (1446 – 13 December 1534) was a Flemish scientist and bishop of Fossombrone.

he wrote important works on the reform of the Calendar, which procured for him invitations by popes Julius II and Leo X to the Fifth Lateran Council (1512–1518). The contents and result of the work are described under Aloysius Lilius. He also exchanged letters with Copernicus

제일란트 수도 미델부르크 의 폴. 막시밀리언 나중 황제가 친구여. 이빽으로 보르자 아빠교황 알렉산더에 의해 포쏨브로네 주교 인데. 이사람이 율리우스2세 에 레소10세 의 5차 라테르노 공의회 에 내용 중 역법개선안 이 있어. 여기에 코페르니쿠스 의 의견도 받아 제출하고 이게 릴리우스 에 의해 서술되서 나중 그레고리력에 참조 돼. 이미 유럽에 천문학 으로는 당대 스타여.



The Commentariolus, which Copernicus consciously saw as merely a first sketch for his planned book, was not intended for printed distribution. He made only a very few manuscript copies available to his closest acquaintances, including, it seems, several Kraków astronomers with whom he collaborated in 1515–30 in observing eclipses. Tycho Brahe would include a fragment from the Commentariolus in his own treatise, Astronomiae instauratae progymnasmata, published in Prague in 1602, based on a manuscript that he had received from the Bohemian physician and astronomer Tadeáš Hájek, a friend of Rheticus.

작은코멘터리 란 소책자는 1514 이전에 쓴건데, 여긴 아무런 수학적 설명도 없는, 간결한 문장의 나열이고 30년후 나올 책의 스케치야. 이걸 몇권 필사해서 아주 친한 동료들 에게 걍 준겨. 인쇄물이 아냐. 코페르니 사후 태어난 티코 브라허 가 이 스케치에 대해 쓴 책은, 티코 브라허가 프라하에서 타데아쉬 하예크 가 갖고있던 코멘터리를 보고 쓴거고 하예크는 코페르니쿠스 의 제자 레티쿠스 의 친구. 코페르니쿠스 의 리틀 코멘터리 란 책자는 조올라게 희귀한겨. 이게 인쇄본으로 등장한건 19세기 말이여.

코페르니쿠스 도 사람 참 너무나 조용하고 세상나서기 싫어하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인데, 나랑 참 비슷한데 성품이.

이사람은 인쇄물책을 총 두권 낸겨. 외삼촌에 바치는 모랄 패스토랄 러브 의 그리스어 시와편지들 라틴어로 번역한것 과 태양중심설 책 딱 두권이야. 이 논문도 세상에 안 나올껄 유일제자 가 출판시킨겨

Copernicus was still working on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even if not certain that he wanted to publish it) when in 1539 Georg Joachim Rheticus, a Wittenberg mathematician, arrived in Frombork. Philipp Melanchthon, a close theological ally of Martin Luther, had arranged for Rheticus to visit several astronomers and study with them. Rheticus became Copernicus's pupil, staying with him for two years and writing a book, Narratio prima (First Account), outlining the essence of Copernicus's theory.

게오르크 요아킴 레티쿠스. 포랄베르크 vorarlberg 오스트리아 태생에 비텐베르크대학 수학자 가 뉘른베르크 갔다가 코페르니쿠스 소문에 꽂히고, 멜란히톤 이 루터의 충실 딱깔이고 얘도 천문학자로 코형 추천해서, 저기 프롬보르크 를 일부러 찾아간겨. 나이가 40년 차이고 갈때 20대후반에 코형은 말년이여. 코형은 교수도 아니고 직업도 저땐 없으면서 자문하면서 조용한거고 여길 일부러 찾아오고 특별 유일 애제자 가 된거야. 2년을. 그리곤 1540년에 ·코형의 궤도에 대한 첫번째 설명· 이라며 나라티오 프리마. 란 제목으로 알려지는 책을 내. 이건 레티쿠스 가 강의들은걸 요약 설명한겨. 수학자라 수학공식도 넣는거고.

코형은 책 내는게 너무 조심스러운겨

At about 1532 Copernicus had basically completed his work on the manuscript of Dē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but despite urging by his closest friends, he resisted openly publishing his views, not wishing—as he confessed—to risk the scorn "to which he would expose himself on account of the novelty and incomprehensibility of his theses

책을 이미 1532년 에 마무리한걸로 봐. 친구들이 재촉을 해 출판하라고. 그는 대놓고 자기 주장을 했다 반대하면서, 자기가 노블티 특이하다는 이유로 자기자신을 비웃음의 대상에 노출하고 싶지가 않고, 자기 생각을 이해못하는 위험의 비웃음 에 또한 자길 드러내는것 이 싫은거지.

Scholars disagree on whether Copernicus's concern was limited to possible astronomical and philosophical objections, or whether he was also concerned about religious objections

코형이 천문학적 철학적 반대진영 때문에, 또는 더하여 종교적 반대파 로 인해 출판을 늦추었나 는 학자들마다 이견. 아이시바 저딴것도 시바 글이라고.

저 비웃음 은 코형의 말이고.

코형이 1503 에 폴란드 가고 10년 을 외삼촌 옆에 있다가 1514에 태양 중심설 스케치를 해. 그리고 30년 지나서 책을 내 죽는해에

1525에 프러시아 더치가 독립해. 이해에 파비아 전투로 프랑수아 는 카를황제 포로가 돼. 이전에 루터 대자보 1517에 기사들의 전쟁에 농민전쟁 에 1527 로마 약탈이야. 이와중에 발정난 헨리는 앤불린 때문에 이혼시켜줘유 해대미 도망간 교황 클레멘스 7세 찾아가는거고, 얜 이전 율리우스 워리어에겐 캐서린과 결혼특별허가 해줘유 해대던애걸랑 이게 아주 코메디여 만화로 맹글면.

그러다 위대한 술레이만이 모하지 지나서 비엔나 포위가 1529여. 카를 이 식겁해서 이탈리아전쟁 이 문제가 아녀 저 투르크 쳐야해. 그런데 시바 루터 땜에 반 갈리고. 얘들 달래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한겨. 니덜 말 들어줄테니 와서 징징들 대라 그리고 투르크 치러가자. 이게 1530 이여. 이 클레멘스 가 태양중심설 듣고 비서한테 선물한거고 다음 교황이 1534 파울루스3세 여. 트렌토 공회의 를 발족시켜서 카운터 리포메이션 기치를 올리는겨. 이사람도 코형 스폰서여.

오히려 마르틴루터 나 장칼뱅 이 태양중심설을 개또라이 취급을해. 저걸 반박하는 장칼뱅 의 의견을 보면 얜 전형적인 개무식한 오컬트 문꽈야. 루터가 유카리스트 의 지저스 의 진짜 피와살 말에 츠빙글리 가 피눈물을 흘려 얼굴마주한 대화후에. 아 어떻게 인간이란게 저렇게 개무식 미개한가. .

저 두 애는 인류역사에 벌레여 저거. ㅋㅋ 장로교 존 녹스 란 엑쓰. 아 샹 이개노무인간 우리 스콧마리 언니한테 한짓만 생각하믄.

오히려 카톨릭은 좋아했어. 프로테스탄트는 개무시하고. 그러나 루터 딱갈이 멜란히톤은 태양중심이야. 주위 인간들도 프로테스탄트야. 학문적 종교적으로 코페르니쿠스가 겁먹을 이유는 전혀 없어. 단지 귀찮을 뿐이야. 세상에 자기 이름 알리는 명예욕이 없어. 아 나랑 비슷해 고귀한 성깔이

Under strong pressure from Rheticus, and having seen the favorable first general reception of his work, Copernicus finally agreed to give De revolutionibus to his close friend, Tiedemann Giese, bishop of Chełmno (Kulm), to be delivered to Rheticus for printing by the German printer Johannes Petreius at Nuremberg (Nürnberg), Germany. While Rheticus initially supervised the printing, he had to leave Nuremberg before it was completed, and he handed over the task of supervising the rest of the printing to a Lutheran theologian, Andreas Osiander.

레티쿠스 가 1540년에 냈는데 반응이 괜찮아. 코형을 압박해 책내시라고. 말년에 코는 풍걸려 마비에 내출혈 이 뇌졸증으로 죽은듯 한데, 레티쿠스 의 응원으로 드디어 내기로 한겨. 이걸 출판을 뉘른베르크 에서 한겨. 레티쿠스가 감독 마무리를 오지안더 에 부탁하고. 다들 루터파여. 코형은 카톨릭이야. 지금이야 이념다르면 서로척폐지만 쟤들은 그런게 없어.

The immediate result of the 1543 publication of Copernicus's book was only mild controversy. At the Council of Trent (1545–63) neither Copernicus's theory nor calendar reform (which would later use tables deduced from Copernicus's calculations) were discussed.[121] It has been much debated why it was not until six decades after the publication of De revolutionibus that the Catholic Church took any official action against it, even the efforts of Tolosani going unheeded. Catholic side opposition only commenced seventy-three years later, when it was occasioned by Galileo.

1543 출판되고 코형 죽고. 카운터리포메이션 시작 트렌토 공회의가 1545-63 일때도 코피형 이론도 달력이야기도 없어. 이 달력은 5차 라테르노 고 루터 이전이여. 이걸 나중에 릴리우스가 종합하고 죽고. 1582에 한겨. 달력 이 기선잡기 좋은 꺼리거든. 늦은겨 이조차도. 자기들 군기잡기 바쁜거고 태양중심 관심이 없어. 60년 동안 토의조차 안된겨. 서기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 의 화형은 코피형과 상관이 없어. 60년 지나 걍 쓰잘덱없이 갈릴레오 가 짱돌맞고 괜히 유명해진겨 이건.

Tolosani
The first notable to move against Copernicanism was the Magister of the Holy Palace (i.e., the Catholic Church's chief censor), Dominican Bartolomeo Spina, who "expressed a desire to stamp out the Copernican doctrine".[123] But with Spina's death in 1546, his cause fell to his friend, the well-known theologian-astronomer, the Dominican Giovanni Maria Tolosani of the Convent of St. Mark in Florence. Tolosani had written a treatise on reforming the calendar (in which astronomy would play a large role) and had attended the Fifth Lateran Council (1512–1517) to discuss the matter. He had obtained a copy of De Revolutionibus in 1544. His denunciation of Copernicanism was written a year later, in 1545, in an appendix to his unpublished work, On the Truth of Sacred Scripture.

출판되자마자 반론이 나와. 얘들 분위기야. 항상 누가 뭔말하면 토론을 해야해 반박하고. 분위기타면 이제 이단몰기로 죽이는 종교전쟁 시대가 온거고.

도미니칸 바르톨로메오 스피나. 교황정에서 한자리하는 이고, 코형보다 두살 아래고. 나오자마자 코피이론은 없애야할 이론 이라며. 그리고 1546년 죽어. 3년더 산겨.

친구가 지오반니 마리아 톨로자니. 이 톨로자니 가 나름 아퀴나스 흉내내며 비판해. 5차 라테르노 참여에 달력 개혁 에 관심에 천문학도 조예가 있는겨.

1544년 에 구입해서 반론을 다음해 자기책 부록 으로 낸겨.

이사람 논리가 재밌는데

Copernicanism was absurd, according to Tolosani, because it was scientifically unproven and unfounded.
어브써드, 완전히 귀먹은 말도안되는 이론. 논리적으로 증명안된 근거없는 얘기

First, Copernicus had assumed the motion of the Earth but offered no physical theory whereby one would deduce this motion. (No one realized that the investigation into Copernicanism would result in a rethinking of the entire field of physics.)

지구의 움직임을 어쓤드, 추론 가정만 했지 피지컬한 경험가능 증명가능한 이론을 제공안한다, 이런 피지컬로 연역적인 참인 문장의 운동현상을 설명해야 하는데.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탐구하다보면 기존 저런 피지칼함이란 자연과학 전체를 이 형님이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보고 있다는걸 알게되리란걸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이 다음이 웃겨 더.

문제는 수학에 대한 시선이야. 톨로자니 는 수학을 유명론의 이름뿐인 관념놀이 로 보는겨.

Second, Tolosani charged that Copernicus's thought process was backwards. He held that Copernicus had come up with his idea and then sought phenomena that would support it, rather than observing phenomena and deducing from them the idea of what caused them.

코피는 퇴보적이다. 코피는 자기 아이디어를 만들고는 그걸 받드는 현상을 찾으려 한다, 원래는 현상을 관찰해서 거기서 그 현상들의 원인되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In this, Tolosani was linking Copernicus's mathematical equations with the practices of the Pythagoreans (whom Aristotle had made arguments against, which were later picked up by Thomas Aquinas). It was argued that mathematical numbers were a mere product of the intellect without any physical reality, and as such could not provide physical causes in the investigation of nature.[125]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라보는 수학 이 어떤거냐 의 문제여 이게. 저당시 사람들은, 아리형은 수학을 오브젝트가 아닌 껍데기 네임으로 보았다는겨. 유명론이 보는 수학이야. 오브젝트로 취급않는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거고. 수학은 현상을 설명 못하는거야.

이게 톨로자니 가 인식하는 수학이고 저시대 수학을 바라보는 거대한 덩어리여 저게. 수학이 제대로된 오브젝트 로 등장하는건 데카르트 나올때여. 이때 페르마 메르센 등 의 수학들이 강렬하게 주인이 되면서 저런 톨로자니 의 수학비하세계관이 사라지는게 근대라는거야. 이 시작 역시 코페르니쿠스 여. 코페르느쿠스 가 오브젝트로서의 수학 의 자리를 구축한겨. 이게 리띵킹 오브 더 인타이어 필드 오브 피직스 야. 두가지 이유는 같은 하나야. 피직스 라는 자연과학은 수학이 시작이자 끝인거야

수학을 모르면, 못하면, 투표권을 주면 안돼

수학 못하면 피선거권을 주면안돼

문꽈는 정치하면 안돼. 너무나 미개해.

One of the subjects that Copernicus must have studied was astrology, since it was considered an important part of a medical education.[56] However, unlike most other prominent Renaissance astronomers, he appears never to have practiced or expressed any interest in astrology.

코페루니쿠스는 점성학을 공부했음에 틀림없다. 왜냐면 당대 의학교육으로 중요한 분야였으니. 이사람은 의사고. 그러나 대부분 다른 특출한 르네상스시대 천문학자들과 달리 그는 결코 현장적용을 한적도 없고 점성학에 어떤 관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10간 12지가 저 점성학이여 저기에 오행 개지랄 어거지 공리로 붙이고. 아 정말 개잡쓰레기 음양오행. 사주가 어쩌고 별자리에 . 으 시바리 관우에 별놀이 하는 머저리 제갈량 미개 이야기.

참  끔찍한 극똥 들이 조선에 오면 신들이 돼


Statue of Copernicus next to Cracow University's Collegium Nov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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