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married Henry on 19 May 1051, during the feast of Pentecost.[1][6] Henry was nearly twenty years older than Anne.[1] Her wedding on 19 May 1051 followed the installation of Lietbert as bishop of Cambrai, and Anne was crowned immediately following the marriage ceremony, making her the first French queen to celebrate her coronation in Reims Cathedral
키예프 의 안.이 서기 1051년 에 결혼식을 해. 노트르담 드 랭스. 에서. 앙리가 스무살 많은거로 보고, 안 은 15세 에서 25세 사이 정도, 걍 20세 정도로 봐. 참 싕기한겨. 저 키예프 에서, 파리 까지 온겨 결혼하려고. 저 시대에.
The negotiations for Anne's marriage to the 18-years-older King Henry took place in the late 1040s, after the death of Henry's first wife, Matilda of Frisia, and their only child. Due to the pressing need for an heir, and the Church's growing disapproval of consanguineous marriages, it became necessary for Henry to seek an unrelated bride.[1][3] The Kievan Rus' were not unknown to the French. Yaroslav had married several of his children to Western rulers in an attempt to avoid the influence of the Byzantine Empire
앙리 첫부인이 프리지아 의 마틸다 인데, 작센 의 브룬 들이야 Brun. 브룬즈위크 브라운슈바이크 하노버 의 도시 시작 이 이 브룬.이야. 브루노 라는 이름이. 브룬. 브라운. 이고 저 작센이 갈색인겨. 교회에서 콘 쌩기니어스, 상구이스 가 블러드 피. 같은피 결혼을 반대해서, 짜증 나서 아예 먼 핏줄 찾은게, 키예프 여. 야로슬라프 가 블라디미르 대제 의 아들이고, 엄마가 마케도니아조 의 안나 여. 블라디미르 는 할머니, 이고르의 마누라, 성녀 올가 에서 자란거고, 비잔틴이 쎄게 들어오는걸 야로슬라프가 싫어해서 밖의 세력을 얻으려고 첫딸은 노르웨이 퀸, 두번째는 헝가리 퀸.으로 가. 셋째딸이 프랑스 퀸 으로 간겨. 얘들은 서기 천년도 이렇게 섞였어.
In the autumn of 1049 or the spring of 1050, Henry sent Bishop Gauthier of Meaux, Goscelin of Chauny, and other unnamed advisors to Yaroslav's court.[1] It is possible that there were two diplomatic missions to the Rus at this time, with Roger of Chalons also present.[1][2][4] No record of the marriage negotiations or the dowry arrangements survives, although Anne reportedly left Kiev with "rich presents"
서기 1050년 전후, 앙리 가 주교에 사람들을 야로슬라프 로 보내고, 외교적 미션도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기록으로 남은건 지금 아무것도 없어. 안 이 키예프를 떠났다, 많은 선물들을 갖고.
프랑스 는 러시아 든, 폴란드 든, 사이좋아 그래서인지. 독일이야 러시아 애들에게 철저히 짓밟혔지만, 수백만의 독일여자들이 강간을 당했어 러시아 적군애들한테. 이 조선 이란 다이너스티 는, 지들이 공개적으로 조선여자들을 창녀로 수급하고 공급하는 오백년에 중국에는 수시로 공녀 들을 바치잖니. 사신이 오면 접대부를 들이고. 그러면서 참 싀안하게 일본에게 당한건 부들부들 대고, 중국은 지들 중국몽이라잖니 ㅋㅋㅋ. 쟤들 당한거에 비해서 당한걸까.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불쌍한 한이 많은 애들인줄 알아 이 조선애들이 ㅋㅋㅋ. 그 한이란건 조선 오백년 치자 들이 심은거거든. 저 조선 오백년 동안 조선 양반 들이 민들에게 한것 보면 끔찍한데, 야 저 들이, 저걸 모두 일본 탓으로 돌리면서, 사과하라 용서하라 ㅋㅋㅋ. 세상에 이따위 코메디도 없지 이게.
그리곤 저 조선 두 마리가 통일이여 이 랄지를 하고 앉았으니.
연방제 어쩌고, 미친고야 저건. 조선 두마리가 합치면서, 완벽하게 지옥 이 되는거야 이게. ㅋㅋㅋ.
저걸 눈물 뚝뚝 흘리며, 정의여 민주여 민족이여 아 위대함둥 한민족 ㅋㅋㅋ. 참 비참한 땅이고 비참한 지능의 나라지.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German: 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was the last Great Power conflict with the Bourbon-Habsburg dynastic conflict at its heart. It occurred from 1740 to 1748 and marked the rise of Prussia as a major power.[4] Related conflicts included King George's War, the War of Jenkins' Ear, the First Carnatic War and the First and the Second Silesian Wars.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 1740-48. 외서터라이히셔 에어프폴게크리크. 부르봉 과 합스부르크 의 마지막 충돌. 그곳의 하트, 하면, 이건 오스트리아 의 중심 이야. 전쟁은 오스트리아 땅에서 난거지 프랑스땅이 아냐. 프랑스 가 합스부르크 와의 전쟁은 로타링기아 에서 나는거고 이탈리아 야, 항상 이 가운데 땅이고, 그래서 플랑드르 가 역시나 항상 전장의 중심이었고. 프랑스 는 뚱땡이 샤를 때 이탈리아 스폴레토 가이 니, 저 바이킹 롤로 니 노르망디 땅 줄때나 본토가 전쟁터였고, 백년전쟁때 잉글랜드 가 와서 짓밟아준거지, 대게 지들 땅 밖에서 저지래를 한겨. 그러다 1789 대학살 내전할때 지들끼리 방데전쟁하면서 참혹하게 죽임질 한거지. 그러다가 세계대전 두번으로 자기들땅에서 당한거고 멍때린상태에서.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도, 직접 적 당사자는, 합스부르크 와 비텔스바흐 고, 그래서 오스트리아 와 바바리아 여. 이전 스페인 후계 전쟁 은,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 여 직접적 상대 둘 은.
30년 전쟁 도 오스트리아 의 카톨릭 대 프로테스탄트 들이고 신성로마애들 일이여 저건. 80년전쟁 은 스페인 대 네덜란드 문제고.
저기에 프랑스 가 끼는거야. 그러면서 얘들이 전쟁의 핵이여.
저기에 잉글랜드 가 끼는거야. 그러면서 얘들이 전쟁의 핵이여.
저걸 모두, 중재해서 도장찍게 해주는 건 말이야. 잉글랜드 여 이제. 1707년 넘어서면서 영국 인거고.
대륙에서 벌어지는 모든 건, 이제 잉글랜드 눈치 를 봐야 해. 시안하게. 이게 1588 스페인 아르마다 가 패하면서 잉글랜드가 네덜란드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가 등장하는겨 이게. 이때부터 저 전쟁목록 들을 죽 보고 마무리하는것 보면, 항상 이 잉글랜드 여. 전쟁 시작도, 잉글랜드 눈치 를 봐야 해 잉글랜드 와 상관없는 전쟁들 조차.
신성로마제국 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된겨 이게. 얘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해. 프랑스 가 항상 끼들어가는겨. 그러면서 로타링기아 가운데 인, 알자스 와 로렌 을 결국 이 프랑스가 갖고 온겨. 엄청난 의지야 이건.
신성로마 는 오스트리아 가 끽해야 동쪽 오스만 을 세르비아 쪽으로 내모는 것 까지만의 힘이야. 이건 폴란드 와 바바리아 와 외젠 의 힘이여. 여기에 합세한 세르비아 귀족들의 힘인거고. 오스트리아 는 힘다 빠진 투르크 애들이나 상대할 정도지, 유럽 에선 스스로 아무것도 못해 이제. 30년 전쟁 부터여 이건. 여길 비집고 들어온게 스위든 이야. 네덜란드는 독립을 한거고.
30년전쟁 끝나고도 프랑스 와 스페인은 계속 전쟁이야. 크롬웰 죽고서야 이 둘은 끝난겨. 루이가 상속전쟁 데볼루션 을 해. 이것도 잉글랜드 네덜란드 가 막아, 끝내야 해. 열받은 루이가 네덜란드 를 쳐들어가, 잉글랜드 가 돌아서면서 프랑스 가 진도를 못나가, 9년전쟁 도 잉글랜드 윌리엄의 중재로라야 저게 끝나는겨. 스페인후계 전쟁, 부르봉과 오스트리아 의 전쟁이여 잉글랜드 는 지중해 어쩌고 왕위계승 부정 저쩌고 해도 상관없어 저건. 오스트리아 는 30년전쟁 직후 프랑스 와의 대립부터는, 잉글랜드 가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안돼 ㅋㅋㅋ. 스페인 후계 전쟁도 잉글랜드 가 해주는겨 오스트리아대신. 저걸 마무리하는건 퀸 앤 이야 잉글랜드의. 오스트리아 는 영국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겨 이게. 영국이, 이제 그만~ 스페인후계 전쟁 그만~. ㅋㅋㅋ. 그만 해야해.
이게 언젠가부터 말이야, 이미, 잉글랜드 의 세상 이 된겨 세상이. 싀안하게도. 1588 스페인 아르마다 를 이긴건 이건 정말 엄청난거야 세계사 에서. 이 중심은 엘리자벳 에 드레이크 에 호킨스 여. 가장 역사적으로 평가 절하된.
스페인후계 1701-14 때는, 프랑스 가 대놓고 잉글랜드 들어올테면 들어와라 였거든. 폴란드 후계 1733-38 땐 영국 들어올까봐 윗쪽 근처도 안가. 오스트리아 후계 1740-48 도, 프랑스 영국은 전혀 상관이 없어. 그러나 결국 프랑스 영국 전쟁이 되어버려. 이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의 대국은 끝난겨 이게. 30년전쟁 지나고 16세기 후반부터 는 프랑스 대 영국 싸움이야 이미. 이 구도 도 영국이 갖고 가는겨 저게. 태양왕 루이가 평생 잘났다고 지랄해보이, 결론은 알자스 하나 갖고 온게 다여 쟨.
루이14세 가 갖고 온 땅이, 군데 군데 지만, 9년 전쟁으로 알자스 하나 제대로 갖고 온거고, 아래 프랑슈 콩테 를 네덜란드 1672 들어가면서 막히고 갈데 없어 저길 괜히 가서 저거라도 갖고온겨 합스부르크 한테서. 아르트와 는 30년전쟁이어 스페인전쟁으로 확인도장 찍은거고, lille 릴 지역 벨기에 변경은 데볼루션 상속전쟁으로 갖고온거고. 벨기에 변경이 이때 잡힌거지. 저건 스페인에서 못받은 다우리 값이야 결과적으로. 쏟아부은 국력 에 비하면, 없어 갖고 온게.
엄청난 자원 대비, 혼자서 모든 네이션들을 상대로 싸운것 대비, 정말 볼품 이 없는거야 저건. 로렌 땅은 15세가 폴란드 후계 때에나 갖고 오는거고. 태양왕 루이가 말로는 머 땅을 넓히고 어쩌고, 디다보면 비용대비 오히려 엄청난 해악인겨. 저 땅 찔끔 갖고 오려고, 프랑스의 자산을 모두 써버린거야 얜. 저 알자스 마저도, 다시 뺏겨. 대체 무슨의미가 있는겨 쟤 의 지랄이.
스페인 은 너무나 허무한거야. 신대륙 의 금은 을 모두 플랑드르 군대에 쏟아부으면서, 더하여 초기 오스만 애들에게 육지와 바다에서 맞서주면서, 저 금은 을 다 써버린겨. 유럽전역에 골고루. 화폐가치 의 전환 이야. 유럽 문명이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된겨 오히려. 반면 스페인 자체 는, 금은 유출을 막는답시고 통제를 하고, 오히려 경제 장벽을 세우고, 세금 을 거래단위 별로 감시하며 걷어. 스페인 경제 는 망한겨 이게. 근본 뿌리부터. 경제 라는건, 자유에 민감해.
스미스 의 국부론 에 저당시 스페인 경제 이야길 하는겨. 저런 세금 시스템 에 더하여, 신대륙 의 금은 채굴에 대한 세금, 초창기엔 거의 반반 이야 나눠먹는게. 그런데,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비율을 줄여줘, 업자들이 더 갖아가라고, 이미 개발할 광산이 없거니와, 있어도 성공률이 희박한겨. 세금 거의 안받을 테니 금은 캐러 가라, 없는겨 이게. 광산 개발을 통한 부 의 증식 은 전혀 의미가 없어진겨. 스페인의 초기 전략 자체가 잘못된거고 실패한거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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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의 시대가 끝나는게 그래서, 끝의 시작이 우습게도 1588 스페인 아르마다 야. 잉글랜드 의 본격 시작이 1588 이야. 네덜란드 는 잉글랜드 가 만들어준거야. 뒤이어 프랑스 가 만들어준겨 네덜란드 80년전쟁 후반전인 30년 전쟁이란걸로. 프랑스 는 전혀 상관이 없었어 30년전쟁에. 저러다간 합스부르크 커진다는 불안감에 간겨. 얘들은 로타링기아 가운데 땅이고, 이탈리아전쟁 의 연속 인겨 30년전쟁 조차. 그러면서 성루이 가 성인이 되고 프랑스 의 시대야. 그러나, 잉글랜드 가 이미 왕성한겨 바닥에선. 루이 죽고는, 루이 15세 는 잉글랜드 눈치 보면서 폴란드 후계 전쟁을 한겨.
잉글랜드의 시대여 이제.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 뒤이어 7년 전쟁. 유럽대륙에선 영국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쟁이야 저게. 오스트리아 후계 와 영국 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놈의 오스트리아 는 스페인후계 전쟁부터 영국 없으면 안돼. 스페인 합스부르크 조차 데볼루션 상속전쟁때 잉글랜드 가 돌봐줘야 해. 합스부르크 에겐 튜더 가 웬수여. 그런데 이놈의 합스부르크 가 언젠가부터, 잉글랜드 가 절실한겨 이게.
영국입장에선 아쉬울게 없어 18세기 들어오면서. 그런데, 하노버 의 조지들이 영국의 킹이 되면서, 하노버 를 신경 써야해. 하노버 와 영국은 유니온 이 된겨 이게.
하노버, 가 킹 조지1세 로 영국이 될때, 아래 괴팅엔 에서, 위 라우엔부르크 까지가 하노버 땅이야. 하노버 는 선제후 여. 제법 권력이 막강해. 허섭한 애가 영국 킹이 된게 아녀 이게. 하노버 의 시작은 겔피 핏줄이고, 겔피 의 대륙은 사자공 하인리히고, 브라운슈바이크(brunswick) 에 뤼네부르크 도 하인리히 가 만든 도시고, 이 하인리히 부인이 사자심왕 리차드 의 누나 여. 겔피 의 유일한 황제 오토4세 가 헨리2세 핏줄이여. 저 하노버 가 잉글랜드 애들에겐 매우 어려운 인간들이고, 강력한 대륙의 군주 여 또한. 킹제임스 의 외손녀 의 자식 하노버 의 조지 라는게. 걍 강화도령 양치기 모셔오는게 아녀 이게.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17 February 1582, Celle – 12 April 1641, Hildesheim), ruled as Prince of Calenberg from 1635.
하노버 의 시작 이, 칼렌베르크 의 프린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할때, 대쉬 앞에 께 본적 원적 이야. 뒤는 방계 고, 자식들한테 걍 다 붙는 호칭 이야. 실재 자리는 칼렌베르크 프린스 야. 형제가 많은데 이중 막내급이고,
- Christian Louis, Duke of Brunswick-Lüneburg (1622–1665), Prince of Calenberg from 1641-1648, and Prince of Lüneburg from 1648-1665.
- George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1624–1705), Prince of Calenberg from 1648-1665, and Prince of Lüneburg from 1665-1705. He was the father of Sophia Dorothea of Celle, wife of the future King George I of Great Britain.
- John Frederick, Duke of Brunswick-Lüneburg (1625–1679), Prince of Calenberg from 1665-1679.
- Sophie Amalie of Brunswick-Lüneburg (1628–1685), who married King Frederick III of Denmark.
-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1629–1698), Prince of Calenberg from 1679-1698, and father of King George I of Great Britain.
장성한 자식 이 다섯 인데. 넷째는 여자고, 프레데릭 3세 덴마크 킹에 시집간거고.
하노버 의 선제후 가 되는게, 제일 막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아빠가 칼렌베르크 프린스 고, 그래서 이 자리를 장남이 받는건데, 이 자리가 아들넷 중 막내 까지 온겨. 둘째 형이 조지 윌리엄 인데, 이형이 저 위 라우엔부르크 를 받아 끊겨서. 그리고 칼렌베르크 를 셋째에게 줬는데 죽어서 막내 한테 간겨. 이 막내의 자식이 영국 킹이 되는건데.
이 막내 가, 1679년, 나이 50에 칼렌베르크 를 받는겨. 셋째형이 죽어서. 부인이 소피아 인겨, 부모가 30년전쟁 시작 겨울왕국 부부인 팔라틴 선제후고 제임스딸인. 원래 별볼일 없는데, 넷째까지 온겨 칼렌베르크 자리가. 그것도 50 살에.
이 막내 가, 위에 셋이 형들이 있어서, 원래 거지여. 받을게 없걸랑. 그런데 말년에 땅부자에 선제후 까지 된건데. 원래 둘째형 조지 윌리엄 한테 갈게 다 이 인간 한테 온거야. 조지 윌리엄 이 사랑에 빠진건데. 너무 빠져서 앞뒤 분간을 못한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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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30 September 1658, he married Sophia of the Palatinate in Heidelberg.[1] She was the daughter of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and Elizabeth Stuart of England, and granddaughter of King James I of England.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가, 팔라틴 의 소피아 와 1658년 에 결혼해. 29세 28세. 결혼이 늦은겨 특히나 소피아가. 원래 소피아 는 저 둘째인 조지윌리엄 과 결혼하기로 했어.
제일큰형 인 크리스찬-루이스 가, 재수좋게도 삼촌이 갖고 있던 뤼네부르크 를 받아 후계가 끊겨서. 그런데 자식이 없어. 뤼네부르크 를 둘째 조지 윌리엄.이 받게 되는겨. 조지윌리엄 이 소피아 와의 결혼을 미뤄, 소피아 가 싫은겨 이사람은. 소피아 가 미루고 미루다 막내동생 에른스트 와 결혼할테니, 당신이 뤼네부르크 를 받으면 막내에게 주세요. 이게 합의가 된겨. 거지 에른스트 가 그래서 소피아 와 결혼을 해.
그러다 큰형이 죽어서, 조지윌리엄이 뤼네부르크 를 받아. 대신 칼렌베르크 를 셋째한테 넘기는겨. 좋은거 받고 나쁜거 넘기는겨 이게 보믄. 그러다가, 저 위 라우엔부르크 공작이 죽어. 아들이 없어. 아스카니아 곰 알베르트 꺼여. 주위에서 대드는겨 전쟁. 이때 덴마크 퀸으로 간 여동생 힘으로 저게 조지윌리엄 것이 돼. 얘가, 라우엔부르크 를 차지하는겨. 이 라우엔부르크 도 다음 조지1세 영국킹에게 가는겨.
셋째형이 죽어서야, 막내 에른스트 는 칼렌베르크 를 받아. 뤼네부르크 도 양도하기로 한거고.
In 1679, Ernest Augustus inherited the Principality of Calenberg from the third brother John Frederick. In 1680 the family moved back to Hanover.
그래서, 막내 에른스트 는, 나이 50에, 셋째형이 죽어서, 칼렌베르크 를 물려받고, 하노버 로 옮기는겨.
In 1683, against the protestations of his five younger sons, Ernest Augustus instituted primogeniture, so that his territory would not be further subdivided after his death, and also as a pre-condition for obtaining the coveted electorship. He participated in the Great Turkish War on the side of Leopold I, Holy Roman Emperor. In 1692, he was appointed Prince-elector by the Emperor, thus raising the House of Hanover to electoral dignity, the elevation becoming effective in 1708 when confirmed by the Imperial Diet.
하노버 의 주인은 그래서, 막내 에른스트 가 되는거야. 둘째형은 라우엔부르크 로 떨어져 나간겨. 에른스트 에게 다섯자식들이 있었는데, 무조건 프라이모제니쳐. 장자 상속권. 이건 말야. 쪼개서 나눠갖지 말라여. 쪼개서 나누면 힘이 없어지는겨. 장자 가 권리를 다 갖고, 단지 나머지는 대리인 행세하는겨 이게. 그래서 하노버 가 이후 분해되지 않도록 했다. 자기가 저리 쪼개서 혼자 결국 다 받았는데, 자기 자식대는 저런짓 못하게 한겨.
이사람이, 자기힘으로, 선제후 가 된겨. 하노버 받은 상태에서, 대투르크 전쟁 1683 시작되고, 레오폴트 황제 편에서 전쟁에 열심이었고, 레오폴트 가 이게 고마워서, 하노버 를 우리 합스부르크 편으로 만들어야지 하면서, 선제후 로 올려주기로 한거고, 이게 1708년에 확정 돼. 아들 요제프1세 에 의해.
선제후 라는게, 교회 세장 세속 네장 이었거든. 교회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 세속이 보헤미아 브란덴부르크 라인팔라틴 작센. 30년전쟁 때, 라인팔라틴 뺏고는 바바리아 에게 갔다가 팔라틴도 복귀된거거든.
황제는 여기서 정하는겨. 레오폴트 가 자식 둘이 있지만, 쾰른 바바리아 가 비텔스바흐 , 브란덴 팔라틴 작센 은 프로테스탄트여. 작센 저건 폴란드 킹한다고 카톨릭전향했다지만, 먼가 찜찜한겨 이게. 후대를 위해서, 하노버 를 합스부르크 편으로 만들고 죽을려는거야. 무엇보다 비텔스바흐 가 문제고 결국 이게 뒤로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으로 터진거야.
선제후권이 교회 세장, 세속 이 여섯장 이 돼. 라인팔라틴 이 18세기 후반에 끊겨서 이게 바바리아 로 가. 세속이 다섯장이 돼.
세속 다섯이, 보헤미아 브란덴부르크 작센 바바리아 하노버, 브란덴부르크 는 레오폴트 가 킹덤 으로 승격하는겨 스페인후계전쟁 때 자기편 만들려고. 작센 바바리아 하노버 는 나폴레옹 다음에 모두 킹덤 이 되는거고.
- The Elector of Regensburg (added in 1801), Karl Theodor Anton Maria von Dalberg, was Catholic.
- The Elector of Salzburg (1803–1805) and Würzburg (1805–1806) Ferdinand III and I was Catholic.
- The Elector of Württemberg (added in 1803), Frederick I, was Lutheran.
- The Elector of Baden (added in 1803), Charles Frederick, was Lutheran.
- The Elector of Hesse (added in 1803), William I, was Reformed.
신성로마 가 프랑스 1789 터지고 왕정 흔들리면서, 오히려 선제후를 늘리는겨. 다섯장 을 늘려 종교별로. 나폴레옹 지나가고, 뷔르템베르크 가 킹덤 이 되고, 헷세 가 캇셀 이거든, 이게 베스트팔렌 킹덤 이 되고 수도 가 캇셀 이 돼. 바덴 은 그랜드 더치 가 되고. 그래서 아인슈타인 은 태어날때, 뷔르템베르크 킹덤 이야 내셔널리티 가.
저 킹덤들이 모두, 1차대전 끝나고 사라지는겨. 피플스테이트 에 리퍼블릭 으로.
베스트팔렌 킹덤은 짧게 갔다가 흩어지고, 헷세 가 유일하게 의미없는 일렉트레이트.를 취해 ㅋㅋ. 그랜드더치 보다는 있어보이거든. 그러다 프러시아로 들어가는거고.
Bremen-Verden, formally the Duchies of Bremen and Verden (German pronunciation: [ˈfɛɐ̯dən]; German: Herzogtümer Bremen und Verden),
브레멘-페르덴, 이 하노버 께 되는겨 조지1세 때에. 원래 이건, 30년 전쟁 때 스위든 이 갖고 간거걸랑. 비숍릭 이지만 덴마크 핏줄이었고, 함부르크 도 저건 덴마크 꺼여 원래. 베저 Weser 강이 괴팅엔 지나 하노버 땅 의 본류 고 이게 브레멘 까지 가는 강줄기거든. 브레멘-페르덴 이 스위든 에서 나오려고 두번 전쟁도 했던거고, 그러다 이게, 싸버린 이 흐릿해지더니 덴마크 가 취하다가, 덴마크 가 대북방전쟁 1700-21 할때, 시작하자 마자 수도 포위되서 깨갱하곤, 칼12세가 폴타바 전투 1709에서 대패하곤 덴마크 가 다시 참전하면서, 영국 에게 지원 을 요청해. 그러면서, 덴마크 편 들어주는대신, 브레멘-페르덴 을 주기로 한겨 하노버 에게. 이때 브레멘-페르덴 은 덴마크 것이 아냐 원래 법적으로. 그런데 얘들이 저 어수선한 상황에서 자기들꺼라며 하노버 에게 준겨. 이건 스위든이 법적으로 물고 늘어지는거고 이후에도.
그래서, 조지1세 가 영국 킹이 되는데. 하노버 가 열라게 큰겨 이게. 작센-라우엔부르크 에 브레멘-페르덴 이 조지1세 때 들어온겨.
George I (George Louis; German: Georg Ludwig; 28 May 1660 – 11 June 1727)[a] was King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from 1 August 1714 and ruler of the Duchy and Electorate of Brunswick-Lüneburg (Hanover) within the Holy Roman Empire from 23 January 1698 until his death in 1727. He was the first British monarch of the House of Hanover.
얘가, 1714년. 54세 에 영국 킹이 돼. 선제후 는 1698년, 38세 부터 해왔었고.
지도를 보면, 하노버 좌표 에서, 아래 브라운슈바이크 Brunswick 에 그아래 쾨딩엔. 까지 가 아래로는 하노버고. 위쪽 왼쪽으로 브레멘 에 오른쪽 뤼네부르크 엘베강너머 라우엔부르크. 이 하노버 지역의 바로 오른쪽이 프러시아 킹덤 이고, 아리개 작센 이야.
영국입장에선, 하노버 가 저기서 완전히 노출이 된겨 주변국들에. 특히나 프러시아 가 제일 신경 쓰이는겨 이게.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 때 오스트리아 의 최대 적은 프러시아 여. 하노버 는 표 를 행사 해야해 선제후 라서. 영국은 저런 판에 낄 필요가 없는겨 저게. 그런데, 하노버 가 한쪽편들면 거기 편들어야 해 무조건. 그래서 오스트리아 편들다가, 중재 에 나선겨. 프러시아 의 실레시아 갖고 간걸 인정하게 해주고. 프러시아 가 하노버 옆에 있걸랑. 오스트리아 가 열받아서, 프랑스 와 손잡고 하노버영국의 적이 되고 프러시아는 하노버 를 지켜줄테니 영국아 돈대라 해대는게 7년전쟁의 유럽대륙판이야. 영국이 대륙에 낄 수밖에 없는게 자기 킹을 하노버 에서 데려왔기 때문이야. 영국은 애초에 저런 대륙 전쟁에 관심이 없어.
Éléonore Marie Desmier d'Olbreuse (3[1] or 7 January[2] 1639 – 5 February 1722), was a French noblewoman, who became firstly the mistress and later wife of George William of Brunswick, Duke of Lauenburg and Prince of Celle.
다시 돌아가서, 하노버 의 네 형제 중에, 막내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가 칼렌베르크 를 받았지만, 둘째형 은 살아있어. 둘째 조지윌리엄 이 가장 오래 살아남아. 1705년 에 죽어. 소피아 와 파혼하고 뤼넨부르크 를 주고, 막내는 칼렌베르크 에 뤼넨부르크 까지 받은겨 마누라 소피아 덕택에. 그리고는 마침내 여자를 만나. 칠팔년후냐
이 조지윌리엄 이란 사람이 웃긴데. 저 에른스트 의 형.
George William German: Georg Wilhelm (Herzberg am Harz, 26 January 1624 – 28 August 1705, Wienhausen) was the first Welf Duke of Lauenburg after its occupation in 1689.
엘레노어 가 Marie de La Tour d'Auvergne 드라투르 도베르뉴 의 마리. 라는 여자의 레이디 코트에 있었는데, 이 여자의 아들이, 헷세-캇셀 의 딸에게 장가를 가. 그래서 캇셀에 같이 갔다가, 여기서 조지윌리엄 을 만나 1664년 이야. 이여자가 너무나 이뻤나봐. 조지윌리엄 이 한눈에 보고 반해.
소피아 는 이미 에른스트 와 결혼을 하고. 1664년 이면 조지 40세, 엘레노어 25세. 15년 차이여. 조지윌리엄이 나이 40에 사랑에 빠진겨. 둘이 서로 확 빠져. 그런데, 엘레노어 는 아무것도 없는 집안 여자야. 위그노 여자에 하급귀족이고 무일푼이여.
Morganatic marriage, sometimes called a left-handed marriage,[1] is a marriage between people of unequal social rank, which in the context of royalty or other inherited title prevents the principal's position or privileges being passed to the spouse, or any children born of the marriage.
모거내틱 매리지. 게르만단어인데. 계급차이가 큰 결혼 이고, 배우자 와 자식 에게 법적 지위가 없는겨.
George William managed to kept the Principality of Celle as his personal domain during his lifetime; in addition a ducal order dated 15 November 1665 guaranteed a dower for Éléonore in case George William died.[6] One year later, on 15 September 1666, Éléonore gave birth a daughter, Sophia Dorothea.
이사람이, 엘레노어 와 결혼하려고, 자기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 칼렌베르크 를 그래서 막내에게 이때 준거야. 오직 쎌레 만 갖고있기로 해. 여자는 애인 만 원했는데, 남자가 결혼을 원한겨. 저게 결혼 자체가 안되는겨 주변에서 보기에. 비밀결혼을 하고.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둘이 살아. 그리고 1666년에, 딸 소피아 도로테아 를 낳아.
Sophia Dorothea of Brunswick-Lüneburg-Celle (15 September 1666 – 13 November 1726), was the repudiated wife of future King George I of Great Britain, and mother of George II.
George I (George Louis; German: Georg Ludwig; 28 May 1660 – 11 June 1727)[a] was King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from 1 August 1714 and ruler of the Duchy and Electorate of Brunswick-Lüneburg (Hanover) within the Holy Roman Empire from 23 January 1698 until his death in 1727. He was the first British monarch of the House of Hanover.
조지윌리엄 이, 자기딸 을, 막내 에른스트 의 자식, 조지 루이스, 게오르크 루트비히. 영국킹 이 되는 조지1세 와 결혼시키려는데, 막내가 안받아, 형 결혼은 모거내틱 이고, 불법 이잖냐. 쟤도 불법이다. 조지윌리엄이 법적서류를 다 보여주고 교회와 세속에서 인정된 합법 결혼이고, 정식 딸이라는걸 확인하고, 둘이 결혼 시키는겨 ㅋㅋㅋ. 라우엔부르크 작센땅도 있걸랑. 1682년. 킹조지 22세, 소피아 도로테아 16세.
이 킹조지 가 성격이 고집 하나여. 아주 깐깐해. 마누라 가 하급귀족 딸인겨 이 인간 눈엔. 여자 대접을 안해주는겨 이 인간이.
Philip Christoph von Königsmarck (4 March 1665[1] – 2 July 1694[2][3]), also spelled Philipp, was a Swedish count[4] and soldier.[2] He was allegedly the lover of Sophia Dorothea, Princess of Celle, the wife of Duke George Louis of Brunswick and Lüneburg, the heir presumptive of the Principality of Calenberg, later to become Elector of Hanover (as George I Louis, 1708) and King of Great Britain (as George I, 1714)
필립 크리스토프 폰 쾨니히스마르크. 스위디쉬 백작 이고 군인. 쎌레 의 프린세스 소피아 도로테아 의 러버.
킹조지 는 1714년 에 하는거고, 선제후는 1698년 에 되고 결혼은 1682년. 저때는 프린스여 38세까지. 이 하노버 아빠 선제후 코트에, 폰 쾨니히스마르크 가 군인으로 있었는데, 1694년 에 사라졌어. 29세. 소피아 보다 한살 많아. 조지1세 당시 하노버 프린스 가 죽인걸로 봐.
쾨니히스마르크 의 누나 가 폴란드 킹 아우구스투스2세 의 애인이고, 여기서 나은 모리스 가 프랑스 필드마샬 에 조르주 상드 가 나오는겨 쇼팽의 연상애인.
On the morning of 2 July 1694, after a meeting with Sophia at the Leineschloss castle, Königsmark was seized and disappeared.[8]
1694년 7월 2일 아침에, 소피아 를 만나고서, 사라졌어. 하노버 에 라이너 Leine 강이 흐르고 이게 왼쪽 베저 강으로 가는거고, 여기 성 라이너스슐로스. 나중에 누가 자백했다는데 저 성에서 죽였다고, 나중 역시나 저성에서 뼈를 분석했는데, 동물뼈야. 시체는 어딨는지 지금도 몰라.
Most of the letters alleged to have passed between Königsmarck and Sophia Dorothea were published by William Henry Wilkins in The love of an uncrowned queen (2 parts, 1900).
쾨니히스마르크 와 소피아 와의 편지들이 남아있는게 책으로 출판 되었대. 저런거 재밌을틴데.
Thomas Thynne (1647/8–12 February 1682) was an English landowner of the family that is now headed by the Marquess of Bath and politician who sat in the House of Commons from 1670 to 1682. He went by the nickname "Tom of Ten Thousand" due to his great wealth. He was a friend of the Duke of Monmouth, a relationship referred to in John Dryden's satirical work Absalom and Achitophel where Thynne is described as "Issachar, his wealthy western friend".
토마스 띤. 잉글랜드 의 지주 인데, 배뜨 의 후작. 배뜨 라는게 소머싯 에 있는 고대로마가 만든 온천도시여. 하원도 했다. 일만의 톰. 저때는 백만장자 가 아니라 일만 장자 인듯. 굉장히 부자 였대. 먼머뜨 반란 으로 죽은, 찰스2세의 배스타드 장남의 친구 였고. 하튼 음청난 부자 였나 본데, 이사람이, 저 죽을때닌 34세 정도에, 14세 의 엘리자벳 과 결혼을 해.
On 15 November 1681 Thynne married the wealthy Lady Elizabeth Percy, only child of Joceline Percy, 11th Earl of Northumberland, who was then aged 14. ...Thynne was murdered on 12 February 1682 after the Swedish Count Karl Johann von Königsmark began to pursue his wife.
11월 15일 결혼해서 다음해 2월 12일에 암살당해. 쾨니히스마르크 의 형 이야. 저 사라진 스위든 군인. 이 사람이 1659년 생이고, 22세 인데, 14세였던 갓결혼여자 엘리자벳에 구애하던 놈이고, 신랑을 죽인겨 사주를 해서. 사람셋 을 사서 죽이고, 다들 교수형당했는데, 이인간은 돈주고 무죄로 풀려나서, 모레아 전쟁, 오스만 베네치아 전쟁에서 죽어. 소피아 당시 프린세스 를 사랑하다 사라진 인간이 동생이여.
소피아 도로테아. 는 저 이후 감금 생활하는겨 죽을때까지. 페르덴 Verden 의 Ahlden House 알덴 하우스. 30년을 여기서 살고 죽어. 애인 은 조지 가 죽인거고, 이혼을 요구하고, 재혼도 못하게 하고, 여자의 아빠인 조지윌리엄 의 동의하에 걍 가택연금 으로 사는겨. 자식도 못보게 하고.
그리고 아빠죽고 . 38세에 선제후에 오른거고 1714에 영국킹 조지1세가 된거야
When George William was on his deathbed in 1705, he wanted to see his daughter one last time to reconcile with her, but his Prime Minister Count Bernstorff raised objections and claimed that a meeting would lead to diplomatic complications with Hanover; the ailing duke no longer had the strength to prevail against him.
After the death of her husband, Éléonore received Lüneburg Castle as her widow's seat. Sophia Dorothea unsuccessfully asked her former husband one last time that he should let her leave Ahlden to live with her mother in complete seclusion, but her request was denied.
Éléonore spent the last years of her life caring for her daughter and trying to obtain her release. She even turned to King Louis XIV of France, who had once driven her and her Huguenot family out of France. The French monarch was not averse to accepting her and her daughter, but Eléonore did not want to meet the condition of converting to Catholicism.[10]
Éléonore died on 5 February 1722, nearly blind, in Celle Castle, Celle. She mentioned 342 persons in her will. She was buried in the Fürstengruft at the Stadtkirche St. Marien (town church of St. Mary) in Celle.
소피아 도로테아 는 1726년, 60에 죽는데, 30년 혼자 감금당하다가, 아빠 조지윌리엄 은 1705년 에 죽어. 죽기전에 딸을 보고싶어해. 그러나 코트 수상이 하노버 와의 관계 문제될까봐 말려.
모거내틱 결혼한 하급귀족 엘레노어 는 1722년 에 죽어. 딸보다 4년 먼저. 83세. 뤼네부르크 성을 받고, 딸 소피아 는 전남편 조지 한테 엄마랑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거절당해. 이 조지 킹 완전 꼴통이야 얘 ㅋㅋㅋ. 고집 쎄기로 정평난 인간이야. 엘레노어 가 자기딸 석방을 위해 루이 14세에게도 탄원해. 얜 카톨릭이고, 위그노 인 엘레노어 싫어해 카톨릭으로 바꾸면 노력해볼께, 엘레노어가 싫다고 해. 쎌레 성에서 엘레노어 는 죽다. 342명을 유언에서 언급하다.
소피아 도로테아 의 아들이 킹 조지2세 고, 딸이 프러시아 퀸 이야. 여기서의 아들이 프러시아 킹 그레이트 붙는 프레데릭2세 올드 프리츠 영감 이고. 딸이 엄마 만나는것도 못만나게 해. 엄마 소피아 가 죽었어. 프러시아 퀸 이 상복 검은걸 입었어. 킹조지1세 가 딸년 검은 상복입었다고 분노를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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