バールーフ・デ・スピノザ 일본애들이 바루후 데 스피노자. 하걸랑. 바뤼흐 스피노자 한글위키에 바뤼흐. 이게 모두 일본발음이야. 에라스뮈스 소리 하는것도. 저것도 일본애들이 옛날에 바루이흐 했을꺼걸랑. 

 

우리네는, 이 인문학이란게, 저런게 기본이야 기본. 기본적인 인명 지명 이 모~두 개판인겨 이게. 

[ Spinoza, Baruch De ]

[네이버 지식백과] 스피노자 [Spinoza, Baruch De] 

 

네이버 에서 걍 스피노자. 치면 처음 보는 철학사전에도. 스피노자, 바루크 데. ㅋㅋㅋㅋ 골때리는거다 저게. 구두점을 찍을려면, 바루크, 데 스피노자. 라 해야 하걸랑. 스피노자를 데스피노자. 라고는 해도, 바루크 라고는 해도, 바루크 데. 라고는 하지 않어. 저딴 이들이 이땅빠닥에서 철학사전 해대면서 저리 쓰는겨. 

 

완전 저런건 에이비시걸랑. 저따위 들이 먼 철학이 어떻고 저떻고. ㅋㅋㅋ. 정말 이 조선들의 인문학 지쩍 수준은 너무나 수준이한거야 이건.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8413.html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칸트 전집 번역 먼저 시작한 백종현 교수 한국칸트학회의 번역어와 번역주체 맹비판 “학회가 전집 번역한 나라 없어” “번역어는 반드시 한국어로 번역해야”

www.hani.co.kr

칸트 번역논쟁. 저 틀딱들 책이, 저게 가독성이  떨어지걸랑. 쟤 주장은, 번역을 해야 한당께 모든걸 우리말로. ㅋㅋㅋ. 쟤가 번역했다는 단어들은 모두 일본 한자야. 저런 기본적인거 조차, 반박하는 애들도 몰라 지들 번역해대는 모든 말들이 일본한자의 한글발음인걸. 논쟁하는 두 세력이 아주 똑같이 무지한 수준이걸랑.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하는겨 수십년간. 

 

저걸 어떻게 읽니 어떻게. 모든 말들이 일본애들 한자의 한글발음기호인데. 그 말들 단어들의 깊은 속내를 전혀 모르는데. 싕기한겨, 지도 모르는 이야길 썰  풀면서  대학자연 하는 애들이 이땅에서 선생 위대한 지성 이걸랑. 

 

참 코메디야.

 

이게 이 조선 땅의 수준이야. 어찌할수 없는겨 이게. 일본애들 조차 3백년을 번역한 힘이걸랑. 저걸  이제서야 하는겨. 한글로 된 서양철학서를 니덜이 못 읽는건, 니덜의 문제 이전에, 모두 저 번역된 책들의 문제여. 지가 쓰고 말하는게 먼 말인지도 모르는 말들을 해대는거고, 먼말인지 알면서 하는 썰들은, 거짓말이야. 

 

기본 인명 지명 이 모두 개판인데, 야, 저런 거 하나 기본적인 것도 이해할 수준이 안되는 애들이 ㅋㅋㅋ 대체 멀 번역해서 강의를 해대겠니. 

 

쟤들이 저게, 기본적으로 유럽 역사 를 모르는 거야. 역사를 모르면 그 인물 이 이해가 안되고, 그 인물 각각의 생각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냐고. 

 

기본 인명 지명 을 몰라. 

 

꺼져라 좀. 

 

René Descartes (31 March 1596 – 11 February 1650) 데카르트.가 1596-1650 이고. 토마스 홉스는 1588년생이야. 홉스는 롱팔리어먼트 가 스트랫포드 백작 처형시키고 이때부터 도망가서 11년간 프랑스에 있었어. 이때가 데카르트 말년 십년에 데카르트는 마지막은 스위든 크리스티나 퀸 초청으로 스위든 가서 감기걸려 죽고. 이전에 파리에서 저 서클에서 둘이 친구여. 홉스는 이전에 나온 방법서설 로 비판서를 쓰고, 이후 파리갈때 나온 책이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이고 이 둘은  친해 서로 편지교환도 하고. 

 

스피노자.는 1632-77 이야. 데카르트 가 스위든 가서 죽을때는 18세이고, 데카르트는 저당시 유럽에서 대스타야. 단지 책으로만 접해. 토마스 홉스 는 관심대상이 아냐, 몰라 스피노자는. 스피노자에게 문제제기 를 일으킨 사람은 데카르트 야. 

 

데카르트.의 내용들을 안 디다봤는데. 의미만 말하고. 왜냐면, 어차피 더 들어가봤자, 걍 내가 꺼낸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의미.를 증거하는 이야기일 뿐이라, 걍 넘어간거걸랑. 저런 데카르트 정리도 없거니와 대체 처음 듣보는 니덜이겠지만. 철학과 애들도 몰라 저런 이야길. 하튼 걍 그런줄 알어.

 

Portugal Restoration of Independence is celebrated every year on December 1st. It is the most important bank holiday in Portugal. The date recalls the struggle of Portuguese Nobles, who on December 1, 1640, revolted against Spanish rule and restored Portuguese independence from Spain. 

 

포르투갈 독립기념일이 1640년 12월 1일.이야. 상속전쟁으로 프랑스가 스페인땅 먹을때, 스페인이 잉글랜드 네덜란드 스위든의 삼자동맹에 기대면서, 잉글랜드의 요구로 독립을 시켜줘 포르투갈을, 울며 겨자먹기로.

 

포르투갈이. 세바스찬, 세바스시앙이 Alcácer Quibir. 알카세어 키비르 에 쓰잘덱 없이 가서 죽어 1578년에. 그래서 추기경이었던 작은 할아버지가 킹 하고 죽고 1580년에 스페인 펠리페2세.가 네덜란드 전쟁 중에 여길 먹는겨. 이후 60년 만에 독립을 한거고. 이때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먹으면서, 종교 탄압이  쎄게 들어오는겨. 이때 마침 직전에 네덜란드에서, 우트레흐트 유니온.이 1579년 이야.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면서 유대교 믿는 유대인들 어서 오세요 하는거걸랑. 이때 들썩 해도 안가 저길, 그러다 스페인 애들한테 먹힌겨. 1593년에 처음 암스테르담 으로 가는겨. 즉 이건 이후 13년간 스페인이 네덜란드 전쟁하면서 여기도 이단이  쎄게 들어온겨 이게. 이때 스피노자 할배도 포르투갈을 뜬거야. 언어는 포르투갈어를 쓰는거고. 히브리어는 기본에. 암스테르담으로 간 세파라드.가 된겨. 

 

Spinoza's father was born roughly a century after the forced conversions in the small Portuguese city of Vidigueira, near Beja in Alentejo. When Spinoza's father Miguel (Michael) was still a child, Spinoza's grandfather, Isaac de Spinoza, who was from Lisbon, took his family to Nantes in France. They were expelled in 1615 and moved to Rotterdam, where Isaac died in 1627. Spinoza's father and his uncle Manuel then moved to Amsterdam where they resumed the practice of Judaism. Miguel was a successful merchant and became a warden of the synagogue and of the Amsterdam Jewish school.[25] He buried three wives and three of his six children died before reaching adulthood.  

 

스피노자의 아빠는 알렌테이주 지역의 베자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이전에 개종을 했던겨 조상은 백년전에. 개종했어야만이 포르투갈에선 살수 있었던거고. 이게 1496년 마누엘 이 장가갈때 칙령이었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빠 꼬마를 데리고, 리스본에서 낭트 로 옮기고, 1615년 에 쫓겨나. 낭트 가 위그노들 거점 이걸랑 저 서쪽 해변이. 위그노들 조차 유대인들을 싫어하는거고. 로테르담 으로 가. 여기서 할아버지 이삭 이 1627년 에 죽은거고. 스피노자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 죽고 아빠와 삼촌이 암스테르담 으로 옮기고, 유대교 를 여기서 회복을 한겨. 아빠 마누엘 은 성공한 상인이었고, 암스테르담 시나고그 에서 워든. 가드. 지킴이여. 쎈 자리여. 유대인 학교에서도 거의 지도자 급이야. 아빠는 세번 결혼해서 부인들이 먼저 다 죽고, 여섯 자식들중 세명이 일찍 주고. 저때까지도 대게 자식들은 성인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반 도 안돼 이게. 대개들 열명 정도는 낳는거 같어 저들 인물사들을 보면. 

 

17th-century Netherlands[edit]

Amsterdam and Rotterdam operated as important cosmopolitan centres where merchant ships from many parts of the world brought people of various customs and beliefs. This flourishing commercial activity encouraged a culture relatively tolerant of the play of new ideas, to a considerable degree sheltered from the censorious hand of ecclesiastical authority (though those considered to have gone "too far" might have gotten persecuted even in the Netherlands). Not by chance were the philosophical works of both Descartes and Spinoza developed in the cultural and intellectual background of the Dutch Republic in the 17th century.[28] Spinoza may have had access to a circle of friends who were unconventional in terms of social tradition, including members of the Collegiants.[29] One of the people he knew was Niels Stensen, a brilliant Danish student in Leiden;[30] others included Albert Burgh, with whom Spinoza is known to have corresponded   

 

17세기 네덜란드.라는게, 네덜란드의 기적을 만드는 바닥이, 인문학이고 이전 르네상스의 힘이야 이게. 상선들이 버글버글 한겨,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 이전에 침묵 오렌지가 암살당하고, 안트베르펜은 스페인꺼가 되고, 이 플랑드르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가는겨. Simon Stevin 시몬 스테이빈.도 플랑드르에서 네덜란드로 간거고, 증기기관 이전에 수력 풍력을 이용한 샤프트 엔진을 만든 사람이야. 여러 다양한 관습과 믿음의 사람들이 오다. 1579년 우트레흐트 유니온 에서 가장 탁월한건, 머 저지역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 이전에, 종교의 자유 를 선언한겨 이건. 여기서 생각이 터진거야. 

 

최고야 최고. 북쪽 르네상스 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를 받은 초기 지역이고, 프랑스 가 이탈리아 전쟁하면서 프랑스와 1세 부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껄 갖고 오고, 다빈치 도 프랑스와 코트에서 죽은거고. 이걸 그대로 플랑드르 프리지아 가 받은겨. 여긴 자유의 프리지아 였고, 원래부터 상인들의 자유로운 땅이었어 두 지역이. 플랑드르는 고대 로마 의 지역이었고. 미친년 후아나가 플랑드르 와서 완전히 세상의 자유로움에 눈뜬거고 시집와서, 이여자는 플랑드르 왔다가 다시 스페인 가는 바람에 미친년이 된겨 너무나 깝깝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가 여기 네덜란드야. 데카르트 가 제수이트 칼리지 를 졸업하고, 1618년 22세에 낫사우 의 용병으로 들어간겨 브레다.로. 얘도 독특한 애야 이게. 로마 카톨릭이 칼뱅땅에 용병으로 가는겨. 

 

Given his ambition to become a professional military officer, in 1618, Descartes joined, as a mercenary, the Protestant Dutch States Army in Breda under the command of Maurice of Nassau,[28] and undertook a formal study of military engineering, as established by Simon Stevin. Descartes, therefore, received much encouragement in Breda to advance his knowledge of mathematics.[28] In this way, he became acquainted with Isaac Beeckman,[28] the principal of a Dordrecht school, for whom he wrote the Compendium of Music (written 1618, published 1650). Together they worked on free fallcatenaryconic section, and fluid statics. Both believed that it was necessary to create a method that thoroughly linked mathematics and physics  

 

데카르트 가 데카르트가 된건 1618년 네덜란드 용병으로 가서 데카르트가 된거야. 저기서 시몬 스테이븐.이 만든 군사 공학을 공부하는거고, 수학 을 급진전 시킨겨. 이삭 베이크만. 이 도르드레흐트 학교 교장이었는데 이 인간은 현대 원자론의 시조님이여. 이사람을 위한 책을 써. 프리 폴, 나중 뉴턴의 만유인력의 자유낙하, 캐터너리, 현수선 현수교의 그 두 기둥 사이의 곡선을 어드래 해야 가장 견고한가, 코닉 섹션, 원뿔기하학, 플루이드 스태틱스. 유체역학. 저게 모두 수학이고 물리학 지금 기본이고. 이걸 저기서 베이크만 이랑 협업을 한건데. 베이크만 이 1588년생. 8년 많아. 헌데 나중에 둘이 결별해. 데카르트가 고소를 해 베이크만이 자기껄 표절했다며. 

 

Descartes returned to the Dutch Republic in 1628.[38] In April 1629 he joined the University of Franeker, studying under Adriaan Metius, either living with a Catholic family or renting the Sjaerdemaslot. The next year, under the name "Poitevin", he enrolled at the Leiden University to study mathematics with Jacobus Golius, who confronted him with Pappus's hexagon theorem, and astronomy with Martin Hortensius.[46] In October 1630 he had a falling-out with Beeckman, whom he accused of plagiarizing some of his ideas. In Amsterdam, he had a relationship with a servant girl, Helena Jans van der Strom, with whom he had a daughter, Francine, who was born in 1635 in Deventer. She died of scarlet fever at the age of 5.  

 

데카르트.가 그 다음해 바로 바바리아 막시밀리언 쪽에 이젠 카톨릭 용병하러 간거고, 저기서 세번의 꿈을 꾼거고, 다음해 1620년 24세에 프랑스 돌아와서 채권투자로 돈벌고 이걸로 여유갖고, 리슐리외의 라로셸 위그노 전투 잉글랜드 낀거에도 참전하고 프랑스에서 팔년을 지내면서 주로 듣보기만 하면서 흡수를 해. 이때 이십대를 다 보내는건데, 이때의 프랑스에서, 추기경들의 세계에서 신학, 신비학, 에 수학 관련 인물들 클럽에 속해. 

 

Giovanni Francesco Guidi di Bagno (1578–1641) (also known as Gian Francesco Guidi di BagnoGianfrancesco Guidi di BagnoGiovanni Francesco Bagni or Gianfrancesco de' Conti Guidi di Bagno)[1][2] was an Italian cardinal, brother of cardinal Nicola Guidi di Bagno and nephew of cardinal Girolamo Colonna.  

 

지오반니 프란치스코 구이디 디 반뇨. 이 반뇨 형제들도 추기경이고, 삼촌 콜로나 도 추기경이고. 

 

Pierre de Bérulle (4 February 1575 – 2 October 1629), was a French Catholic priestcardinal and statesman, one of the most important mystics of the 17th century in France. He was the founder of the French school of spirituality, who could count among his friends and disciples Vincent de Paul and Francis de Sales.   

 

피에르 데 베훌. 도 추기경이고, 신비학의 거두고. 이 베훌.이 데카르트 한테, 야 이제 너도 너만의 이야기를 써봐라 독촉을 해. 저들이 모두 아빠 뻘이야. 

 

 

Marin MersenneMarin Mersennus or le Père Mersenne (French: [mɛʀsɛn]; 8 September 1588 – 1 September 1648) was a French polymath, whose works touched a wide variety of fields. He is perhaps best known today among mathematicians for Mersenne prime numbers, those which can be written in the form Mn = 2n − 1 for some integer n

 

저때 만난 사람이, 마렌 메르센. 이야. 메르센.이 메르센 프라임. 이라는 메르센 소수 만든 사람이고, 이 프라임 이란 소수.는 이 메르센 때 다시 티나오는 주제야. 이 소수 라는것, 일과 그 자신의 수를 인수로 같는 수.란건 유클리드 이후로 버려진 수걸랑. 이걸 메르센 이 갖고 온겨.

 

 

Pierre de Fermat (French: [pjɛːʁ də fɛʁma]) (between 31 October and 6 December 1607[1] – 12 January 1665) was a French lawyer[3] at the Parlement of ToulouseFrance, and a mathematician who is given credit for early developments that led to infinitesimal calculus, including his technique of adequality

 

피에르 데 페르마. 페르마의 정리의 그 페르마.야. 페르마는 1607년 생이고, 데카르트 보다 11세 어려. 이 페르마.는 툴루즈 의 파를레망 에서 변호사 로 살은겨. 여긴 옥시타니.이고, 이사람은 이쪽에서 태어나서 오를레앙 대학갔다가 돌아와서 변호사 생활하다 여기서 죽어. 안 벗어나 저 옥시타니를. 데카르트와 교류가 없어 이사람은. 프랑스 수학자 17세기의 두명 이 데카르트 와 페르마 야. 동시대 인간들이야. 데카르트 가 페르마의 책을 보고 기하학을 써. 

 

Descartes returned to the Dutch Republic in 1628.[38] In April 1629 he joined the University of Franeker, studying under Adriaan Metius, either living with a Catholic family or renting the Sjaerdemaslot. The next year, under the name "Poitevin", he enrolled at the Leiden University to study mathematics with Jacobus Golius, who confronted him with Pappus's hexagon theorem, and astronomy with Martin Hortensius.[46] In October 1630 he had a falling-out with Beeckman, whom he accused of plagiarizing some of his ideas. In Amsterdam, he had a relationship with a servant girl, Helena Jans van der Strom, with whom he had a daughter, Francine, who was born in 1635 in Deventer. She died of scarlet fever at the age of 5.  

 

데카르트 는 1628년, 32세에 다시 네덜란드로 가. 1620-28 까지 프랑스에 있던겨.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1649 까지, 20년을 거의 네덜란드에서 살은겨. 가끔 프랑스 드나드는거고. 이 데카르트 는 이게 네덜란드 인간인겨. 저기서 바로 위 스위든의 크리스티나가 초청해서 가서 다음해 2월에 감기걸려 죽은거걸랑. 

 

저때 다시 가서, 프라네커 대학. 이게 네덜란드에서, 라이덴 대학 1575년 에 서고, 10년 후 1585년에 만든 두번째 대학이야. 이전해에 침묵오렌지 죽은거고, 여기서 아드리안 메티우스. 기하학자 천문학자여. 이사람에게서 배우고, 다음해 라이덴 대학 에 가서 야콥 골리우스.와 함께 수학을 배워. 동갑이야. 이 야콥 골리우스.는 아랍어-라틴어 사전 만든 사람이여. 그리고 1630년, 34세에 예전 베이크만.을 고소를 해 표절했다고.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와서, 하녀 헬레나 에 푹 빠져서 딸 프란신.을 낳아 1635년. 39세에. 배스타드야 결혼을 안했으니까. 데카르트 는 결혼을 안했어. 헬레나 가 유일한 여자야. 저 꼬마가 다섯살에 홍역으로 죽고, 펑펑 울어, 당시 남자는 울면 안된다 는 시대에, 눈물 안흘린다고 남자라니 개소리 하네 라며 울더래. 저 이후도 헬레나 랑 같이 산 거로 봐, 헬레나가 시집을 갈때 천 굴덴 다우리를 줬다고 해. 

 

in 1643 to Egmond-Binnen — where in 1644 she married the local innkeeper Jan Jansz van Wel. Notary acts discovered by Jeroen van de Ven show that Descartes provided the 1000-guilder dowry for this wedding.[1][2] Descartes himself would remain in Egmond-Binnen until 1649, the longest period he ever stayed at any residence.  

 

In 1643, Cartesian philosophy was condemned at the University of Utrecht, and Descartes was obliged to flee to the Hague, settling in Egmond-Binnen.

 

딸이 죽고, 저 이전 1633년에 갈릴레오가 가택연금 당하면서, 글을 익명으로 쓰는겨 출판용으로. 그리고 에그몬드 베넨 으로 옮겨. 데카르트가 자기 책들을 대부분 저시절 네덜란드 20년 있을때 낸겨. 데카르트 이야기가 우트레흐트 대학에서 비난을 받는겨. 이 우트레흐트 란 곳은, 북쪽의 로마 카톨릭 대주교 중심자리야 중세 초기부터. 저때 헬레나랑 같이 헤이그를 떠나서 그 위 에그몬트비넨 으로 가서 여기서 1649년 까지 있던겨. 그리고 스위든 가서 죽은거고. 

 

데카르트 는 네덜란드 인간이여 이게. 

 

스피노자 는 데카르트 를 빼놓을수가 없어. 스피노자 는 데카르트 에 대한 반발이걸랑. 헌데 가만 디다보면, 둘이 같어 이건. 같다고 하믄 혼날라나. 

 

 Not by chance were the philosophical works of both Descartes and Spinoza developed in the cultural and intellectual background of the Dutch Republic in the 17th century.[28] Spinoza may have had access to a circle of friends who were unconventional in terms of social tradition, including members of the Collegiants.[29] One of the people he knew was Niels Stensen, a brilliant Danish student in Leiden;[30] others included Albert Burgh, with whom Spinoza is known to have corresponded.[31]  

 

데카르트 와 스피노자를 만든 네덜란드라는게 우연이 아니라는겨. 다양한 사람들의 상인들이 들어오고, 안트베르펜 함락으로 플랑드르 사람들이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으로 오고, 우트레흐트 유니온 1579년으로 유대인들도 오고, 여기서 수학 공학 의 최고가 되고 여기서 근대 철학이 시작한겨. 대표적 두 인간을 만들어내고. 

 

콜리지언트스. 네덜란드에서 1619년에 나온겨. 매달 첫 일요일날의 모임이고. 콜리지 칼리지 라는게 콜리그 라는 동료고, 콜레기움 이란 라틴어고, 콘 레고, 레고 라는게 내가 선택하다 야. 함께 서로 선택해서 만든 모임이 칼리지 라는 대학인거고. 불어 콜레쥬 하는거고. 아나뱁티스트들과 아르미니언들이 시작을 한겨. 먼가 색다른 생각들의 인간들이 저때 시작하고, 스피노자가 에띠카 를 1661-75년 15년간 쓰고 1677년에 죽어. 죽고서 나온게 에티카. 야. 라틴어로 나왔어. 저걸 시작할때 이삼년을 이 콜리지언트 로 참여한거로 봐. 이때부터 저분위기에서 쓰기시작한게 에티카.야. 

 

Spinoza had a traditional Jewish upbringing, attending the Keter Torah yeshiva of the Amsterdam Talmud Torah congregation headed by the learned and traditional senior Rabbi Saul Levi Morteira. His teachers also included the less traditional Rabbi Manasseh ben Israel, "a man of wide learning and secular interests, a friend of Vossius, Grotius, and Rembrandt".[37] While presumably a star pupil, and perhaps considered as a potential rabbi, Spinoza never reached the advanced study of the Torah in the upper levels of the curriculum.[34] Instead, at the age of 17, after the death of his elder brother, Isaac, he cut short his formal studies in order to begin working in the family importing business  

 

정통 유대인 학습을 받은거야 유대인이라. 정통 랍비 교장 사울 레비 모르테이라.가 있었고, 마나세 벤 이스라엘.이란 랍비도 선생이었는데, 이사람은, 폭넓게 배운이에 세속에도 흥미가 있고, 친구가 포시우스.에 그로셔스, 램브란트. 그로셔스 가 드비트 죽을때 같이 죽을뻔한 국제법 창시자고. 렘브란트 는 야경꾼 그린, 네덜란드 정체성 을 그린 최고의 화가고. 스피노자 아빠뻘이고 이들과 친구였던 랍비선생한테서 배우다. 스타 학생이었고, 랍비로 키우려 했었고, 그런데 17세에 큰형이 죽은겨. 1649년. 아빠 가업 수입업자 일을 이어야 해서 공부를 그만두다.

 

Spinoza's father, Miguel, died in 1654 when Spinoza was 21. He duly recited Kaddish, the Jewish prayer of mourning, for eleven months as required by Jewish law.[34] When his sister Rebekah disputed his inheritance seeking it for herself, on principle he sued her to seek a court judgment, he won the case, but then renounced claim to the court’s judgment in his favour and assigned his inheritance to her.[42]  

 

아빠가 1654년 죽어. 스피노자 햇수로 22세. 유대법에 의해 11개월동안 카디슈 기도문을 암송해. 누이가 재산상속으로 달라고 하고, 재판을 걸어서 이겨. 그러다 포기해 그래 너 지분 가져가라. 

 

Franciscus van den Enden (c. 5 February 1602 in Antwerp - 27 November 1674 in Paris)  

 

그리고 저 20대 에 아빠 죽으면서, 다시 공부를 하는겨. 이때 만난 선생이 프란키스쿠스 판 덴 에덴. 이야. 30세 많은데, 이사람은 데카르트빠에 무신론자야. 데카르트 는 무신론자가 아냐. 헌데 데카르트 빠가 되면 무신론자가 되는거지. 데카르트 는 파이널 코즈. 목적론을 부정해. 우주의 목적 이란건 없어. 이건 바닥에, 신이라는 절대자가 세속에 개입을 안한다는거야. 교회 지분이 사라지는겨 이건. 그렇다고 신을 믿지 말라고는 안했걸랑. 그러나 저걸 보는 이들은 신을 버리는거야. 

 

모든건 저놈의 판덴에덴. 때문에 발생하는건데. 

 

스피노자.는 학교의 랍비들이 정통 유대교 랍비에 세속에 관심많은 랍비에, 폭이 넓은겨 스피노자는. 아빠는 수입상이고. 장사꾼들이 가장 시야가 넓어. 만나는 인간의 폭이 넓으니 당연한겨. 장사를 해 장사를. 이념놀이에 찌든 애들이 가장 수준 이하의 애들이야. 그런 짓은 니 인생을 망가뜨려. 얍삽한 장사꾼이 되도록 해. 얍삽한것도 능력이야. 

 

Spinoza adopted the Latin name Benedictus de Spinoza,[43] began boarding with Van den Enden, and began teaching in his school.[42][39][40] Following an anecdote in an early biography by Johannes Colerus [de],[44] he is said to have fallen in love with his teacher's daughter, Clara, but she rejected him for a richer student. (This story has been discounted on the basis that Clara Maria van den Enden was born in 1643 and would have been no more than about 13 years old when Spinoza left Amsterdam.[45] In 1671 she married Dirck Kerckring.)  

 

스피노자.가 라틴어 이름을 고대로 만들고. 판덴에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겨 이십대에 아빠 죽고. 이때 스피노자가 저 판덴에덴.의 딸 클라라 한테 빠져. 그런데 클라라가 거절해, 더 부자 학생이 좋다며. 그런데 이 이야긴 신뢰도가 없다는거지. 클라라는 1643년생이고, 저때 13세였고. 스피노자는 24세였고, 이때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을 떠났다는거고. 저때가 1656년인데. 

 

클라라가 13세라 어리서 아니라는건, 에이, 저걸 현대식 관점으로 본 이야기야. 저런 사례가 있어. 노발리스 를 보면. 

 

Novalis (/nəˈvælɪs/; German: [noˈvaːlɪs]) was the pseudonym and pen name of Georg Philipp Friedrich Freiherr von Hardenberg (2 May 1772 – 25 March 1801)  

 

폰 하르덴베르크.의 펜네임 노발리스.

 

During the time he worked for August Coelestin Just, Novalis met the 12-year-old Sophie von Kühn (1782–1797), a girl who was, according to accounts, a "perfectly commonplace young girl, neither intelligent nor particularly beautiful."  

 

노발리스.가 1794년. 22세에 12세의 소피 를 만나. 이때 노발리스가 폭 빠져. 똑똑해서도 특별히 이뻐서도 아닌, 완벽하게 평범한 젊은 여인. 이라며. 13세살때 정혼을 해. 헌데 소피의 부모가 반대를 해. 결핵에 걸렸걸랑 소피가. 소피가 저 이후 15세에 죽어. 노발리스가 세상 다 잃은 비통함을 느끼고. 

 

Heinrich von Ofterdingen is a fabled, quasi-fictional Middle High German lyric poet and Minnesinger mentioned in the 13th century epic of the Sängerkrieg (minstrel contest) on the Wartburg. The legend was perpetuated by Novalis in his eponymous fragment novel written in 1800 and by E. T. A. Hoffmann in his 1818 novella Der Kampf der Sänge  

 

노발리스의 소설.이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이야. 오프터딩엔 의 하인리히. 라는 남자의 이야기 인데. 이게 가제가 블루 플라워 이고, 해서 푸른꽃.으로 번역이 되었어. 졸 재밌어. 미완성이지만. 머 저거도 자기 시학, 시란 무엇인가 라며 쓰고 당시 낭만주의 사상들을 가르치려해서 짜증  나지만. 읽어라 저런건 기본으로들.

 

이 무시칸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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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의 스피노자 뻥 찬 이야긴 가능한 이야기야. 찼을껴. 스피노자가 열  받은겨.  저 클라라 아빠가 데카르트 빠여. 데카르트 만 생각하면 부들부들 떠는겨. 데카르트를 믿으면 저딴 딸이 나오는겨 이거. 말세여 말세....라고 해석하면 안되지  스피노자형님을 유치하게 만들어도 분모가 있지.

 

During this period Spinoza also became acquainted with the Collegiants, an anti-clerical sect of Remonstrants with tendencies towards rationalism, and with the Mennonites who had existed for a century but were close to the Remonstrants.[26] Many of his friends belonged to dissident Christian groups which met regularly as discussion groups and which typically rejected the authority of established churches as well as traditional dogmas  

 

저때 칼리지언트들.과 알게 된듯 하고, 이십대 후반에. 여긴 레몬스트란트들 에 이성주의 경향이고, 메노나이트.들이야. 이들은 정통 그리스도 그룹과는 유리된 집단이고, 기존 교리들과 기존 교회들의 권위를 거부해. 

 

레몬스트란트.라는게, 올덴바르네벨트 처형할때 나온 이들이고, 칼뱅의 절대적 운명론에 반하는 아르미니언들이 자기들은 메몬스트란트 라며 나온거고. 대부분 홀란드 주.인거고. 메노나이트 란건 백년 전에 메노 시몬스.가 만든 네덜란드 아나뱁티스트.여. 이 네덜란드에 디어크 빌럼스 Dirk Willems 이전 썰한 탈출하다 얼음에 빠진 교도관 꺼내주고는 다시 잡혀 사형당한 아나뱁티스트의 상징 그림이고. 빌럼스 직전에 나온게 메노 시몬스야. 디어크 빌럼스는 1569년에 죽는거고. 아나뱁티스 란건, 취리히 츠빙글리 있을때 재침례해야 한다며 쫓겨난 이들이고. 이걸 메노 시몬스가 저짝 프리슬란트에서 받은겨. 

 

스피노자.는 유대교 믿는 유대인이여. 쟤들과 상관없는 사람인데 저런데를 간거야. 저 토론 논쟁에는 스피노자가 낄것이 없어 신학적으론. 저 레몬스트란트 는 정치성이 스미지만 저건 완벽한 교리 이야기야. 스피노자는 완전히 이방인이야 저 논쟁에선. 메노나이트 도 어 머 얘들은 이렇게 노나부다 하는거야. 대체 왜저런덴 낑겨서 놀았냐 이 스피노잔

 

Spinoza's break with the prevailing dogmas of Judaism, and particularly the insistence on non-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was not sudden; rather, it appears to have been the result of a lengthy internal struggle: "If anyone thinks my criticism [regarding the authorship of the Bible] is of too sweeping a nature and lacking sufficient foundation, I would ask him to undertake to show us in these narratives a definite plan such as might legitimately be imitated by historians in their chronicles... If he succeeds, I shall at once admit defeat, and he will be my mighty Apollo. For I confess that all my efforts over a long period have resulted in no such discovery. Indeed, I may add that I write nothing here that is not the fruit of lengthy reflection; and although I have been educated from boyhood in the accepted beliefs concerning Scripture, I have felt bound in the end to embrace the views I here express."[46]  

 

스피노자.가 쟤들 저리 노는거 보고, 유대교 는 대체 왜 저런 논쟁이 없는가. 라면서, 펜타투크(튜크). 타나크 야. 다섯개 책. 모세 5경. 가만, 이거 모세가 쓴거 맞아 이거? 아무리 내용을 디다봐도 논리적으로 모세가 이걸 썼을 수가 없는 부분이 태반인데. 

 

스피노자가 저 칼리지언트 가서, 저건 불교신자가 기독교신자들 성경공부하는데 낀 거 이상으로 기괴한거걸랑. 헌데 저기서 저런 이단 논쟁을 본거야. 그러면서 유대교 에 똑같은 문제제기를 한겨. 

 

Nevertheless, once branded as a heretic, Spinoza's clashes with authority became more pronounced. For example, questioned by two members of his synagogue, Spinoza apparently responded that God has a body and nothing in scripture says otherwise.[42] He was later attacked on the steps of the synagogue by a knife-wielding assailant shouting "Heretic!" He was apparently quite shaken by this attack and for years kept (and wore) his torn cloak, unmended, as a souvenir  

 

이게, 유대교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야 자기 유대교 유대인이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건. 그야말로 제대로 공식적으로 권리를 얻고 살게 된 곳에서, 이런 분위기도 처음인겨. 로마 에서는 외곽 구역에서 교황의 덕으로 걍 더부살이 신세 로 사는거고, 베네치아 가서도 게토 를 얻어서 눈치보며 살던거고. 게토 라는게 베네치아 에서 처음 나온 말이야. 이렇게 제대로 살아보긴 처음이야 유대인들이 로마 전쟁하고 쫓겨나서 1500년만인겨. 그럴수록 철저히 타나크 말대로 살아야 했던거고, 감히 남들 눈치보며 사는 이들이 무슨 저따위 교리 논쟁을 할 수가 있겄니. 무슬림 스페인때나 좀 편하게 살아볼때도 저런 논쟁을 했을라나. 그래도 그렇지. 타나크 중에 최고의 글인 가장 존엄한 토라 인 모세오경 을 모세가 안썼다니. 

 

난리가 나는겨 저건. 스피노자 는 유대교 인들에서 스타였어 어릴때. 랍비로 키울려 한 애였고. 헌데 애가 잠시 장사한다미 나갔다가 아빠죽고 애가 이상해져 버린겨. 그러면서 신 에 대해 문제제기 도 하는겨 이게. 신 은 몸을 갖고 있으며 그외는 아무것도 안써있다고 타나크에서 얘길 하지 않냐며. 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걸고 넘어가.

 

 

분노가 치미는겨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시나고그 계단에서 칼 테러도 당해. 칼을 휘두르면서 이 이단자! 히레틱! 

 

이걸로 확실히 충격을 받고, 그때 죽을 뻔했어. 외투만 칼질 당하고. 그 베어진 외투를 몇년간 수선않고 보관하다. 기념품인데, 잊지 않으려고, 멀 잊지 않으려는건진 몰라도. 

 

The business ran into serious financial difficulties, however, perhaps as a result of the First Anglo-Dutch War. In March 1656, Spinoza filed suit with the Amsterdam municipal authorities to be declared an orphan in order to escape his father's business debts and so that he could inherit his mother's estate (which at first was incorporated into his father's estate) without it being subject to his father's creditors.[47] In addition, after having made substantial contributions to the Talmud Torah synagogue in 1654 and 1655, he reduced his December 1655 contribution and his March 1656 pledge to nominal amounts (and the March 1656 pledge was never paid).[48][39]  

 

저때 1654년 22세때 아빠 죽고, 경제적으로도 맛이 갔고. 아마 장사할 수완이 없는겨 얜. 스피노자의 일생을 보면  도덕적인 듯 보이걸랑. 이런 인간은 사업이든 장사든 영업이든 못해. 걍 책만 파는게 나아. 정의놀이하면서. 저때가 1차 잉글랜드 전쟁끝난 후이고, 이건 크롬웰이 헤이그 까지 와서 전쟁한거걸랑. 이건 잉글랜드 승이야. 이때 피해를 봤다는거지. 이때 파산 선언을 한겨. 아빠 사업이 빚이 되서 상속 안 받기로 한거야. 그래서 채무에서 벗어나고. 저게 1656년 24세 즈음이고. 

 

저때 쫓겨난겨. 저럴때 거지 신세가 된 상태에서, 모세오경 저작권 문제에 신의 정체성 문제제기를 한겨. 아 정말 답없다 스피노자 

 

On 27 July 1656, the Talmud Torah congregation of Amsterdam issued a writ of cherem (Hebrew: חרם, a kind of ban, shunning, ostracism, expulsion, or excommunication) against the 23-year-old Spinoza.[42] The following document translates the official record of the censur

 

1656년.에 암스테르담 유대인 사회에서 23세짜리 스피노자를 추방을 한겨. 다큐먼트를 만들고. 

 

저때 클라라 에게 고백을 한거야. 참 가지가지한다 진짜. 클라라가 당연히 저 거지된 인간에 유대교 에서도 내팽겨친 오빠를 13세 짜리가 좋아하겄냐 . 

 

이게, 이 분노가 데카르트 한테 가는겨 이게. 저 판덴엔덴이랑 저 딸 클라라. 저 데카르트 빠인 저 선생의 딸.년이 감히 나를 딱지를 논냐고. 저건 데카르트 때문이야. 라면  그게 말이되냐고 말이 아무리 스피노자 를 찐따 취급하려해도 그렇지. 이런 말 하면 안되는겨 진짜. 

 

여하튼 그래서, 쫓겨나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는. 

 

아 힘들오. 이거 다 오늘 타이핑질 할랬더만. 안되네 이게. 

 

 

His statue in Amster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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