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s reign was marked by the further development of a two-party system. In general, the Tories were supportive of the Anglican church and favoured the landed interest of the country gentry, while the Whigs were aligned with commercial interests and Protestant Dissenters. As a committed Anglican, Anne was inclined to favour the Tories.[124] Her first ministry was predominantly Tory, and contained such High Tories as Daniel Finch, 2nd Earl of Nottingham, and her uncle Laurence Hyde, 1st Earl of Rochester.[125] It was headed by Lord Treasurer Lord Godolphin and Anne's favourite the Duke of Marlborough, who were considered moderate Tories, along with the Speaker of the House of Commons, Robert Harley
퀸앤 을 대표하는 말이, 스콧과의 유니온 과 함께, 지금의 여야정치 를 발전시키다. 투-파티 시스템, 두 정당 체제. 토리 는 앵글리칸처치 를 지지했고, 그 컨트리 젠트리 의 랜디드 이익을 선호했다. 컨트리, 지방의 젠트리 계층 이 지주 거든. 작위 는 못받았지만 땅이 있어. 이익을 땅에 기반둔 이들이야. 상공인이 아녀 이들은. 땅을 중시하니 토지에 농업 이 더 관심가는 이들이야. 휘그 는 상업적 이익에 디쎈터 들을 보다 지지해. 앤 은 앵글리칸에 올인한 여자로서, 토리 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녀의 첫번째 행정부는 압도적으로 토리였고, 하이토리 를 기용하다, 노팅엄 다니엘 핀치, 그의 엉클 로체스터 의 로렌스 하이드. 재무장관 즘되는 로어드 트레져러 는 고돌핀 이었고, 앤의 총애 말버러 공작, 이들은 온건한 토리들 이었다, 하원 의장 로버트 할리 와 함께.
말버러 가 애매한겨 저기선 토리 라 지만, 마누라 사라 가 앤의 측근이고 철저한 휘그거든.
말버러 는 제임스2세 의 페이지 로 시작한 인간이야. 고돌핀 은 제임스2세 를 반대했던 이가 계속 중용되다가 앤때도 2인자여.
얘들은, 이 조선 빠닥 적폐놀이 하는 개념으로는 말이지, 절대 이해를 못해. 그래서 쟤들 역사 서술을 절대 할수가 없는겨 이게. 조선 애들의 근본없는 인식 개념으로 절대 쟤들의 이야기 를 해석을 할 수가 없는겨.
토리와 휘그. 얘들을 근본적으로 이해를 해야 해. 이전이 카발리어 와 라운드헤드 여. 찰스1세를 따르는 왕정파 와 의회파인 라운드헤드 머리깎은 애들. 찰스1세 가 목짤리고, 라운드헤드 세상이 된겨. 이걸 퓨리튼 크롬웰이 독차지를 하고, 얜 카톨릭만 아니면 되는거지만 퓨리튼 이 독점하게 되는거고 모든 권력을, 교회포함해서, 그리고 조지 몽크 가 찰스2세 데려와서 왕정복고 하고, 카발리에 와 라운드헤드 가 화해 를 한겨. 그러다가 동생 제임스2세 후계 문제가 발생하고, 얜 뜬금 카톨릭 이여. 기존에 카발리에 든 라운드헤드 든 다 사라진거지만, 공통은 머여? 다들 반카톨릭 이야. 카톨릭 은 오직 레이디 코트 에만 득실득실한겨 이게.
Charles II (29 May 1630 – 6 February 1685)
찰스2세 가, 1660 나이 30에 올라서, 25년 재임하고 1685년 2월 에 죽어. 동생 세살아래 제임스2세 승계배제법안 이 1679년 이야. 그리고 킹과 동생인 형제 를 암살하려는 라이하우스 음모 가 1683 이고 2년 후에 죽어.
시작 이 포피쉬 플롯. 교황쪽 음모. 라는 사건이야. 카톨릭진영 을 포피쉬 라고 작명을 한겨.
The Popish Plot was a fictitious conspiracy invented by Titus Oates that between 1678 and 1681 gripped the Kingdoms of England and Scotland in anti-Catholic hysteria
On 13 August 1678, whilst Charles was out walking in St. James's Park, the chemist informed him of the plot
On 1 November 1678, the House of Commons resolved to proceed by impeachment against "the five popish lords"
The Exclusion Bill Parliament was a Parliament of England during the reign of Charles II of England, named after the long saga of the Exclusion Bill. Summoned on 24 July 1679, but prorogued by the king so that it did not assemble until 21 October 1680, it was dissolved three months later on 18 January 1680/81.
The Oxford Parliament, also known as the Third Exclusion Parliament, was an English Parliament assembled in the city of Oxford for one week from 21 March 1681 until 28 March 1681 during the reign of Charles II of England.
The Rye House Plot of 1683 was a plan to assassinate King Charles II of England and his brother (and heir to the throne) James, Duke of York. The royal party went from Westminster to Newmarket to see horse races and were expected to make the return journey on 1 April 1683,
포피쉬 음모 가 서기 1678년 8월 시작해. 재판이 세달후에 시작해서 22명이 사형당하고. 이것때문에 나온게 배제법안 이야 1679. 이 배제법안 을 제출한 의회 를 킹이 해산을 해. 그리고 재소집된 의회 가 두달후에 익스클루젼 빌 의회야. 배제법안의회 라는건 재소집해서 만든 의회여 7월에. 제출은 5월에 한거고 이 의회가 해산된거거든. 재소집된 의회 를 Prorogation 프로로그 해 킹이. royal prerogative 로얄 프리라거티브, 킹의 특권이야. 회기를 중지 하고 해산시키는겨.
킹이 의회를 소집하는건, 돈이 필요한거고, 법안 통과 가 필요한겨. 잉글랜드 는 디크리 를 발표해서 킹 이 혼자 법 제정 공포하는 나라가 아냐. 법 은 무조껀 의회 를 거쳐야해. 법이 통과되어야 세금 걷어 써. 어찌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해야해. 다시 소집한게 옥스포드 의회 야 1681년. 그런데, 저때 태양왕 루이가 돈을 꿔주거든. 해산하는겨 바로.
카톨릭음모 1678, 배제법안 제출 1679, 이게 1681년 옥스포드 의회 를 끝으로 바람이 빠진겨. 그럼에도 이때 다시 배제법안을 제출을 해 의회가. 그러다가 2년후 1683에 킹형제 암살음모 사건인 라이하우스 음모 가 터진겨. 이걸로 배제법안제출 세력이 완벽하게 진압이 돼. 그리고 2년 후에 찰스2세가 죽고, 제임스2세 가 올라.
Titus Oates (15 September 1649 – 12/13 July 1705) was an English priest who fabricated the "Popish Plot", a supposed Catholic conspiracy to kill King Charles II.
Israel Tonge (11 November 1621 – 1680), aka Ezerel or Ezreel Tongue, was an English divine. He was an informer in and probably one of the inventors of the "Popish" plot.
포피쉬 음모 가 1678인데, 이 사건을 주작질한 사람이, 타이터스 오웃스.야. 이사람이 주장하길, 자기가 제수이트 로 스파이가 되서 제수이트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킹 찰스를 암살할거라며. 이걸 적은 종이를, 이즈리얼 톤지 의 집에 가서 흘려. 이즈리얼 톤지 는 오웃스 보다 서른 많은 아빠뻘이고 스폰서인겨. 이 톤지 가 카톨릭에 치를 떠는 인간이고 세상은 카톨릭이 일루미나트 인겨. 당대에 정신병자 로 봐. 이사람 집안에 의사 가 살고, 의사가 이걸 친구에게 보여주고, 이걸 킹에 보고하는게 8월 이야. 조사 들어가고 최소 22명을 사형시켜. 원래 킹은 저게 주작질 냄새 가 뻔한걸 알아. 이 수사를 밀어부치는게 의회야. 카톨릭 영주들을 치는겨 저게. 저당시 찰스2세 가 카톨릭에 관대한거야. 동생도 카톨릭 선언한거고 킹 마누라는 포르투갈 꼴통 카톨릭 여자고. 톤지 는 60되서 죽어 1680년. 톤지 는 오웃스 에 이용만 당했을 뿐이고.
오웃스 가 법적증언을 하는데, 퀸 이 주치의 와 짜고 킹을 독살을 시키려 했다느니. 찰스는 안믿어. 그런데 권력은 의회 에 있는거고,
After nearly three years and the execution of at least 15 innocent men, opinion began to turn against Oates. The last high-profile victim of the climate of suspicion was Oliver Plunkett, Roman Catholic Archbishop of Armagh, who was hanged, drawn and quartered on 1 July 1681. William Scroggs, the Lord Chief Justice of England and Wales, began to declare more people innocent, as he had done in the Wakeman trial, and a backlash against Oates and his Whig supporters took place.
최소 3년간 적어도 15명의 죄없는 이들이 사형당하고, 여론이 오웃스 에 악화가 돼. 얜 아파트 받고 연금도 받는거고. 아마 의 대주교 도 교수에 절단형 받아. 로어드 치프 져스티스, 법무부장관 윌리엄 스크록스. 가 사람들이 무죄 라고 판결을 내려. 오웃스 에 휘그 지지자들이 쫓기는겨.
ホイッグ党 ホイッグとう . 호잇구당. 한글로 휘그 라 하지만. 위그 로 소리내고 대게.
The term Whig was originally short for whiggamor, a term meaning "cattle driver" used to describe western Scots who came to Leith for corn. The cattle drivers would call out "Chuig" or "Chuig an bothar" (meaning "away" or "to the road"), and the sound was converted by English people to the pejorative term "Whig" or "Whiggamore".[10] In the reign of Charles I the term was used during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to refer derisively to a radical faction of the Scottish Covenanters who called themselves the Kirk Party (see the Whiggamore Raid). It was then applied to Scottish Presbyterian rebels who were against the King's Episcopalian order in Scotland.[11][12]
The term Whig entered English political discourse during the Exclusion Bill crisis of 1678–1681 when there was controversy about whether or not King Charles II's brother, James, should be allowed to succeed to the throne on Charles's death. Whig was a term of abuse applied to those who wanted to exclude James on the grounds that he was a Roman Catholic. The fervent Tory Samuel Johnson often joked that "the first Whig was the Devil"
휘그 라는 말은, 휘거모어. 의 줄임인데, 소 목동. 이고, 웨스턴 스콧 이 리뜨 에 곡물 을 사러 올때 이들을 칭하는 말인데, 이들이 소를 추이크, 추이그 언 보따르. 훠이 훠이 하면서 모는겨, 길 로 가라. 이게 잉글리쉬 들이 우스게로 비하하면서 저들을 휘그 휘거모어 라고 부른겨. 즉 소 몰이 할때 훠이 훠이 해대는 소리, 의성어 여 저게. 찰스1세 목짤리는 내전할때 스콧 커버넌트 들을 휘그 라고 부르기 시작한거고, 커크 가 공식명이고, 이걸 스콧 도 휘그 라며 자기들 닉으로 스스로 불렀어.
휘그 란건 저때, 스콧 인간들이야. 이게 잉글랜드 인간에게 쓰이기 시작한게, 배제법안 제출한 1679년 5월 부터여. 제임스2세 는 왕위 승계 에서 배제시켜야 한다. 이들이 휘그 라고 불려지기 시작해.
As a political term, Tory was an insult (derived from the Middle Irish word tóraidhe, modern Irish tóraí, meaning "outlaw", "robber", from the Irish word tóir, meaning "pursuit" since outlaws were "pursued men")[5][6] that entered English politics during the Exclusion Bill crisis of 1678–1681.
토리 란 말은, 아이리쉬 야. 아웃로 라버, 무법, 강도, 아이리쉬 추적 이 어원인데, 무법자는 쫓기는 사람들이니까. 배제법안 때 제임스2세 를 반대 하는이들이 휘그 고 이 상대 를 토리 라고 부르기 시작한겨. 토리 는 휘그 에 이어 나온겨. 토리 라고 부른건, 휘그 들이 비하하며 부른거거든.
왜 휘그 와 토리 라고 상대를 서로 불렀는가? 데이빗 흄 이 친절히 설명해줘 그 이유를.
In 1757, David Hume wrote:
The court party reproached their antagonists with their affinity to the fanatical conventiclers in Scotland, who were known by the name of Whigs: The country party found a resemblance between the courtiers and the popish banditti in Ireland, to whom the appellation of Tory was affixed. And after this manner, these foolish terms of reproach came into public and general use; and even at present seem not nearer their end than when they were first invented.[8]
대이빗 흄.은 스콧 인간이고, 참 바보같은 단어들인거지. 휘그 는 스콧말에 목동 외치는 소리로 비하된 스콧 커버넌트들이고, 토리 는 무법자 깡패 라는 아이리쉬 인데, 이게 지들 당명으로 써대는겨
코트 의 정당, 킹 코트 의 무리 즉 토리 는 자기들 상대 를 비난하는데, 그 상대들이 광신도적인 스콧의 콘벤티클러들과 같다며, 아 예전 그 미친 스콧 인간들을 휘그 라고 했었지? 해서 휘그 라고 불러대고, 컨트리파티 시골땅 근거를 둔 나중 휘그들은, 상대인 코티어, 코트인간들이 아일랜드의 카톨릭 깡패들, 포피시 밴디티 와 닮은겨. 아이리쉬 로 깡패 무법자 가 토리라며, 토리 라는 이름이 붙다. 이렇게 서로 상대를 이름지은 후, 이 바보같은 비방 용어들이 공개적이고 일반적인 용법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조차 보건데, 이 용어들이 처음 만들어질때보다도, 사라질것 같지 않다 두 단어는.
ㅋㅋㅋㅋ.
Thomas Osborne, 1st Duke of Leeds, KG (20 February 1632 – 26 July 1712),[1] was a prominent English politician. Under King Charles II (and known at the time as Lord Danby), he was the leading figure in the government for around five years in the mid 1670s. He fell out of favour due to corruption and other scandals, and was impeached and eventually imprisoned in the Tower of London for five years until the accession of James II of England in 1685. In 1688 he was one of the Immortal Seven group that invited William III, Prince of Orange to depose James II as monarch during the Glorious Revolution. He was again the leading figure in government, known at the time as the Marquess of Carmarthen, for a few years in the early 1690
포피쉬 음모 1678 때, 찰스2세 가 이거 개 거짓말이라며. 졸 귀찮아하는겨. 그리곤 이 사건을 토마스 오즈본 에게 맡겨. 리즈 공작. 찰스2세 의 2인자여. 로어드 댄비. 돈관리 재무부가 최고자리고 이게 프라임미니스터, 수상 자리가 되거든. 이사람이 타이터스 오웃스 를 심문해보니, 못 믿겠는겨. 의회 가 오히려, 왜 오웃스 말 무시하냐며, 너도 카톨릭과 한패 라며 기소를 하는겨. 이사람도 결국 런던탑에 갇혀.
Charles is said to have told him when he made him treasurer that he had only two friends in the world, himself and his own merit.[10] He was described to Samuel Pepys as "one of a broken sort of people that have not much to lose and therefore will venture all", and as "a beggar having £1100 or £1200 a year, but owes above £10,000".[11] His office brought him in £20,000 a year,[12] and he was known to make large profits by the sale of offices; he maintained his power by corruption and by jealously excluding from office men of high standing and ability. Gilbert Burnet described him as "the most hated minister that had ever been about the king"
찰스2세 가 오즈본 에게 말했다고 전해지는게, 재무부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찰스 자기는 오직 세상에서 두명의 친구를 두었다. 자기 자신과, 자기가 가진 메릿 장점. 오즈본 은 당대 새뮤얼 핍스, 해군경력도 없이 해군장관 하고 의원 하고, 온갖 글로 당대를 보여주는 인물이 묘사하길, 오즈본은 파산자 신세, 잃을것은 많지 않아서 모든것을 시도하는 인간, 일년 벌이 1100파운드 에 1만파운드 이상을 빚진 인간. 그러다가 저 자리를 맡은겨, 연봉 2만 파운드. 자리들을 팔면서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알려진다. 고급귀족과 능력있는 사람들은 배제하면서 부패 로 자기 권력을 유지했다. 동시대 학자 길버트 버넷 은 그를 묘사한다, 가장 미움받은 장관 이다 킹 주위에 있던 인간들 중에.
저 사람이 미움도 많이 받은 상태에서, 포피쉬 음모 로 찍힌겨 의회에.
but on 12 February 1684 his application to Chief Justice Jeffreys was successful, and he was set at liberty on bail of £40,000, to appear in the House of Lords in the following session. He visited the king the same day, but took no part in public affairs for the rest of the reign
이사람은 5년 을 런던탑에 갇혀서, 보석금 내고 풀려나서 찰스2세 를 만나지만, 자리 못맡고 찰스2세 가 죽은겨. 당연히 제임스2세 가 즉위하고, 오즈본 은 쓰이는겨. 제임스2세 입장에선, 카톨릭 음모 라며 주작질한 저 타이터스 오웃스 가 죽일 애가 되는겨. 오즈본 은 그렇지만, 카톨릭은 아냐. 오직 정치야. 제임스2세 의 카톨릭 편향 정치 는 망하는 걸 알아. 이 오즈본이 오렌지 찾아가는 불멸의 7인 중 하나야. 참 웃겨 이 잉글랜드 역사는.
On 31 August 1681, Oates was told to leave his apartments in Whitehall, but he remained undeterred and even denounced the King and his Catholic brother, the Duke of York. He was arrested for sedition, sentenced to a fine of £100,000 and imprisoned.
타이터스 오웃스 는 반대로, 3년 지나면서 무죄 판결들이 나오고, 화이트홀 이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고급주택이야, 퇴거 명령을 받지만, 안가고 버티면서 오히려 킹과 동생 제임스를 비난해. 써디션, 선동죄로 체포되고 벌금 십만파운드 에 투옥이 돼.
When the Duke of York acceded to the throne in 1685 as James II, he had Oates retried, convicted and sentenced for perjury, stripped of clerical dress, imprisoned for life, and to be "whipped through the streets of London five days a year for the remainder of his life."[8] Oates was taken from his cell wearing a hat with the text "Titus Oates, convicted upon full evidence of two horrid perjuries" and put into the pillory at the gate of Westminster Hall (now New Palace Yard), where passers-by pelted him with eggs. The next day he was pilloried in London and the third day was stripped, tied to a cart, and whipped from Aldgate to Newgate. On the next day but one he was whipped from Newgate to Tyburn. The presiding judge at his trial was Judge Jeffreys, who stated that Oates was a "shame to mankind", despite the fact he himself had helped to condemn innocent people on Oates' perjured evidence.
그러다가, 제임스2세 가 올라서, 오웃스 를 재판하는겨. 퍼저리, 위증죄야. 모든것은 오웃스 가 문서 주작질에 법정 증언 이 다야. 없어 이게 최소 22명 사형판결난 사건이. 무기징역 선고 하고, 일년마다 5일 동안, 런던 거리 를 지나가게 하면서 채찍질 받도록. 판결문 이, 오웃스 에게 "타이터스 오웃스, 두가지 끔찍한 위증들 의 명백한증거 로 유죄" 라 쓰여진 모자 를 쓰고 칼을 목에 차고 웨스트민스터 홀 문 에 세우고, 지나는 이들이 그에게 달걀을 던진다. 그 다음날 칼을 차고 런던에 있고, 세번째날은 칼 벗겨서 수레에 묶고는 올게이트 에서 뉴게이트 까지 휩, 짐짝 취급 조리돌림질. 그 다음날 뉴게이트에서 타이번까지. 재판장은 제프리즈 였는데, 말했다, 오웃스 는 인류에게 치욕 이다. 위증죄로는 사형을 내릴수 없다며 아쉬워하다. 등등.
그런데, 1688 오렌지 가 오걸랑
Oates spent the next three years in prison. In 1689, upon the accession of the Protestant William of Orange and Mary, he was pardoned and granted a pension of £260 a year, but his reputation did not recover. The pension was later suspended, but in 1698 was restored and increased to £300 a year. Oates died on 12 or 13 July 1705, by then an obscure and largely forgotten figure.
사면되서 연금 받지만, 명예는 회복되지 않다. 연금은 나중에 정지되고, 다시 회복되고 늘었다. 오웃스 는 이후 죽다, 56세, 그때는 누군지도 잊혀진 인물이 된 상태에서.
.고돌핀 도 퀸 앤 입장에선 불편해. 말버러 도 얍삽해 보일 뿐 아빠 페이지 보이였던 애가 배신하고.
Robert Spencer, 2nd Earl of Sunderland, KG, PC (5 September 1641 – 28 September 1702) was an English nobleman and politician of the Spencer family.
스펜서, 선더랜드 백작도, 제임스2세 반대 했던 인간이야. 그래도 찰스 가 쓰고 제임스 도 이사람을 외교부 장관 시켜. 퀸앤 때도 장관 시켜. 이전 오렌지 도 이사람을 써.
이 조선 빠닥 같은 쫍다랗고 적폐놀이하는, 이 조선 오백년 들 마음으론, 쟤들 역사 가 이해가 안되는겨 이게.
저들 이야기 에 하이 토리, 휘그 준토 등, 다음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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