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na (18 December 1626 – 19 April 1689)

 

Christina abdicated her throne on 6 June 1654, On 3 November 1655, Christina announced her conversion to Roman Catholicism, The official entry into Rome took place on 20 December, in a couch designed by Bernini[84] through Porta Flaminia

 

크리스티나 언니가. 1654년 6월 6일 날 퀸 자리 내놓고, 28세. 덴마크 가서 사촌 카를씹세 중매하고, 벨기에땅 가서 유대인 상인집에서 네달 있으면서 그랑콩데 한니발 오스트리아 대공작 등 유명인사들 만나고, 다음해 1655년 11월에 로마 카톨릭 개종한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에서 발표하고, 공작 살림 거덜내고 다음달 12월 20일.에 로마 에서 공식 환영식을 받어. 로마 개선문을 지나서 베르니니 가 디자인한 의자에 앉아서 마치 로마 여왕님 오신듯. 

 

드라마 에 셰익스피어 라면, 조각에는 이 베르니니.여.

 

1년 6개월 만에 로마로 오시는겨 우리 언니가. 1655년 12월 20일. 

 

Christina's fourth and last entry in Rome took place on 22 November 1668

 

우리 언니가. 로마에 정착하는게 네번째 방문하는 1668년 11월 이야. 42세. 이때부터 1689년 죽는 63세 까지 21년 을 로마에서 사시는겨. 저 이전 13년 동안은 들락날락 하시는겨 우리언니가. 바쁘셔 이 언니. 이언니를 맞이하는 알렉산더 7세 부터 다섯 교황이 갈려. 

 

Christina's visit to Rome was the triumph of Pope Alexander VII and the occasion for splendid Baroque festivities. For several months, she was the only preoccupation of the Pope and his court. The nobles vied for her attention and treated her to a never-ending round of fireworks, jousts, mock duels, acrobatics, and operas. On 31 January Vita Humana an opera by Marco Marazzoli was performed. At the Palazzo Barberini, where she was welcomed on 28 February by a few hundred privileged spectators, she watched an amazing carousel in the courtyard.[86][87]  

 

알렉산더7세.는 아주 적극적으로 환영하는겨. 오자마자 두세달은 교황 코트에서 독점해서 맞이해. 싄기가걸랑. 스위든 의 그것도 최고권력자가 최고권력을 새파란 나이.에 스스로 내던지고, 카톨릭으로 전향을 하고, 그것도 여자여. 걍 머 이건 이탈리아 전체 도 들썩이는 사건이고 유럽 대륙도 엄청난 사건이야 저건. 왜냐면, 저때 스위든 이란 나라가 30년 전쟁으로 갑자기 유럽 대륙에서 대스타로 등장했걸랑. 이전에 슬라브 오소독시 애들이랑 전쟁하면서 잉그리아 차지했고 폴란드애들하고도 싸우고 머 그랬대 하는건 걍 먼 얘기인데, 자기들 땅에서 직접 등장한겨 이게. 완전히 전설인거고 재밌는거고 감동인거야 이 알프스 아래 그것도 로마 에서는. 더하여 이탈리아 모든 도시들이 너무나 싄기하고 재밌어서 환영한거고. 

 

이탈리아 란 나라는 원래 축제의 나라야. 저 재수없는  루터 가 티나오기 전에는 그리스도 갖고 똑같이 로마식으로 축제하며 놀던 곳이걸랑. 그러다 루터가 저거 이단질이다 함시롱 종교전쟁 나면서 시무룩 해진겨 이탈리아가. 아 헌데 저 퀸 이 내려오면서 활기가 생긴겨 이게. 한번 그 분위기를 상상해봐. 저건 정말 생기를 불어넣는 사건이야 이 이탈리안 들에겐. 귀족들이 너무 신기해서 막막 와, 그녀를 위해서 끝도 없는 불꽃놀이를 해. 자우스팅, 결투 놀이, 아크로바틱 이라는 발끝춤들 발레의 전신이고. 오페라. 걍 머 맨날 맨날 축제여 이 여자때문에. 기분들이 너무나 좋은겨 저 시안한 이야기의 여자가 왔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여자야.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 가 복귀를 한겨. 이 카이사르 는 정말 그야말로 재밌는 이야기의 사람이었걸랑. 이탈리아 가 말이야, 저여자가 오면서, 1600년 만에  생기가 돈겨 저때. 그래서 너도 나도 막막 웃으며 논거야 저 여자를 무대에 앉히고. 그녀는 수백명의 관람객들과 2월 28일에 마당에서 놀라운 회전목마도 지켜봤다. 

 

Christina had settled down in the Palazzo Farnese, which belonged to the Duke of Parma. Every Wednesday she held the palace open to visitors from the higher classes who kept themselves busy with poetry and intellectual discussions. Christina opened an academy in the palace on 24 January 1656, called Academy of Arcadia, where the participants enjoyed music, theater, and literature. The poet Reyer Anslo was presented to her. Belonging to the Arcadia-circle was also Francesco Negri, a Franciscan from Ravenna who is regarded as the first tourist to visit North Cape, Norway.[note 10] Another Franciscan was the Swede Lars Skytte, who, under the name pater Laurentius, served as Christina's confessor for eight years.[note 11]  

 

크리스티나 는 팔라초 파르네제.에 머물렀어. 이건 파르마 공작 소유야. 매 수요일날 방문객을 받았다, 시와 지적인 토론으로 바빳다. 이게 살롱 문화고, 저게, 19세기 문학에도, 저택마다 특정 요일을 정해서 매주 접대를 하는겨 유럽 저택들은. 세계대전 전까지도 이런게 일상이었고. 

 

1656년 1월 24일. 오자마자 한달 만에, 아카디아 아카데미 를 열었어. 학회 를 하는겨 자기 저택에서. 이게 2백년을 가. 아카디아 아카데미 란게, 저 이름을 저여자 죽고 다른 가문들이 2백년을 서로서로 이어가는겨 이탈리아에서. 여기서 사람들은 음악 연극 문학을 즐겼다. 시인 라이어 안슬로, 네덜란드 사람이야, 로마 놀러와서 여기 낀겨. 프란체스코 네그리, 카톨릭 사제 겸 혼자 여행하는 작가여. 스카니아 해변까지 가 덴마크 킹도 만나고, 최초로 노르웨이 저짝 북끝 노르드캅 간 사람. 또다른 프란시스칸 라르스 스카이테. 도 8년을 여기 지내다. 

 

이여자가 저때 잇던, 파르네제 궁.이 파르마 공작 집인데. 파르네제 가문.이야. 교황 파울루스3세.가 유명한거고. 로마 약탈 1527년 클레멘스 다음 교황이야. 카운트 리포메이션 시작하면서 트리노 공회의 시작한 교황이고. 이 사람이 추기경일때 배스타드 로 낳은 자식 피에르 루이지.가 첫 파르마 공작.이야. 여기도 교황령 이었걸랑. 교황령의 영주 는 교황이 주는겨 이건. 저 루이지 아들에 시집가는게 카를5세 황제의 장가 가기전에 낳은 딸 마가렛.이 이리 가면서 이 아들이 알레산드로 파르마 공작.이야. 이 공작이, 네덜란드 80년 전쟁 시작할때 밀라노 거버너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를 뒤에 이어서 네덜란드를 책임지는거고. 

 

아카디아 아케데니. 아카디아. 라는 게, 모레아 반도에, 그 위가 아카이아.  오른쪽위가 아르골리스.야. 아래가 스파르타 가 있는 라코니아.이고.

 

이 아카디아. 라는 지역에 이름이. pastoral literature 패스토럴 리터러쳐. 전원 문학.의 상징이야. 유토피아 의 상징이 이 아카디아. 야. 그래서 프랑스가 저 북미 쪽 섬들 이름도 이 아카디아 를 이름 지은거고. 

 

From French académie, from Latin acadēmīa, from Ancient Greek Ἀκαδημία (Akadēmía), a grove of trees and gymnasium outside of Athens where Plato taught; from the name of the supposed former owner of that estate, the Attic hero Akademos. Doublet of academia and Akademeia; compare academe.  

 

아카데미아.라는 플라톤으로 유명한 거지만, 여긴, 숲으로 된 운동장 있는 학교여. 아카데미아 라는 이름은 플라톤의 후원자 이름 을 따서 지은 것이고. 저건 플라톤 김나지움.의 간판 학교이름이야. 김나지움 이란건 저당시 스포츠도 같이 하는 학교 이고. 이게 영미로 가서는 운동 만 취한 체육관 이 된거고, 독일땅은 그대로 고등교육기관 은 김나지움 으로 그대로 쓰는겨 지금도. 

 

저건, 크리스티나 가 지은 이름이야. 이여자는, 우리 문명의 정답은 고대 그리스 이고 고대 로마 라는거야. 

 

Twenty-nine-year-old Christina gave occasion to much gossip when socializing freely with men her own age. One of them was Cardinal Decio Azzolino, who had been a secretary to the ambassador in Spain, and responsible for the Vatican's correspondence with European courts.[88] He was also the leader of the Squadrone Volante, the free thinking "Flying Squad" movement within the Catholic Church. Christina and Azzolino were so close that the pope asked him to shorten his visits to her palace; but they remained lifelong friends. In a letter on 26 January 1676[89] to Azzolino Christina writes (in French) that she would never offend God or give Azzolino reason to take offense, but this "does not prevent me from loving you until death, and since piety relieves you from being my lover, then I relieve you from being my servant, for I shall live and die as your slave." As he had promised to remain celibate, his replies were more reserved.[note 12] In the meantime Christina learned that the Swedes had confiscated all her revenue as the princess had become a Catholic.  

 

29세가 된 크리스티나 는 자기 나이대의 남자들과 자유롭게 있으면서 많은 가십을 던졌다. 그중 한명이 추기경 데치오 아졸리노.였다. 스페인 마크케 레지오네 페르모 출생인데 스페인 주재 대사의 비서였었고, 바티칸과 유럽 코트들의 중재일을 했다. 그는 스콰드로네 볼란테, 당시 카톨릭 교회 내의 추기경들 모임인 자유롭게 생각하는 이들.의 소속이었다. 크리스티나와 아졸리노 는 매우 친했고, 교황이 그에게 야 너 소문나니까 좀 작작해 라고 하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 친구였다. 1676년 크리스티나 50세 때 인졸리노 에게 프랜치로 쓴 편지에서, 그녀는 결코 신을 무시하지 않을거고 아졸리노에게도 불경할 꺼리도 주지 않겠다며, 그래도 이런게 내가 죽을때까지 당신을 러빙하는걸 막지 못할거야, 경건함이 당신을 구제해줄꺼야 나의 러버가 안되도록, 나는 당신을 구제해줄꺼야 나의 서번트가 안되도록, 왜냐면 나는 살고 죽을테니 당신의 노예로써. 그는 독신으로 남을것을 약속했고, 그의 답들은 더욱 깊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알게되다 스위든에서 그녀의 모든 수입을 몰수했다는 걸, 왜냐면 그녀가 카톨릭이 되었다고. 

 

스콰드론 볼란테.라는게, 추기경에 카톨릭 칼리지, 고위급들의 자유사상가 모임이야. 콘클라베 에 영향력도 행사하는. 저들이 이게 걍 고리타분 한 이들이 아녀. 저런걸 허용하는겨 저런 시대에도. 프로테스탄트 득실할때. 

 

저 둘은, 그야말로 아가페여 저게. 크리스티나는 섹슈얼 에 관심이 없어. 모르지 머. 

 

크리스티나.는 믿음이 없어보이지만, 알렉산더 교황의 말대로, 크리스찬인데 믿음은 없고 ㅋㅋㅋ. 제일 웃겨 이말이. 이런 믿음이 진짜 믿음이지. 

 

데카르트 와 스피노자 의 생각이랑 똑같애 크리스티나는. 배워서 그런게 아니라. 저 시대에 대부분 지식인들은 다 저런 믿음의 신앙이고, 저 아졸리노 조차 추기경이지만, 신을 저렇게 같이 믿는겨 고차원적으로. 불신지옥 예수천국 그따위껀 오컬트여. 이 나라 기독종교도 저게 오컬트고, 불교도 오컬트여. 여긴 데카르트 스피노자 를 몰라 크리스티나를 모르고. 

 

저, 데치오 아졸리노.가 크리스티나 죽고 나서, 바로 몇달후에 죽어. 크리스티나 가 자기 상속 문제, 부채 빚덩어리만 있는거고, 이걸 아졸리노에게 맡기고 죽어. 당시 아졸리노 도 아파서 못움직일때인데 크리스티나 장례식을 가고서 죽은겨 이사람도. 

 

아 짠해.

 

King Philip IV of Spain ruled the Duchy of Milan and the Kingdom of Naples. The French politician Mazarin, an Italian himself, had attempted to liberate Naples from Spanish rule, against which the locals had fought before the Neapolitan Republic (1647) was created. A second expedition in 1654 had failed and the Duke of Guise gave up. Christina's goal was to become a mediator between France and Spain in their contest to control Naples. Her plan detailed that she would lead French troops to take Naples and rule until bequeathing the crown to France after her death. Christina sent home all her Spanish servants, including her confidant Pimentel and her confessor Guêmes.[91] On 20 July 1656 Christina set sail from Civitavecchia for Marseille where she arrived nine days later. In early August she traveled to Paris, accompanied by the Duke of Guise. Mazarin gave her no official sponsorship, but gave instructions that she be celebrated and entertained in every town on her way north.  

 

스페인 펠리페4세.가 당시 밀라노공작 에 나폴리 킹덤 겸했는데, 나폴리가 30년 전쟁 말에 1647-48년.에 기즈공작 이 주도해서 리퍼블릭을 세웠었어. 이사람은 앙주의 르네 후손이야. 앙주 르네 는 나폴리 앙주 핏줄이고, 이때 나폴리는 조안나2세 죽고, 아라곤의 알폰소가 먹고 이후 스페인께 된거고. 그리곤 계속 나폴리를 노리는겨 리퍼블릭 세웠다가 쫓겨나고도. 이걸 마자랭.이 뒤에서 지원해주는거고. 이 와중에 크리스티나 가 로마 에 있던겨. 

 

크리스티나 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중재자가 되다 나폴리 문제에. 그녀는 프랑스 편에서 군대를 받아서 나폴리를 쳐들어가 지배를 하고 죽으면 프랑스에 나폴리를 넘겨주려 했다. 자기 코트의 스페니쉬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1656년 7월 마르세이유로 출항해서 8월에 파리로 가기 시작하고, 기즈 공작 동행하고. 마자랭이 그녀에게 공식적 스폰을 주지 않다, 그러나 지시했다 그녀가 북쪽 가는길에 모든 마을에서 그녀를 환대하라고. 

 

On 8 September she arrived in Paris and was shown around; ladies were shocked by her masculine appearance and demeanor and the unguarded freedom of her conversation. When visiting the ballet with la Grande Mademoiselle, she, as the latter recalls, "surprised me very much – applauding the parts which pleased her, taking God to witness, throwing herself back in her chair, crossing her legs, resting them on the arms of her chair, and assuming other postures, such as I had never seen taken but by Travelin and Jodelet, two famous buffoons... She was in all respects a most extraordinary creature".  

 

로마 정착 시작한 당해.에 간겨 프랑스로. 9월에 파리에 도착해서 돌아다닌겨. 여자들은 충격을 받다 그녀의 남자외모와 행동과 혼자 나대는 자유로운 대화방식에. 오메 우리 진짜 언니 마드모아젤 과도 만났넹. 오메 우리 마드모아젤 언니가 한살 어려. 같이 발레 구경하다,

 

마드모아젤은 나중에 회상하길 " 크리스티나는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그녀를 즐겁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박수치면서, 신을 증인으로 부르고, 그녀자신을 의자 깊숙히 내던지고, 다리는 꼬고 쉬면서, 다른 포즈들도 취하는데, 그런건 내가 유명한 두 광대 외에는 듣보도 못한 거였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가장 특이한 생물이었다. 

 

저건 우리언니 마드모아젤 의 회상기에 나오는겨. 아 우리 마드모아젤 활달언니가 저리 놀랠 정도였어.

 

When she discovered that Monaldeschi had betrayed her plans to take the Kingdom of Naples to the Pope, she had him assassinated 10 November 1657, in her presence at Fontainebleau, where the queen was staying in her passage through France. 

 

모날데스키. 를 1657년 11월 10일에 죽여. 1년 지나서도 프랑스에 잇던겨 루이 14세 코트에서. 이 모날데스키 가문은, 움브리아의 Orvieto 오르비에토 지역의 귀족가문인데. 이 오브리에토 는 로마에서 피렌체 가는 길목이고 교황령에 요지여. 헌데 당시 모날데스키 는 권력실세에서 밀려서 저때 크리스티나를 동행한건데, 이사람이 크리스티나 코트에서 스파이행위를 해. 크리스티나는 프랑스 편에서 나폴리 먹으려는거고 자기가 직접. 이사람은 스페인편인거고. 퐁텐블루 성에서, 이사람을 죽여 반역죄로. 이 여자 의 수행단은 이 여자만의 독자적 나라여 이게. 이 여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코트여 자기만의 이삼백명 수행단이잖오. 

 

He insisted that betrayal should be punished with death. She was convinced that he had pronounced his own death sentence. After an hour or so Le Bel was to receive his confession. Both Le Bel and Monaldeschi entreated for mercy, but he was stabbed by her domestics – notably Ludovico Santinelli – in his stomach and in his neck. Wearing his coat of mail, which protected him, he was chased around in an adjacent room before they finally succeeded in dealing him a fatal wound in his throat. "In the end, he died, confessing his infamy and admitting [Santinelli's] innocence, protesting that he had invented the whole fantastic story in order to ruin [him]."[96]  

 

크리스티나.가 운을 띄워. 나에게 반역한 인간은 어찌해야 하냐. 모날데스키 가 말해.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죠. 이여잔 확신하다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말했음을. 레 벨.을 통해서 자백을 받다. 레 벨.과 모날데스키 는 선처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코트인들에게 칼찔렸다, 산티넬리 가 주도했다. 배와 목을 찔렀다. 철갑옷을 입어서 안죽고 도망갔으나 뒤쫓아가서 목찔러 죽이다. 산티넬리 왈, 결국 그는 죽었다 자기죄를 인정하고. 산티넬리 가 아마 저때 코트의 앙숙인듯하고, 산티넬리 가 자기 죄를 덮으려는 건지 아니면 누명씌워서 열받았는지 알길 없고. 오직 산티넬리의 말뿐이고. 

 

The killing of Monaldeschi in a French palace was legal, since Christina had judicial rights over the members of her court, as her vindicator Gottfried Leibniz claimed.[98] As her contemporaries saw it, Christina as queen had to emphasize right and wrong, and her sense of duty was strong. She continued to regard herself as queen regnant all her life. 

 

모날데스키 죽음.이 프랑스 궁에서 벌어진건데, 이건 합법이다, 크리스티나 는 그녀 코트의 사람들에 대해 사법적 권리가 있다, 라고 라이프니츠 는 말했다. 그녀의 당대인들이 말하길, 크리스티나는 퀸으로서 옳고 그름을 행사해야 했고 그녀의 의무감은 강했다. 그녀는 자기를 일평생 권력있는 퀸 으로 여겼다. 

 

저 모날데스키 죽음 으로, 이탈리아에서 인기가 확 떨어진겨. 아이 샹 우리 이탈리안 떨거지라지만, 그것도 남의 나라 궁전에서, 그것도 저 프랑스 저 저 아 저 놈의 프랑스 저, 아 저놈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는 이게 진짜 골때리는 사이야. 황제랑 싸우려고 프랑스에 기대면서도 프랑스애들한테 뺨맞고 죽는 교황에, 프랑스 애들이 넘어와서 이탈리안 전쟁 지긋지긋하게 하고. 참 그야말로 가장 애매하고 시안한 사이가 저놈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관계여 이게. 

 

크리스티나 인기가 확 주저앉아. 아 이 언니 육칠개월동안 그야말로 대스타였는데, 괜히 저기 가서리.

 

She would gladly have visited England, but she received no encouragement from Cromwell and stayed in Fontainebleau as nobody else offered her a place. Anne of Austria, the mother of Louis XIV, was impatient to be rid of her cruel guest; Christina had no choice but to depart. She returned to Rome and dismissed Santinelli in 1659, claiming to be her ambassador in Vienna without her approval  

 

프랑스에 있다가, 저때 크롬웰 의 잉글랜드여. 프로텍터 시절이야. 저길 또 갔어요 이언니. 참 시안해. 헌데 크롬웰이 안반겨. 당근 좋아하겄어? 프랑크 코트의 루이14세 엄마도 싫어해. 누가 좋아하겄어 저 언니를. 떠나야 했다 로마로. 그리고 모날데스키 를 죽인 산티넬리.를 해고를 해. 그리곤 얜 지멋대로 비엔나 가서 크리스티나 대사라며 죽치고 있어.

 

1658년 5월에 로마로 다시와. 프랑스에 2년 가까이 있던겨. 32세야. 아 이제 갓 30 넘으셨어 우리언니. 

 

On 15 May 1658, Christina arrived in Rome for the second time, but this time it was definitely no triumph. With the execution of Monaldeschi her popularity was lost. Pope Alexander VII remained in his summer residence and wanted no further visits from her. He described her as 'a woman born of a barbarian, barbarously brought up and living with barbarous thoughts [...] with a ferocious and almost intolerable pride'.[100]  

 

두번째로 왔는데, 거의 2년만에, 오잉 이번엔 분위기 싸한겨. 알렉산더 교황도 삐쳤어. 찾아가지도 않어 이번엔. 그가 묘사하다, 저년은 바바리안 태생이야. 야만처럼 자라서 야만인처럼 생각해, 열불만 내고 관용도 없어. 

 

걍 모날데스키 사망 사건으로 대스타 귀빈 언니가 바바리안으로 추락한겨. 

 

In April 1660 Christina was informed that Charles X Gustav had died in February. His son, Charles XI, was only five years old.  

 

2년 후에. 카를10세 죽어. 아들 카를11세 가 즉위했는데 다섯살.이야. 스위든을 가는겨, 저 꼬마 조카 도 죽으면 어째, 내가 다시 퀸해야 해 그럼. 아 헌데 안반기는겨. 못들어가 스톡홀름에. 그 아래에 머무는건 허용이 되고. 카톨릭 으로 개종했다미. 

 

아 더럽다미 다시 바다건너 함부르크 가서 놀다가 로마로 또 가

 

In the summer of 1662, she arrived in Rome for the third time, followed by some fairly happy years. A variety of complaints and allegations made her resolve in 1666 once more to return to Sweden. She proceeded no farther than Norrköping, where she received a decree she was only allowed to settle in Swedish Pomerania. Christina immediately decided to go back to Hamburg. There she was informed that Alexander VII, her patron and tormentor, had died in May 1667.  

 

그리고 1666년 에 다시 스위든을 가. 나이 40세. 스위든 포메라니아 에 머물으래. 크리스티나가 드러워서 다시 바다건너 함부르크 로 와. 이때 알렉산더7세 교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 

 

The new pope, Clement IX, a victory for the squadrone,[105][106] had been a regular guest at her palace. In her delight at his election she threw a brilliant party at her lodgings in Hamburg, with illuminations and wine in the fountain outside. The party enraged Hamburg's Lutheran populace, and the party ended in shooting, an attempt to seize the Queen, and her escape in disguise through a back door.[107] The Texeira family had to cover the repairs.[108] Again she met with the charlatan Giuseppe Francesco Borri.[109]  

 

새교황 클레멘스 9세.가 즉위하고, 둘이 원래 친해서, 함부르크 에서 축하파티를 열어. 이 클레멘스 9세 교황이 사람이 활달한 교황이야. 마음 좋고 관용에 기분파고 드라마 인기 캐릭이야. 유럽 전역을 돌아다닌 바티칸 외교관 출신이고. 둘이 이게 맞는겨. 여긴 함부르크 고 루터들이 많은 곳인데, 루터들이 열받은겨 저 노는 모습에, 총격사건이 벌어지고, 우리 크리스티나 를 잡으려 해. 변장해서 뒷문으로 탈출하다. 후원가 은행집안 텍세이라 가문이 보상 수리해줘야 했다. 그녀는 시대의 사기꾼 주세페 프란체스코 보르리.도 만났다. 얜 연금술사 전문 사기꾼이고. 

 

On 16 September 1668, John II Casimir abdicated the Polish–Lithuanian throne, and returned to France. The Polish monarchy was elective and Christina, as a member of the House of Vasa, put herself forward as a candidate for the throne.[110] She recommended herself being Catholic, an old maid and intended to remain one.[111] She had Pope Clement IX's support; but her failure seemed to please her since this meant that she could return to her beloved Azzolino.[112] She left the city on 20 October 1668  

 

1688년. 42세. 이때 말이지. 폴란드 카먼웰쓰 요한2세 카시미르.가 킹 자리에서 물러나는겨 쫓겨나듯이. 

 

이 폴란드가 지기스문트 바싸.가 죽고, 아들이 브와디스와프 4세 가 죽고 동생이 받은겨. 요한2세 카시미르. 이 사람이 1648년 30년전쟁 끝날때 킹이 된건데. 스위든 크리스티나 가 사촌 카를10세에 자리를 주고, 이 카를10세의 마스터플랜 이 폴란드 먹는겨. 그리고 더 먹는거고, 루이14세 와 똑같아 얘 집권 비전이. 그래서 카를10세가 즉위하자마자 북의 전쟁이 벌어지고, 얘가 폴란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더하여 코사크 족들 숫자 줄이면서 허가제로 바뀌고 일자리 끊겨서 수시로 반란이 나고, 가장 심각한게 흐멜니츠키 봉기야. 이걸로 코사크 들이 러시아랑 손잡으면서 러시아가 폴란드로 쳐들어 오는겨.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1657년 까지고. 크리스티나가 1654년에 내려왔고 바로 카를10세가 쳐들어온거걸랑. 걍 폴란드는 양 쪽에서 난리가 나고 카를은 바르샤바 코트 도 장악해. 완전히 폴란드는 스위든께 된겨. 얜 도망을.가 . 이게 1668년 이고 폴란드 카먼웰쓰 셰임.이 쟬 짜른거야. 

 

얜 프랑스로 가서 몇년 후에 죽어. 자의반 타의반 짤린겨. 

 

얘를 보고, 스위든의 저 크리스티나 조카.인 카를11세.가 절대군주.가 되는겨. 아 군주가 힘이 없이 셰임에 휘둘리면 저렇게 나라가 없어지는군. 유럽의 절대군주.는 단 두명.이야. 루이14세 와 카를11세

 

그리고 폴란드.가 킹 선거를 하는데. 여기에 끼인게 그랑콩데.여 후보로. 

 

아 헌데, 우리 언니 크리스티나.가 내가 하께 폴란드-리투아니아 킹. 나 카톨릭이얌.ㅋㅋㅋ. 이걸 친구 새로 즉위한 교황 클레멘스9세가 또 밀어주는겨. 

 

She had Pope Clement IX's support; but her failure seemed to please her since this meant that she could return to her beloved Azzolino.[112] She left the city on 20 October 1668  

 

그러나 결국 킹 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기뻤다. 자기 사랑 아졸리노 를 보러 다시 로마로 갈수 있어서. 

 

1668년 에 네번째 로마로 오면서. 21년 산거야 이때부터 63세 까지. 

 

자기가 만든 아케데미아 열고, 돈도 없어 이제 우리언니. 그래도 귀족들이 챙겨줘. 빚이지만 머 못갚을 빚인거 뻔히 아는거고.

 

엘리자벳.도 코트에서 걍 이름뿐인 퀸인겨 아무리 역사가 어쩌고 저쩌고 해도. 

 

여자들 인생 중에, 아마 최고로 재밌게 산겨 이 여자는. 유럽 전역을 다 돌아다니고, 폴란드 킹도 할라구 하고. 사기꾼들과도 만나서 놀고, 파티때 자기 잡으려는 총쏘는 애들 피해 변장해서 도망다니고

 

로마에 와서는 처음엔, 이탈리아 전역을 기쁨으로 준겨 이여잔. 저때 정말 로마는 최고로 기뻤을거야. 

 

여자 일생 이 아니라, 모든 인간 통틀어, 이 여자 만큼 그야말로 저렇게 산 사람은 과연 인간의 역사중 몇일까. 

 

전쟁을 마무리한겨 그 끔찍한 30년 전쟁도 갓 22세의 여자가. 이건 전적으로 크리스티나.의 힘이야. 

 

지식 과 경험, 이 두 측면에서, 이 여자는 최고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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