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t of Christina by  Giulio Cartari  in  Palacio Real de La Granja de San Ildefonso

Christina (18 December 1626 – 19 April 1689) became Queen of Sweden at the age of almost six.[note 1] As a member of the House of Vasa, she succeeded her father Gustavus Adolphus upon his death at the Battle of Lützen, but began ruling the Swedish Empire when she reached the age of 18.[7]  

 

크리스티나. 1626-89. 아빠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가 뤼첸 전투.에서 1632년 에 죽어. 30년 전쟁.의 라이프치히 근처 아래여. 프로테스탄트가 이겼지만 킹도 죽고 마샬도 심각히 부상당하고. 이때 크리스티나 가 여섯살.이야. 섭정을 하는거고, 18세인 1644년 에 직접 통치를 하고, 1650년 에야 대관식을 해 25세에. 그리고 대관식 후 4년 후인 1654년에 자기가 내려와 그냥. 10년 통치하고 권력에서 스스로 내려온겨 이여자가. 아 기분좋~~다 하면서리. 진짜 이여자 의 말소리야 아 기분좋다 ㅋㅋㅋ. 1654년 28세 창창할때 내려온겨. 그리곤 35년을 유럽대륙을 돌아다니다가, 로마에서 자리잡고 여기서 죽어. 이 여자 무덤.은 지금 교황들 무덤 베드로 성당 아래 지하동굴에 있어.

 

Grotte Vaticane. 그로테 바티카네. 바티칸의 베드로성당 지하 동굴무덤.이야. 바티칸의 동굴. 여기에 묻힌 여자가 단 세명이야. 교황들과 함께. 위대한 중세 여인 카놋사의 마틸다. 다음에 이 스위든의 크리스티나. 다음에, 1688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의 부인인 폴란드 소비에스키 가문의 마리아.야. 

 

제임스2세 부터 재코바이트 가 되서, 아들 프란시스 에드워드 가 재코바이트 를 잇고, 이 부인이 폴란트 소비에스키 킹의 손녀 여. 폴란드가 바싸 가문이 끊기고, 그랑콩데 부자도 후보에 올렸다가, 비슈니오비에츠키 가문이 킹을 하고 바로 이어 소비에스키 가 킹을 할때 이 손녀가 제임스2세의 아들에게 시집을 간겨. 이 자식이 마지막 제코바이트 인 바람과함께사라지다 에서 나오는, 보니찰리프린스.야. 이 재코바이트 들은 카톨릭인거고. 잉글랜드의 사라진 카톨릭의 기운이 웃기게도,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부부.와 아들 보니찰리프린스. 이 셋 무덤이 그로테 바티카네.에 같이 묻혀서 지금 있는거야 로마 베드로성당 지하에. 제임스2세.는 파리 근처에서 죽어서 파리에 묻혔다가 1789 대학살때 역시나 들춰지고 다시 다시 재건립된 교회 무덤에 있어. 

 

이 여자가 재밌는데 이 여자 이야기가. 이 유럽의 인물사.는 우리가 전혀 몰라 이걸. 알 수가 없어 이 벌레들의 지쩍 수준에서. 특히나 이땅빠닥의 가장 사기질은 유럽 들먹이면서 이바구질 하며 돈버는 애들인데. 

 

쟤들 모든 인물들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거라, 서로 얽히고 섥혀서리, 이해를 못해 이 땅 지식인 자연 뇌 들은. 

 

쟤들 인간들 하나 하나가 무수한 이야기의 인간들이야 이게. 이걸 비교를 못해 극동의 인간들과. 이 극동 애들은 갇힌 애들이걸랑. 유이 하게 두명의 인간이 장건 과 감영 이야. 이 두 사람만이 인간노릇을 하고 죽은겨 극동에선. 우리네 삼국사 이야기 인물들 몇몇 빼고. 일본의 견수사 견당사의 학생들에 네명의 덴쇼사절단 열두살짜리들에 이후 일본애들의 세상 돌아다니는 이들 빼고. 

 

볼게 없어 볼게. 그래서 인간들이 무지한겨. 미개한거고. 

 

 

 

Kristina, senare Kristina Alexandra, 스위든어.로 크리스티나. 이고 나중에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로 불리는데. Drottning Kristina. 얘들은 일반적으로, 드로트닝 크리스티나.라고 해. 크리스티나 여왕. 

 

드로틴 Drottin 이 로어드. 군주여 남자 군주. 여자군주가 드로트닝.이야. 이건 노르족언어야. 

 

Konungariket Sverige. 지금 스위든.의 공식이름이. 코눙가리켓 스베리예.여. 스위든 킹덤.이야. 스위든에선, 킹 을 kung 쿵 이라고 해. 또는 코눙. 킹 이란 말은 게르만애들 말이고 영어가 킹. 스위든은 쿵. 이걸 들어서 슬라브애들이 크냐즈 로 자기들 귀에 들리는데로 쓴거야. Svenska 스위디쉬.라는 스위든 언어.를 스벤스카.라고 해. 

 

나라이름은, 스베리예. 로 부르던가, 스위든 이라 부르던가. 둘중 하나여.  스웨덴 이란건 세상에도 없는 일본 발음이고. 

 

노르족 애들만의 단어 드로틴. 이 따로 있다가, 쿵 을 쓰는거고. 즉 드로틴 은 킹 이전에 부락 추장의 타이틀 인거고. 헌데 퀸 에겐 드로트닝 을 그대로 쓰는겨 얘들은. 퀸들은 무조껀 드로트닝 이고, 킹은 쿵 이야. 

 

여긴 살리크법의 살리크족이 아냐. 여자도 권력쥔 퀸을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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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가 정치엔 관심이 업고, 사치만 부렸다느니 해대면서 평이 안좋지만. 너무 잘못된 혹평이고. 

 

이여잔 세상만사가 관심이 있는여자여. 이여잔 학자 로 태어났어야 해. 헌데 어찌할수 없이 퀸이 되었을 뿐이걸랑. 

 

엄마여 엄마. 엄마가 저런 성향의 크리스티나 를 만들었어. 

 

Maria Eleonora of Brandenburg (11 November 1599 – 28 March 1655) was a German princess and Queen of Sweden as the consort of King Gustav II Adolph (Gustavus Adolphus).  

 

엄마가,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야. 스위든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에 시집가는게 1620년 11월.이야. 21세. 구스타부스 1594년생 26세. 구스타부스.가 1611년 17세에 킹에 오르고 아직 장가를 안간겨. 무지 바빳걸랑. 아빠때 시작한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에 러시아와 잉그리안전쟁.이 1617년에 끝나. 폴란드와는 항상 전쟁이고. 아직 폴란드 킹 지기스문트 바싸가 살아있어 앤 스위든 킹 자리 쫓겨났다면서 부들부들 대는거걸랑. 

 

브란덴부르크 가, 저때 선제후가 죽어 엘레오노라 아빠가. 오빠가 선제후를 받은거고, 이 오빠 게오르크 빌렘.이 1619년에 

 

George William (German: Georg Wilhelm; 13 November 1595 – 1 December 1640), of the Hohenzollern dynasty, was margrave and elector of Brandenburg and duke of Prussia from 1619 until his death 

 

게오르크 빌렘. 이 1619년, 24세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에 프러시아 공작.이 되는겨. 이 프러시아 는 알베르트 튜튼기사단장이 정식으로 폴란드에 하미지해서 공작령을 받아서 자식대에 끊겨 핏줄이. 이걸 게오르크 빌렘.의 아빠 요한 지기스문트.가 1618년에 프러시아 공작령을 받는겨 사촌이걸랑. 여자핏줄로. 1618년 부터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가 같이 묶인겨 이게. 그런데, 브란덴부르크 는 신성로마황제에 하미지 하는거고, 프러시아 는 폴란드 킹에 하미지를 하는겨. 상위법이 별개인 체제고, 군주는 하나인거야. 이게 나중 독일 통일하는 프러시아 의 시작이 되는거고. 

 

아빠가 1618년에 받고, 다음해 죽은겨 1619년. 이걸 아들 게오르크 빌렘.이 받은겨. 이때 막 30년 전쟁이 터진거야. 

 

게오르크 빌렘.이 저때 작센 선제후 다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핵심이여. 헌데 역시나 중심을 못잡는겨 얘도. 더구나 얜 프러시아 공작 겸임이야. 여긴 폴란드 킹땅이여. 폴란드 지기스문트는 카톨릭에 꽂힌애고 황제 좋아해.  조심하는겨 중립 행세 하는거고. 

 

헌데 요때, 마침 저 전쟁하느라고 장가 안간 스위든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브란덴부르크 의 저 선제후 여동생 에게 꽂힌거야. 

 

아 아돌푸스.가. 26세 가 되도록 장가를 안간겨 얘가. 얘가 꽂힌 여자가 스위든 귀족 여자였어.

 

Ebba Magnusdotter Brahe (16 March 1596 – 5 January 1674) was a Swedish countess, landowner, and courtier. 

 

에바 마그누스돗테 브라헤. 브라헤 가문이 당시 최고 귀족이야. 아빠 마그누스 브라헤.가 스위든 코트의 칸스터블 하이.에 스튜어드 로어드 면 말잡이 짱에 집사 짱이면 완전 실세 걸랑. 아돌푸스 의 엄마 코트에서 들어가 있던겨. 그러면서 아돌푸스와 눈이 맞아. 둘이 세컨드 커즌 원스리무브드 면 족보로는 삼촌조카 사이인거고. 

 

헌데, 엄마 인 카를9세 마누라, 미망인이 된. 이여자가, 귀족 여자 를 거부하는겨. 다른 나라의 다이너스티 와 결혼을 시키려 하는겨. 왜냐면, 예전 시엄마 가 역시나 스위든 귀족 여자였는데, 자기 시아부지 요한3세를 쥐고 흔들면서 자기 가문 챙기는걸 보고, 자식 결혼을 스위든 귀족과 안 시키려고 작정을 한거야.

 

그래서 지금 스위든 에서, 로망스 의 대표 커플 이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와 저 에바 브라헤.여 항상 스위든 리터러쳐 에 등장하는 커플이. 

 

아돌푸스 가 다음 찾은 상대가 게오르크 빌렘.의 여동생 마리아 엘레오노라.인겨. 프로테스탄트 여자여야 하걸랑. 더구나 다른 나라의 다이너스티.고 엄마가 아직 살아있어 저 결혼은 가능한거야. 더군다나 너무 이뽀 여자가. 

 

헌데 문제는, 선제후 겸 공작이 된 오빠 게오르크 빌렘.이야. 막 30년 전쟁도 터지고. 프로테스탄트 쪽에 여동생 시집을 보내선 안돼. 말이 중립이지, 얜 프로테스탄트 주제에 걍 카톨릭 편을 든 중립인겨 이건. 반대하는겨 저 결혼을. 

 

헌데 아돌푸스 가 베를린 으로 와서, 요때 저 오빠가 자리를 비울때 와서, 미망인인 장모님 을 공격한거야. 장모님이 뾰옹 간겨. 허락을 하고, 딸을 시집을 보낸거야. 이걸 오빠가 알고 무효를 시켜. 장모님이 자기딸을 비밀작전으로 배태워서 스톡홀롬으로 보내서 결혼을 하는겨. 1620년 11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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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는 호헨졸레른 가문.이야 

 

호헨졸레른 이란건. 

 

 

호헨졸레른.이 독일을 통일하고 이게 독일이 된건데. 시작은 1061년 부터 보이는겨. 살리안조 하인리히4세 때여. 

 

호헨졸레른 성.이 슈투트가르트 아래에 있어. 여긴 슈바벤 지역이고. 다음 하인리히 5세에 로타르3세 에 이어 호헨슈타우펜 프리드리히 황제들에 충성충 한 가문이여. 

 

호헨졸레른. 은 영어발음이고. 독어로는 호헨촐란. 해. 촐레른 이라고 안해. 얘들 모음 발음이 영어화 된겨 이게. 바이에른 안해. 바이언.이야. 바이에른 은 일본말이야. 우리가 익숙한 딱딱한 독일식 발음은 이젠 스위든 에서만 정확하게 내는 소리야. 북해 쪽 바닷가 애들이랑. 

 

이게 내려가서, 뉘른베르크.도 받은겨 땅을. 본토는 슈바벤의 호헨졸레른.이고, 뉘른베르크 는 동생한테 줬는데, 1218년.에 형이 뉘른베르크 를 받고 동생이 본적 호헨졸레른 으로 와. 이걸 서로 형제가 바꿔. 

 

저때 게르만의 킹.이 프리드리히2세여 나중 황제. 당시 게르만의 킹. 

 

프리드리히1세 가 십자군 가는길에 죽고, 아들이 하인리히 6세 인데, 죽어, 아들 프리드리히2세는 어려. 삼촌 슈바벤 공작 필립 이 게르만의 킹이 되는데 암살을 당해. 그리고 황제 오르는게 사자공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여. 그리고 프리드리히2세가 게르만의 킹 이 된게 1212년 이야. 저때도 여전히 교황과 황제의 싸움인거고. 이때 프리드리히2세 쪽에서 키운 도시가 뉘른베르크.야.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한겨 여기 마인강 상류 지역의 지류 가. 

 

이걸, 호헨졸레른 가문에게 특혜를 주면서 여길 키우라는겨. 동생대신 형이 여길 앉아. 여기가 프랑코니아 지역이야. 그래서 이때부터 프랑코니안 호헨졸레른 이야. 그리고 이 프랑코니아의 뉘른베르크 에 정착한 형쪽인 호헨졸레른 은 프로테스탄트 가 되는거고, 본적 성 으로 간 동생 은 카톨릭 이 되는겨. 

 

이 호헨졸레른.이 1415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받는겨. 여긴 아스카니아 의 곰 알베르트 가 개척한 곳이고 이게 끊겨서 당시 비텔스바흐 가문 황제가 자기네꺼로 취했다가 또 끊겨서 황제 룩셈부르크 가문이 갖았다가 지기스문트에 끊기고 이게 호헨졸레른 에게 온겨. 여기서 나온 피가 튜튼기사단장 알베르트 고 얘가 프러시아 더치 로 폴란드 킹에 하미지 하는거고, 얘들이 모두 프랑코니아 의 뉘른베르크 에서 시작한 호헨졸레른 이야. 이들은 프로테스탄트 가 된겨.

 

저기서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러시아 공작령 을 1618년에 아빠가 받고 죽어서 1619년에 게오르크 빌렘.이 받은거고. 여동생이 첩보작전으로 오빠 피해서 스위든에 시집을 간거야. 

 

The wedding took place in Stockholm on 25 November 1620. A comedy was performed based on the history of Olof Skötkonung. Gustavus Adolphus - in his own words - finally "had a Brandenburg lady in his marriage bed". Anna of Prussia actually stayed with her daughter in Sweden for several years after the marriage  

 

결혼식까지 걍 모든 로망스를 둘이 다 한겨. 그래서 아돌푸스 가 자기 말로, 마침내 브란덴부르크 레이디를 내 결혼 침대에서 갖았군. 장모님 안나 는 스위든에 몇년 같이 있었다 결혼 후에도. 

 

Gustavus Adolphus shared Maria Eleonora's interest in architecture and her love of music, while she was sentimentally devoted to her husband. Often, she lamented that she never had her hero for herself. Foreign ambassadors found her gracious and beautiful and she had good taste, although her character showed some extravagant traits. Maria Eleonora had a definite liking for entertainment and sweetmeats, and she soon succumbed to the current fashionable craze for buffoons and dwarfs. She spoke French, the court language of the age, but never bothered to learn to write German or Swedish correctly.  

 

크리스티나 의 엄마 엘레오노라.는 아주 걍 인문학적 여자여. 건물들 설계들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남편에게 헌신을 해. 종종 탄식하다 자기 영웅인 신랑을 독점하지 못함을. 바쁘걸랑 신랑은 저때도, 특히나 폴란드가 문제여 항상 저때도. 지기스문트 바싸는 사촌인거고, 인정 못하는겨 저 스위든은 자기꺼걸랑 여전히. 외국 사절들은 그녀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하다, 그녀는 취향이 탁월했다 그런데 캐릭이 먼가 좀 사치스러운듯. 즐거움과 음식에 아주 취향이 명확 했다. 당시 유행했던 광대와 난쟁이들에 미치도록 좋아하다. 불어는 했는데, 이 불어는 당대에 코트 에서 무조껀 해야하는 언어였고, 그러나, 게르만어와 스위든어 는 결코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헌데, 아 남편에  메조여. 남편없인 못살아. 그러다 유산을 세번 씩이나 해. 킹덤 차원에선 후계자가 없어 조바심인거고. 

 

 A year after their wedding she had a miscarriage and became seriously ill. She was tempestuous, excessive, neurotic and jealous. She was often given to harsh language, and she did not spare her husband, even when strangers were present. Her emotional life lacked balance, and everything Maria Eleonora undertook on her own initiative needed careful watching. Soon Gustavus Adolphus' intimates knew that his married life was a source of grief and anxiety.  

 

결혼 일년 후 유산 한번하고 심각히 아팠다. 성질  부리고 시기 질투 음청나지고 종종 하츠년 처럼 욕질도 하다, 남편을 가만 두지 않고 꼭 붙어 다녔다. 먼가 심적 균형이 부족하고 아 이여자 불안불안 해서 옆에서 봐줘야 해 먼가 일 날라. 아돌푸스 는 그때서야 알았다, 그의 결혼 생활이 슬픔과 걱정의 원천이었구나.

 

아  크리스티나 언제 하냐 이거.

 

With the renewal of the war with Poland, Gustavus Adolphus had to leave his wife again. It is likely that she gave way to depression and grief, as we know she did in 1627, and it is probably for this reason that the king let his queen join him in Livonia after the Poles had been defeated in January 1626. By April, Maria Eleonora found she was again pregnant.  

 

아돌푸스 가 리보니안 전쟁하러 가고, 와이프 도 데려와 혼자 우울증 걸려서리. 여기서 생산을 하고, 저해 말에 크리스티나 를 낳은겨. 처음엔 아들인줄 알았는데, 솜덜이 얼굴 에 몇몇빼고 빼곡하더래. 코는 크고 머리도 크고 아 헌데 딸인겨. 엄마가 기겁을 하고 크리스티나 애기를 쳐다 보지도 않았대 저건 괴물이라며. 왜 이리 못돼 처먹었냐 이거.

 

In 1630 Gustavus Adolphus concluded that Habsburg designs for Baltic supremacy threatened Sweden's very existence and also its religious freedom. Before he left to join the Thirty Years War, he discussed a possible regency with members of the government and admitted to them that his wife was "a miserable woman". Even so, Gustavus Adolphus could not bring himself to nominate a regency council in which her name did not appear. To Axel Oxenstierna, he confessed: "If anything happens to me, my family will merit your pity [..], the mother lacking in common sense, the daughter a minor - hopeless, if they rule, and dangerous, if others come to rule over them."  

 

아돌푸스 가 1630년에 30년 전쟁에 참전하기로 해. 합스부르크 가 발틱을 점령하고 스위든도 위협이 되고, 그러면 종교 자체도 문제가 생겨. 떠나기 전에, 자기 와이프는 미저러블 우먼. 우리말로 불쌍한 여자.야. 만일을 대비해서 섭정을 정해주고 가야 하는데, 이걸 안하고 갔어 이사람은. 당시 카운슬러 가 악셀 옥센스티아나. 인데, 나한테 뭔일이 생기면 내 가족은 당신의 애정이 필요할거요. 엄마란 여자는 공감능력이 없고 딸은 어리고, 희망이 없네 이거, 그들이 다스리면 위험하고 남들이 그들위에서 다스리면, 아 어쩌냐 이거. 하면서 걍 간겨 그리고 죽은거야 2년 후에. 

 

섭정에서 별 이유를 만들어서 엘레오노라를 제외시켜. 대신 딸은 자기가 델꼬 가겠대. 그러라고 해. 섭정은 저 옥센스티아나 형제들이 하는겨. 저 할배 악셀 옥센스티아나.가 나중에 크리스티아나 퀸 오를때도 가장 꼰대 할배여. 애기 델꼬 가더니 맨날 울고 불고 완전히 정신병자 가 된겨. 사람들이 애를 아예 데려와 애기도 이상해질까봐. 그리곤 저 할배 옥센스티아나 랑 숙모가 키우는겨. 이 할배 가 커서도 계속 케어를 하는데, 크리스티아나 가 워낙 활달한 여자라 이 할배 꼰대질을 싫어해. 나중에 10년 퀸 하고 할배 나 그만할래, 할때 할배가 말려. 후임 에 앉을 카를 씹새가 애가 저거 전쟁  좋아하는 애라 불안햇걸랑. 헌데 크리스티나가 막막 할배 나 그만 할껴 떼써서 그러라고 해. 엄마도 외진데서 사는거고, 나 엄마 그만 내려올껴 말해. 그때까지 살았어 엄마도. 퀸에서 내려와서 바로 할배 죽고 엄마도 죽어.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애기 크리스티나 를 아예 후계자로 선포를 해. 마누라 몸상태보니 애를 못낳을거란걸 알아. 그리고 무척 이뻐하며 키워. 헌데 애기때 빛이 나와서 요람을 비추는 일도 있었다고 하고, 막 계단에서 날라 떨어지고, 유모가 잘못 관리해서 애 떨어지고, 어깨가 한쪽이 약간 올라가고 몸도 좀 구부정한게 어릴때 하도 낙상사고를 당해서 그래. 코도 커. 헌데 졸 여장부여.

 

The Royal Council's method of giving Queen Christina several foster mothers to avoid her forming an attachment to a single person appears to have been effective, as Christina did not mention her foster mothers directly in her memoirs and did not seem to have formed any attachment to any of them; in fact, with only a few exceptions, such as Ebba Sparre, Lady Jane Ruthven and Louise van der Nooth, Christina did not show any interest in any of her female courtiers, and she generally mentions them in her memoirs only to compare herself favorably toward them by referring to herself as more masculine than they

 

애기를 데려와서 몇몇 양엄마들에게 줘. 한 사람만의 영향력이 안 스미게 여럿이 키운겨 꼬마를. 그래서 나중에 말하길 머 딱히 특별한 엄마들이나 여자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거고 세명 빼고는. 여자 코트 레이디들에 거의 관심도 없었어. 그녀는 자기를 더 남성적인 대상과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저런걸 왜 쓰냐면 얘들이, 레즈 인가 아닌가. 이여잔 평생 혼자 걸랑. 레즌가? 아 그건 아닌듯?.

 

Christina was educated as a royal male would have been. The theologian Johannes Matthiae Gothus became her tutor; he gave her lessons in religion, philosophy, Greek and Latin. Chancellor Oxenstierna taught her politics and discussed Tacitus with her. Oxenstierna wrote proudly of the 14-year-old girl that, "She is not at all like a female" and that she had "a bright intelligence". Christina seemed happy to study ten hours a day. Besides Swedish she learned at least seven other languages: German, Dutch, Danish, French, Italian, Arabic and Hebrew.[note 4]  

 

킹덤의 남자 가 받았던 교육을 받았다. 신학자 요하네스.가 개인 선생이었고, 종교 철학 그리스어 라틴어를 가르치다. 이사람이 스톡홀롬 대주교에 웁살라 대학 1477년 설립된 저기 최고 대학이고 교수야. 프로테스탄트 의 짱이여. 옥센스티아나 할배가 정치학 가르치고 타키투스 로 토론하고. 옥센스티아나 가 자랑스럽게 14세 짜리 소녀에 대해, 그녀는 전혀 여자같지 않아. 그녀는 맑은 지성을 가졌어, 라고 썼다. 크리스티나 는 하루에 열시간 공부하는걸 행복해 한듯 하다. 스벤스카 외에도 게르만어 더치어 데이니쉬, 프렌치 이탈리안 아랍 히브리어들을 배웠다. 

 

 

In 1636–1637, Peter Minuit and Samuel Blommaert negotiated with the government to found New Sweden, the first Swedish colony in the New World. In 1638, Minuit erected Fort Christina in what is now Wilmington, Delaware; the Christina River was also named after her. The Queen Village neighborhood in Center City, Philadelphia takes its name from the neighborhood street named in her honor  

 

1644년 섭정 벗어나기 전에, 뉴 스위든.이 북미 에 선거야. 1636년, 크리스티나 열살때, 피터 미누이트.와 새무얼 블로마트.가 스위든에 와서 니덜 북미에 안가냐. 미누이트.는 왈로니아 벨기에 사람이고, 블로마트 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사람이야. 이전에 아돌푸스 가 북미 진출 계획도 있고. 저때는 프레데릭 헨리.가 있을때고, 네덜란드랑 스위든은 졸 친한겨 저때. 피터 미누이트.도 네덜란드 이름으로 맨하탄 뉴욕에 있던겨. 이 미누이트. 가 원주민 한테서 맨하탄 땅을 산거야 지금돈 1천달러 로. 걍 공짜로 주은겨. 네덜란드 이름으로. 이게 뉴암스테르담 이었던거고. 그리고는 스위든을 꼬시면서 당신들 저 델러웨어 반도쪽에 이전 죽은 킹이 가자했는데 왜 안가냐 투자좀 해라. 해서 이 피터 미누이트.가 스위든 으로 갈아타서 뉴 스위든 거버너 가 되는겨. 델러웨어 강 따라서 크리스티나 요새들을 짓는거고. 얘들은 프랑스도 마찬가지고 강따라서 요새 지으면서 땅 넓히는겨 저때. 그러면서 이름들을 크리스티나 따서 짓고, 퀸 빌리지 라고도 하고. 

 

그리곤 저 뉴스위든.을 네덜란드 에 뺏기고 얘들은 잉글랜드랑 전쟁하면서 이게 영국것이 된거야 뉴스위든 이란 북미땅은. 

 

In 1644, Christina was declared an adult, although the coronation was postponed because of the war with Denmark.  

1644년 에 18세가 되었고 성인임을 선언당하고. 적접 퀸을 하는겨. 대관식은 덴마크와의 전쟁때문에 미루다. 1650년 에 해. 

 

The Torstenson war, Hannibal controversy or Hannibal War (Norwegian: Hannibalsfeiden) was a short period of conflict between Sweden and Denmark–Norway from 1643 to 1645 towards the end of the Thirty Years' War. The names refer to Swedish general Lennart Torstenson and Norwegian governor-general Hannibal Sehested.  

 

저때 아직 30년 전쟁.이야. 프랑스가 들어온 상태에서 스위든도 섭정하에서 계속 들어가있는거고, 스위든과 덴마크 는 철천지 웬수야 칼마르 들어가고부터 항상. 독립할때 시작 스톡홀록 욕조 피바다 사건은 더 찐한거고. 스위든이 내친김에 덴마크 를 더 치는겨. 덴마크는 저때 크리스티안 4세 가 르네상스 킹 어쩌고 그레이트 해 대지만, 얘가 덴마크를 망친거일 뿐이고. 스위든이 쳐들어가는겨. 토르스텐손 마샬이고 덴마크-노르웨이는 한니발 세헤스테드.라서, 토르스텐손 전쟁. 한니발 전쟁 이라고 하는데. 이때 스위든이 이기고, 사운드 듀. 를 면제 받는겨. 

 

In 1648 she commissioned 35 paintings from Jacob Jordaens for a ceiling in Uppsala Castle. In 1649, 760 paintings, 170 marble and 100 bronze statues, 33,000 coins and medallions, 600 pieces of crystal, 300 scientific instruments, manuscripts and books (including the Sanctae Crucis laudibus by Rabanus Maurus, the Codex Argenteus and the Codex Gigas[22]) were transported to Stockholm. The art, from Prague Castle, had belonged to Rudolf II, Holy Roman Emperor and was captured by Hans Christoff von Königsmarck during the Battle of Prague and the negotiations of the Peace of Westphalia.[23] By 1649–1650, "her desire to collect men of learning round her, as well as books and rare manuscripts, became almost a mania," Goldsmith wrote.[24] To catalogue her new collection she asked Isaac Vossius to come to Sweden and Heinsius to purchase more books on the market.  

 

1648년. 22세.에 웁살라 성 천장을 위한 그림 그리기 지시를 하고, 걍 조각에 동전 수집에 과학실험도구들에 원고들과 책들을 스톡홀롬에 싣고 와. 30년 전쟁하면서 프라하성에서 갖고 온 유명한 코덱스 기가스.가 사탄 그림 책들이여. 이것도 챙기고 지금 스위든에 있고. 이것도 크리스티나 의 적극적 지시여. 프라하 가면 꼭  갖고 와라. 

 

그녀는 배운이들 수집하는 여자였고. 책들과 귀한 원고들 도 수집하는, 거의 매니아 더쿠였다. 책 사라라 사람들 보내는겨.

 

그리고 또한 읽었어 지독하게. 이여자 졸 신기한 여자야. 

 

In 1649, with the help of her uncle, John Casimir, and her cousins, Christina tried to reduce the influence of Oxenstierna, and she declared Casimir's son, her cousin Charles Gustav, as her heir presumptive. The following year, Christina resisted demands from the other estates (clergy, burghers and peasants) in the Riksdag of the Estates for the reduction of tax-exempt noble landholdings. She never implemented the policy.  

 

1649년.에 어릴때부터의 할배 옥센스티아나 가 막 너 심하잖오. 칭찬하며 좋아하던 할배가 꼰대질 하는겨 이여자 입장에선. 할배를 멀리하고. 자기 사촌 나중 카를씹세 를 후계자로 지명한겨. 즉 결혼할 생각이 없는겨 이여자가. 카를 씹세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누나 의 아들이야. 크리스티나 가 릭스닥. 스위든 의회에서의 요구들-귀족들 소유의 감세 가 졸 많은데 귀족 감세 면세 를 줄여서 귀족들도 세금 내게 하라-에 맞서. 귀족은 세금면제 가 대체 어느정도 였길래 저랬냐.

 

The "Semiramis from the North" corresponded with Pierre Gassendi, her favorite author. Blaise Pascal offered her a copy of his pascaline. She had a firm grasp of classical history and philosophy.[32] Christina studied Neostoicism, the Church Fathers, and Islam; she systematically looked for a copy of the Treatise of the Three Impostors, a work bestowing doubt on all organized religion.[33] In 1651 the kabbalist Menasseh ben Israel offered to become her agent or librarian for Hebrew books and manuscripts; they discussed his messianic ideas as he had recently spelled them out in his latest book, Hope of Israel. Other illustrious scholars who came to visit were Claude Saumaise, Johannes Schefferus, Olaus Rudbeck, Johann Heinrich Boeckler, Gabriel Naudé, Christian Ravis, Nicolaas Heinsius and Samuel Bochart, together with Pierre Daniel Huet and Marcus Meibomius, who wrote a book about Greek dance.

Christina was interested in theatre, especially the plays of Pierre Corneille;  

 

피에르 가셍디, 파스칼, 데카르트 머 걍 당대에 유명인사와 적극적으로 서신 교환을 해. 데카르트 는 와서 감기걸려 죽는거고. 연국에도 미쳐서 코르네이 도 특별히 좋아하고. 네오스토아 학파. 교부들. 이슬람도 공부를 해. 히브리어도 할줄알어, 카발라 전문가가 히브리 책들 에이전트고. 

 

클로드 삼메즈, 요하네스 스케페루스. 올라우스 루드벡. 가브리엘 노드. 크리스티안 라비스 등 등 머 당대 유명인사들은 다 초대하다.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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