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Monck, 1st Duke of Albemarle, KG (6 December 1608 – 3 January 1670) was an English soldier and politician, and a key figure in the Restoration of the monarchy to King Charles II in 1660.
조지 몽크, 앨버말 공작, 찰스2세가 준 자리야. 앨버말.이 Aumale 오말 이라는, 노르망디 오른쪽 생마르팀 에 있는 곳이고, 원래 윌리엄 노르망디 땅이었다가 뺏긴거고 잉글랜드는 이름을 취하면서 저 땅을 갖고 오려는거고, 여기 의 공작 자리로 임명한겨. 이전에 지워진 타이틀을 찰스2세가 다시 만들어 준거고, 조지몽크 의 아들이 죽고 이 자린 지워져.
브리튼 역사에서 가장 저평가된 사람이고, 해서 대부분 모르고, 혁명에 떠는 인간들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이 된거고, 애들에겐 배신 배반 변절의 아이콘 이고.
조지몽크 는 브리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탑텐 안에 넣어야지.
아빠 에 대한 복수를 위해 부시장급을 공격하고는 바로 대륙으로 가서 용병을 하면서 지낸거야, 이게 십대 후반이야. 잉글랜드에서 도망나와서 대륙 네덜란드 독립전쟁때 용병으로 먹고 산겨 보믄. 그러다 좀 두각을 나타내지만 저긴 네덜란드 애들이걸랑, 십여년 저기서 전쟁하다가, 네덜란드 텃세에 밀려서 돌아오고 바로 아일랜드 반란 터지고 이때부터 기웃대는겨. 초기엔 찰스1세 의 중대장급 이었다가, 팔리어먼트 에 잡혀서 런던탑에서 지내다가, 팔리어먼트로 돌아서고, 그리곤 크롬웰 시대를 지내다가, 찰스2세 를 올린거야.
1608년 생이야. 내전 시작할때 갓 30이 넘은겨. 집안도 별거 없고. 엄마 집안이 누이들 시집으로 이름이 난거고.
Monck was born on 6 December 1608 at the family estate of Potheridge[2] in the parish of Merton, near Great Torrington, Devon, the second son of Sir Thomas Monck (1570–1627) one of the Members of Parliament for Camelford in 1626, a member of a landed gentry family of ancient origins but then-straitened financial circumstances.[3] Sir Thomas's wife and George's mother was Elizabeth Smith, a daughter by his first marriage of Sir George Smith (d. 1619) of Madworthy, near Exeter,[4] Devon, a merchant who served as a Member for Exeter in 1604, was three times Mayor of Exeter and the City of Exeter's richest citizen, being lord of 25 surrounding manors.[5] Elizabeth's sister Grace Smith was the wife of Sir Bevil Grenville[6] (1596–1643), of Bideford in Devon and Stowe, Kilkhampton in Cornwall, the Royalist soldier killed in action during the Civil War in heroic circumstances at the Battle of Lansdowne in 1643. Sir Bevil's son and heir, and thus George Monck's first cousin, was John Grenville, 1st Earl of Bath (1628–1701), a fellow supporter of the Restoration, whose elevation to the peerage was largely due to Monck's influence.[7]
데본.의 머튼 태생이야. 머튼은 데본 의 북쪽 이고. 아빠가 토마스 몽크 인데, 캐럴포드 의 하원이 된게 1626년 이야. 그리고 다음해 죽은겨, 조지몽크 18세 때에. 캐멀포드 는 왼쪽 콘월 이고, 저기 하원 이라지만, 이 캐멀포드 는 rotten, pocket 라튼 하원, 포켓 하원 이라고 해. 라튼이 썪은겨 이게. 걍 떨거지급 선거구 인겨. 깡촌 시골마을의 의원이고.
Sir 써 라고 앞에 어드레스 아너 스타일 을 부치지만, 배론 밑에 배로넷. 아래 나이트. 모두 앞에 썰 썰 하는겨. 기사 나이트 는 썰 이야. 이게 별게 없어 타이틀이. 실속을 봐야해. 걍 시골 떨거지 의원이야. 아빠가 결혼때메 마누라 의 다우리로 재수좋게 재산을 그나마 갖은겨. 조지몽크의 엄마가, 엑시터 의 의원 이었던 상인 집안이고, 엑시터 시장을 세번한 집안이고, 이 엑시터 가 고대 로마때 왼쪽 경계의 로마 도시여. 부유한 도시여 여긴 데본에서. 엄마집안이 저기서 잘나가는 집안인겨. 아빠가 결혼을 잘해서, 이 힘으로 작위 를 받고, 하원이 된겨 이게.
조지몽크의 이모,가 베빌 그렌빌 의 부인인데 나중 1643년 잉글랜드 내전 랜즈다운 전투에서 죽은, 카발리에 의 영웅이고, 이 베빌 그렌빌의 자식들도 찰스파여. 나중에 조지몽크 가 다시 찰스파로 돌아서는 영향 받는게 저 이모의 집안들이고 이들과 왕정 복고 하는겨. 원래 엄마 때문에 집안이 아빠부터 시작한거고, 엄마쪽은 찰스파였고, 그래서 이사람도 찰스였다가,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온겨 크롬웰 뒈지고.
Having assaulted the Under Sheriff of the county in revenge for a wrong done to his father, Monck was forced to go abroad.[3] Becoming a soldier, he served as a volunteer in the 1626 expedition to Cadiz,[3] and the next year fought well at the siege of the Île de Ré (an abortive attempt to aid French Protestants in the City of La Rochelle).[3][8]
In 1629 Monck went to the Netherlands, then a theatre of warfare, and there he gained a high reputation as a leader and as a disciplinarian. He fought bravely at the 1637 Siege of Breda, always first in the breach of his men. In 1638 he surrendered his commission in consequence of a quarrel with the civil authorities of Dordrecht and returned to England.[3] He was appointed to the lieutenant-colonelcy of the Earl of Newport's regiment.[3]
18세에 아빠가 죽었는데, 저 카운티의 셰리프 대리 에게 당했나봐 아빠가, 아빠 죽고 바로 복수를 했는데, 걍 머 실패한듯 한데. 그리고 도망을 가. 이게 18세야 1626년. 그리고 카디스 전투 스페인 치러가는데 갔다가, 라로셸 전투 때도 포위전에 참여하고, 그리곤 1629년 21세에 네덜란드로 가서, 본격적인 전쟁을 하는겨 용병으로. 브레다 전투 1637년. 29세. 이때는 커널 급인 중대장급 정도된겨. 저 브레다 가 1624-25년 때, 낫사우 모리스 가 헤이그에서 죽고, 브레다를 바로 넘겨주고 떠나 네덜란드가. 이걸 12년 만에 네덜란드가 갖고 온겨 이 전투에서. 이 브레다 가 북 브라반트의 핵심도시고, 낫사우 코트였고, 전략적 요충지여. 이후 안뺏겨. 여기서 조지몽크가 공을 세우고. 1638년에 도르드레흐트 도시 주도권으로 네덜란드애들과 싸우다가, 밀린겨 조지몽크가. 이사람은 걍 용병의 한개 부대 이끌 뿐이고 저기서 십년 되면서. 30세 에 돌아오는겨 저긴 자기가 설 곳이 없어. 그리고, 뉴포트 백작의 부대에 커널 대표가 된겨. 전쟁 경험 을 저기서 활용하는거고 뉴포트 백작이. 여긴 와이트섬, 찰스 나중에 도망가려다가 감금되는 섬 지역이고. 걍 저기서 바다 해적 지키는 사람이야.
During the operations on the Scottish border in the Bishops' Wars (1639–1640) he showed his skill and coolness in the dispositions by which he saved the English artillery at the Battle of Newburn (1640).[3]
At the outbreak of the Irish rebellion (1641) Monck was appointed as colonel of Sidney's Regiment under the command of James Butler, 1st Duke of Ormonde. All the qualities for which he was noted through life — his talent for making himself indispensable, his imperturbable temper and his impenetrable secrecy — were fully displayed in this post. The governorship of Dublin stood vacant, and Lord Leicester recommended Monck
그러다가 바로 비숍전쟁이 터졌어. 스콧 접경 뉴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대패하는데 여기서 포병부대를 건져 이사람이 이 와중에. 그리고 바로 아일랜드 반란이 다음해 10월에 터져서, 오르몬드 버틀러 아래의 시드니 백작의 커널.로 지명이 돼. 중대장 대대장 급이야. 아일랜드 반란 다음 해에, 찰스1세가 1월에 런던을 떠나는거야. 즉 저때는 아직 찰스1세 가 어쨌거나 킹 자리에 있어. 아일랜드는 저런 상태에서 우린 찰스 지지한다면서 반란을 한겨 저게. 찰스 입장은 어쨌거나 저걸 진압해야하는거고. 반란군이 무슨말을 못하겠으며.
Robert Sidney, 2nd Earl of Leicester (1 December 1595 – 2 November 1677) was an English diplomat and politician who sat in the House of Commons between 1614 and 1625 and then succeeded to the peerage as Earl of Leicester.
찰스1세가, 스트랫포드 백작의 처형을 싸인해. 아일랜드 대리였어. 이 아일랜드 대리에 임명되는게 다음 로버트 시드니.야. 레스터 백작. 이사람은 하원이고, 하원 추천해서 이걸 찰스가 받은거고, 어쨌거나 시드니는 그래서 킹의 아일랜드 대리 로 임명이 되고, 이때 군수권 을 조지몽크 로 임명을 한겨. 헌데, 이걸 찰스1세가 취소하고, 자기가 총애하는 램버트 를 지명해. 조지몽크 가 기분이 나쁘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물러나는겨. 로버트 시드니는 아일랜드를 간 적이 없어.
저때 잠시 조지몽크 가 있으면서, 능력자임을 보여주고, 조용 침착한 성격에, 입이 무겁다 며 인상을 남긴겨 아일랜드 저때 있으면서. 저때 얼스터 번란이고, 더블린 에서 걍 지켰던겨 조지몽크는.
Charles I overruled the appointment in favour of Lord Cavan, and Monck relinquished the appointment without ado. The Duke of Ormonde viewed him with suspicion as one of two officers who refused to take the oath to support the Royalist cause in England and sent him under guard to Bristol.[3]
Monck justified himself to Charles I in person, and his astute criticisms of the conduct of the Irish war impressed the King, who gave him a command in the army brought over from Ireland during the Civil War.[3] Taken prisoner by the Parliamentary Northern Association Army under Lord Fairfax at the Battle of Nantwich in January 1644, he spent the next two years in the Tower of London.[3] During his imprisonment he wrote Observations on Military and Political Affairs.[3]
조지몽크.가 캐반 백작 램버트 에 뺏기고, 이때 찰스1세 한테 반감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찰스는, 캐반 백작 램버트 가 좋다고 해서리 취소 재임명 해서 욕할테지만, 찰스입장에선, 로버트 시드니 는 의회가 임명한거고, 못믿는겨 의회의 애들을, 저 아일랜드는 중요해 이 찰스 입장에선. 그래서 자기 사람을 아일랜드 군수권에 심을 뿐인겨, 로버트 시드니 짜를 힘은 없고.
조지몽크는 찰스에 기분 나쁘지만, 저때 내전 터진 상황에서, 1643년에 아일랜드 떠나 아무 문제 안 일으키고. 오르몬드 버틀러가 저런 몽크 를 의심해. 사람이 말도 없고, 쎄한겨. 저거 못믿을 인간이여. 의심을 하고 주작소설 지혼자 쓰면서. 이때 조지몽크 가 아일랜드에서 오르몬드 랑 같이 있었으면, 역사가 또 어드래 될지 몰라. 오르몬드 도 얘 하는 짓 보면 갈팡질팡이고. 하튼 이 버틀러 들 문제여 이게. 물론 아일랜드 입장에선 독립의 종조님들이 버틀러들이지만. 역사 평가란게 참 코메디야.
그리고 조지몽크 는 일개 부대 이끌면서 잉글랜드 내전 터진거에 킹 파로 참전하는겨. 이사람이 의회 애들 밑에서 아일랜드 다녀오고, 입장이 어중간 해진겨 이게. 킹도 의회도 조지몽크를 못믿는거고. 저런때는, 참 골치아프걸랑. 입장을 확실히 해야해.
킹쪽 애들이 제대로 인간을 못쓰는거야. 좋은 말로는 못믿어워서. 낸트위키 전투 1644년 1월.에 조지몽크 도 여기 짝은 부대장으로 참전하고, 여기서 대패하고 조지몽크가 포로가 되서 2년을 런던탑에 갇히고, 이사이에 상황은 역전되서 의회파가 권력 잡은거고, 찰스는 스콧에 포로가 된 상태여. 조지몽크는 런던탑에서 책을 쓰는겨. 얘들은 수감생활할때 책을 써. 군사적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개인적 입장들.
Monck's experience in Ireland led to his release. He was made major general in the army sent by Parliament against Irish rebels.[3] Making a distinction (like other soldiers of the time) between fighting the Irish and taking arms against the king, he accepted the offer and swore loyalty to the Parliamentary cause.[3] He made little headway against the Irish led by Owen Roe O'Neill and concluded an armistice (called then a "convention") with the rebel leaders upon terms which he knew the Parliament would not ratify. The convention was a military expedient to deal with a military necessity. When in February 1649 Scotland proclaimed Charles, Prince of Wales, as Charles II, King of Scotland, the Protestant Ulster Scots settlers did the same and following Charles's lead took 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9] Most of Monck's army went over to the Royalist cause, placing themselves under the command of Hugh Montgomery, 1st Earl of Mount Alexander.[10]
찰스는 포로가 되고, 스콧에서 잉글랜드로 이첩되고, 이 상황에서 아일랜드는 여전히 해결이 안돼. 의회에서, 몽크 가 아일랜드 있던 경험을 알고 석방해서 부대 하나를 맡기는겨. 몽크가 이때 팔리어먼트에 충성하기로 하고 이 제안을 받아. 그런데 오웬 오닐.과의 전쟁에서 진도가 잘 안나가고 오히려 오웬 오닐.과 휴전을 하는거야. 이걸 의회는 비준을 안하고. 그러면서 몽크는 오히려 오닐 에게 병참을 대주면서 회유를 하는겨 오닐을. 그러다 오닐이 성에서 죽은거고. 오닐은 이 오닐이란 이름이, 몽크와 손을 못잡어 이게 하고 싶어도. 독살 당했을 수도 있어 이런 오닐을 보고 못 참는 아이리쉬한테서. 그리고 찰스1세 처형 당하고, 스콧이 찰스로 돌아서서 찰스2세를 자기들 킹으로 선언하고, 얼스터의 스콧들도 찰스2세 지지하고, 찰스2세가 옛 적이었던 커버넌트의 리더가 된겨 갑자기.
몽크의 부대원들도 울컥 열받으면서, 찰스파로 돌아선거야, 몽크에서 나와서 당시 얼스터에 있던 아이리쉬 사령관 휴 몬트고메리.로 가서 이들이 나중 크롬웰 원정군과 싸우는겨. 휴 몬트고메리 는 크롬웰에 항복해서 홀란드 로 피신했다가 찰스2세 복위되고서 마운트 알렉산더 백작 이 되는거고.
Although Parliament disavowed the terms of the truce, no blame was attached to Monck's recognition of military necessity.[3] He next fought at Oliver Cromwell's side in Scotland at the 1650 Battle of Dunbar, a resounding Roundhead victory.[3] Made commander-in-chief in Scotland by Cromwell, Monck completed the subjugation of the country.[3] After his forces stormed the town of Dundee, he lost control of his men with the resulting murder and rape of the population.[11] The streets of the town were reputed to run red with blood for days and Monck eventually was sickened by the barbarity when he saw the corpse of a suckling mother with her baby still feeding.[12] In February 1652 Monck left Scotland to recover his broken health at Bath, and in November of the same year he became a General at Sea in the First Anglo-Dutch War.[3]
의회는 몽크의 휴전협정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더이상 머라고 안하고, 크롬웰 편에서 던바 전투 1650년 스콧에서 대승하고 여기서 인정받고 크롬웰 한테. 이후 스콧 던디 마을을 약탈하는데 자기 부대를 통제 못해서 살인에 강간질을 해대고 잉글랜드 애들이.
던디 거리들은 며칠간 피로 벌겋게 되었고, 몽크는 그 야만에 병이 들었다, 그때 그는 다 죽어가는 엄마가 자기 아기에 젖물리는 걸 봤다.
1652년 2월에 스콧을 떠나서 서머싯의 배뜨.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11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해군의 부대장이 되었다.
On his return to shore Monck married Anne Radford (née Clarges).[3] In 1653 he was nominated one of the representatives for Devon in Barebone's Parliament.[13] He returned to Scotland, methodically beating down a Royalist insurrection in the Highlands. At Cromwell's request, Monck remained in Scotland as governor.[3]
In 1654, the timely discovery of a plot fomented by Robert Overton, his second in command, gave Monck an excuse for purging his army of all dissident religious elements, then called "enthusiasts", deemed "dangerous" to the Cromwell regime.
돌아와서 결혼을 해. 1653년. 1608년생이니 45세. 베어본즈 의회에서 데본의 대표가 되고. 이 1653년 12월에 크롬웰이 로어드 프로텍터 라는 호국경이 되는거고. 이 로어드 프로텍터 는 원래부터 있던 타이틀이야. 대게 킹이 어려서 섭정하는 대행 자리로 쓴 타이틀 일 뿐이여. 그러면서 저 베어본즈 의회.도 해산을 시킨거고. 몽크는 스콧으로 가서 고지대의 킹파들을 진압하고, 크롬웰의 요구로 스콧에 남아서 거버너.를 해. 스콧 의 대리가 된겨 크롬웰의. 그리고 몽크가 자기 아래 의 로버트 오버튼.의 반역음모를 알게 되고는 체포해서, 런던타워로 보내고, 크롬웰은 몽크에게 위험한 열혈파들을 부대에서 색출하라고 해.
크롬웰.은 몽크랑 아일랜드 원정하러 와서 알게 된거고. 마음에 들어서, 아일랜드를 사위 이어튼 에게 맡기고, 몽크 를 데리고 스콧에 간겨. 던바 전투 가 스콧 가서 져야 할 전쟁을 이긴거걸랑. 이때 몽크가 힘이 된거고. 몽크를 스콧에 맡긴겨 크롬웰이. 그러다, 크롬웰이 자기 사람을 몽크 바로 밑에 심은건데 혹시나 하곤, 웃긴건, 자기가 심었던 저 로버트 오버튼 이 오히려 배신을 한겨 크롬웰을. 몽크를 죽이고 저 스콧 부대로 크롬웰을 치려던겨 앤.
Major-General Robert Overton (about 1609–1678) was a prominent English soldier and scholar, who supported the Parliamentary cause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and was imprisoned a number of times during the Protectorate and the English Restoration for his strong republican views
로버트 오버튼. 크롬웰.의 뉴모델 아미의 최측근중 한명이여. 의회 숙청에 적극적이고, 찰스1세 처형때도 적극적이고, 크롬웰에 충성충이었던 인간이, 크롬웰이 저거 결국 독재자였네 하면서 스콧에 몽크 다음으로 임명되고 가서 몽크를 죽이려고 한겨.
얜 아미 카운슬 이라는 군사위원회 위원이고, 그란디즈 라는 다수파로 레벨러들에 반대한 애고. 퍼트니 논쟁때도 크롬웰 편에서 참여한 인간이고. 완전히 크롬웰의 오른팔이여 얜.
He hailed Cromwell's dissolution of the Rump Parliament in June 1653, yet subsequently became disenchanted, suspicious of Cromwell as more dictator than Lord Protector. Although his letters to Cromwell remained cordial,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Protectorate he seems to have become more inclined to distance himself from the Lord Protector, advising a diminution with the speed of reform. Cromwell informed him that he could keep his position in the army so long as he promised to relinquish his office when he could no longer support the policies of the Protectorate.
크롬웰이 찌꺼기 의회를 해산하는걸 환영했다. 헌데 아 아니구나, 이 인간이 독재자 하려는 구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다, 크롬웰에 보낸 편지로는 충성충이었으나 이미 호국경시절 초반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것 같다. 크롬웰의 지지부진에 개혁속도를 내달라는 조언을 하는거 보면. 크롬웰은 오버튼에게 통보를 했다, 오버튼아, 너 내 정책에 지지할 수 없을때는 니 자리를 내놓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그때까진 군대에서 니 자리를 보장하마.
먼 개소리여 저게. 헌데 쟤들은 저런 프라미스.에 여전히 의미를 두던 시절이니 그런 맥락으로 이해를 해.
저 통보를 듣고 몽크를 죽이고 그 부대로 크롬웰 치러 내려오려던거야.
나중에 크롬웰 이 죽고, 아들이 이어받고, 불안한거야 얘들이. 이때 저 감금된 오버튼.을 석방을 시켜. 전쟁의 용사걸랑. 오버튼.은 어쨌거나 찰스들은 반대고. 나중에 찰스 복위되고, 얘 처리가 애매한겨. 감금하다가 풀어줘.
In 1655 Monck received a letter from the future Charles II, a copy of which he at once sent to the Lord Protector Oliver Cromwell, who is said to have written to Monck in 1657: "There be [those] that tell me that there is a certain cunning fellow in Scotland called George Monck, who is said to lye in wait there to introduce Charles Stuart; I pray you, use your diligence to apprehend him, and send him up to me." Monck's personal relations with Cromwell were those of sincere friendship on both sides
오버튼 의 반란음모를 적발해서 잡아 보내고, 몽크가 찰스2세한테 편지를 하나 받는데. 찰스는 이미 떨거지 신세가 된거고. 앤 네덜란드 코트에서도 눈치밥 먹고, 프랑스 코트에서도 쫓겨났어. 스페인 플랑드르 밖에 기댈곳이 없는거고.
카피본인데, 찰스2세가 몽크한테 보낸 편지를, 이걸 카피해서 몽크가 크롬웰에게 보내. 크롬웰이 1657년 몽크에 쓴 편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스콧에 조지 몽크라는 사기꾼이 있다며, 이 인간이 기다리다가 찰스2세 를 데려와서 어찌할거라며. 내 몽크 당신에게 빌건데, 당신의 능력으로 그를 좀 잡아서 나한테 좀 보내.
몽크와 크롬웰의 개인적 관계는 서로 찐한 우정의 사이였다.
Soldier though Monck was, he had played the difficult game of politics in a fluid and uncertain situation. That he was victor sine sanguine, i.e., "without blood", as the preamble of his patent of nobility stated, was generally applauded as the greatest service of all, especially after the Civil Wars.[15]
몽크는 군인 이었지만, 그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쉽지 않은 정치게임을 했다. 그를 부르는 짧은 호칭은 '피가 없는' 승리자 였다. 이건 일반적으로, 특히나 내전 이후에 가장 위대한 공직을 한 것으로 찬사되었다.
During the confusion which followed Oliver Cromwell's death on 3 September 1658
크롬웰이 1658년 9월 3일에 죽어. 몽크는 에딘버러 있는거고. 크롬웰 아들을 지지하려 했는데, 얘가 무능해. 찰스2세쪽에서 오퍼가 와 몽크의 동생을 통해서, 보내 넌 교회나 신경쓰라며.
George Booth, 1st Baron Delamer (August 1622 – 8 August 1684), was an English parliamentarian who successfully navigated the English Civil War. He was styled Sir George Booth, 2nd Bt, from 1652 to 1661, until his elevation to the House of Lords as an English peer.
델러머 배론, 조지 부뜨. 몽크보다 13세 어려. 이사람은 집안이 의회파여. 롱 팔리어먼트 의원이고, 배어본즈 의원이고, 호국경 의회 의원 이었어. 의회파 인데, 마음은 킹 을 지지하는겨 크롬웰을 지내면서. 찰스2세가 여기에 콘택하고, 이사람이 몽크를 만나. 의회생활하면서 안면을 튼 사이로 보이고. 그리곤 체셔에서 반란하다가 의회파에 패해. 이 소식에 몽크가 움직여.
The Committee of Safety, established by the Parliamentarians in July 1642, was the first of a number of successive committees set up to oversee the English Civil War against King Charles I, and the Interregnum.
크롬웰이 죽고, 급박한겨. 군대여 군대 문제는. 누가 군대를 쥐느냐. 뉴모델아미를. 원래 위원회가 카운슬 오브 스테이트.야. 이름뿐이 된거고. 다시 만들어 이전의 커미티 오브 세이프티. 안전보장회의.체제여. 얘들이 주도해. 이게 2주 운영이 되고, 다시 카운슬 오브 스테이트 로 바꾸고. 이게 크롬웰 다음 체제인겨. 뉴모델아미 를 다스리는.
John Lambert (Autumn 1619 – March 1684) was an English Parliamentary general and politician. He fought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and then in Oliver Cromwell's Scottish campaign (1650–51), becoming thereafter active in civilian politics until his dismissal by Cromwell in 1657. During this time he wrote the Instrument of Government, one of only two codified constitutions ever adopted in Britain, and was influential in bringing about the Protectorate.
Charles Fleetwood (c. 1618 – 4 October 1692) was an English Parliamentarian soldier and politician, Lord Deputy of Ireland in 1652–1655, where he enforced the Cromwellian Settlement
여기 두 축이. 존 램버트.와 찰스 플릿우드.야. 얘들은 크롬웰을 이어 가려는겨. 찰스 싫어. 크롬웰 체제를 만든 애들이고. 부뜨.도 존 램버트 에 패해서, 포로가 되고, 변장하고 도망가다가 다시 잡히고.
Richard Cromwell, the third (and eldest surviving) son of Oliver Cromwell, was appointed Lord Protector after his father's death. He called the Third Protectorate Parliament in 1659.[11] Along with the Army, it was unable to form a stable government. After seven months, the Army removed Cromwell; on 6 May 1659, it reinstalled the Rump Parliament. The Rump Parliament issued a declaration establishing a "Commonwealth without a king, single person, or house of lords"
크롬웰 아들 리차드.가 호국경으로 임명이 되고, 세번째 호국의회.를 소집해 1659년.에. 7개월 지나서 뉴모델아미.가 얘를 내려. 사임하고. 1659년 5월 6일. 그리고나서 뉴모델아미.가 세운게 또다른 럼프 팔리어먼트.야. 그래서 영국사에서 이 찌꺼기 의회인 럼프.는 두번 열린겨. 얘들이 선언해, 카먼웰뜨 인데, 하나의 킹도, 한사람도 아니고, 상원들도 아닌 카먼웰뜨.라고.
이전 독재자 크롬웰 체제도 거부하고. 상원들도 거부하고.
머하자는겨 그럼.
The last Committee of Safety was set up on 26 October 1659 by the high command of the New Model Army just before the Restoration. It was set up in response to the Rump Parliament which the day before tried to place the commander of the army Charles Fleetwood as chief of a military council under the authority of the speaker.
커미티 오브 세이프티.가 1659년 10월에 생긴거고. 럼프 팔리어먼트 는 이전 5월 이고. 뉴모델아미.가 크롬웰 아들을 내리고 이걸 세워서, 찌꺼기 의회.의 군대가 되는거지만 얘들이 실세인거고. 이게 바로 다시 카운슬 오브 스테이트.로 이름을 바꾸고. 하원의장 다음이라지만,
When Charles Fleetwood and General John Lambert declared against the Parliament, Monck not only refused to join them but on 20 October 1659 took measures to actively oppose them. Securing his hold on Scotland by a small but trusty corps of occupation, he crossed the border with the rest of his army.[3]
찰스 플릿우드.와 존 램버트.가 의회에 반대하는건 크롬웰 아들의 의회인거고. 몽크는 저 둘에 가담하는걸 거절해, 그리고 10월 20일에 오히려 저 둘에 반대하기 위해서 액션에 들어가. 스콧은 최소한 부대를 주둔하고 나머지 군대갖고 내려가는겨.
존 램버트.는 위의 캐반백작 램버트 와 달라. 캐반백작은 램바트.여 굳이 정확히 쓰자면.
저 와중에, 쟤들이 자기들만의 찌꺼기 의회만들고, 안전보장회의체 만들고.
몽크는 원래부터 쟤들과 먼가 사이가 안좋았던거지. 못믿을만한 인간으로 여겼거나.
이사람은 가만보면, 행동파지, 말을 안하는 스타일이야. 묵직해. 어릴때 바닥바닥에서 혼자 용병으로 전쟁하면서 전쟁속에서 네덜란드에서 중대장 이상을 한겨 아무런 빽없이.
Holding Lambert in play without fighting until his army began to melt away for want of pay, Monck received the commission of commander-in-chief of the Parliamentary forces on 24 November 1659. The navy, some of the English garrisons and the army in Ireland declared for the Rump Parliament (against Fleetwood, Lambert and the other members of the Wallingford House party). Monck led his army south from Scotland towards London, crossing the River Tweed on 2 January 1660.
헌데, 갑자기 뉴모델아미.에 돈지급이 되는 시스템이 아니게 된겨 이게. 램버트가 돈을 지급못해, 부대원들이 흩어져. 돈 문제에 더해서, 애들이 눈치를 깐겨 이건. 그동안 헤쳐먹은거고 부대원들이, 램버트 꼬라지가 애가 별론거고, 도망가는겨 애들이 먼저. 몽크는 의회에서 총 사령관직을 받아 저 찌꺼기 의회 소집 한달 후에.
플릿우드 와 램버트 가 세운 의회.인데, 이 의회가, 오히려 몽크 를 추대하는겨 ㅋㅋㅋ. 잉글랜드 주둔병들과 아일랜드 주둔군도 이 의회를 지지선언 하고. 즉, 플릿우드, 램버트, 기타 저 안전보장회의 체제 애들을 거부하는겨 이게. 쟤들 중심이 월링포드 집 당.이고. 몽크 가 1660년 1월 2일.에 트위드 강 을 건너. 스콧과 잉글리의 경계여. 루비콘 강을 건너는겨.
Monck's army was inferior in number, but in all other respects superior to Lambert's, and Monck slowly marched on to London, disbanding or taking over on his way the detachments of Lambert's army which he met, and entered the capital on 3 February 1660
몽크의 군대는 숫자상 열세야. 헌데 램버트 군대보다 모든면에서 우위고, 몽크는 천천히 런던으로 가고, 가다가 만나는 램버트의 군대를 해산시키거나 진압하고. 한달 후 2월 3일에 런던에 들어오다.
In all this his ultimate purpose remained opaque. At one moment he secretly encouraged the demands of the Royalist City of London, at another he urged submission to the existing parliament, then again he refused to swear an oath abjuring the House of Stuart and further he hinted to the Rump of the Long Parliament the urgent necessity of a dissolution.[16]
모든면에서 몽크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깜깜했다. 아무도 모르다. 그는 비밀리에 시티오브런던.의 왕정파의 요구를 복돋우다, 그러면서 어떤때는 지금의 의회에 복종하라고 재촉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스튜어트 왕가 가문을 무시하라는 맹세하기는 거절했다. 더 가서, 의회는 긴급히 해산될 필요가 있다고 비췄다.
Monck allowed Presbyterian members, "secluded" in Pride's Purge of 1648, to re-enter Parliament on 21 February 1660 while at the same time breaking up, as a matter affecting discipline, the political factions that had formed in his own regiments. He was now master of the situation. The reconstituted Long Parliament dissolved itself on 16 March 1660 after preparing legislation for a new Convention Parliament to be summoned.[17]
몽크는 1648년 찌꺼기 의회 만들면서 의원들 숙청하는 프라이드 숙청때 프레스비테리언 들을 격리하게 해놓고는, 1660년 2월 21일때는 반대로 의회에 참여하게 했다. 동시에 자기 부대에서는 저들이 정치적 파당을 일으킨다면서 해산시켜좋고는. 그는 그 상황에서 주재자였다. 새로 구성된 롱 팔리어먼트.는 3월 16일에 자진 해산하고, 콘벤션 팔리어먼트 를 위한 법안을 만들다.
Monck was elected Member of Parliament for both Devon and Cambridge University in the Convention Parliament of 1660.[13]
몽크는 1660년 콘벤션 팔리어먼트.에서 데본과 케임브르지 대학의 의원으로 선출되다.
Monck himself, in communication with Charles II, accepted the latter's Declaration of Breda of 4 April 1660, which was largely based on Monck's recommendations. It offered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Charles promised a general pardon for crimes committed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and the Interregnum for all those who recognised Charles as the lawful king (except for those who had killed his father); the retention by the current owners of property purchased during the same period; religious toleration; and the payment of pay arrears to members of the army, and that the army would be recommissioned into service under the Crown.[18]
몽크 자신은, 찰스2세와 교류중이었고, 1660년 4월 4일에 브레다 선언을 받아들이다. 그건 몽크의 추천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건 화해와 용서를 담았고, 찰스는 내전과 이후 무정부 시기동난 벌어진 범죄들에 대해 폭넓은 사면을 약속했다, 찰스를 적법한 킹으로 인정한 모두에게. 그러나 그의 아빠를 살해한 사람들은 제외 되었다 사면에서.
더하여, 그 기간동안 재산형성한 현재의 사적보유 재산자들에 대한 인정, 종교적 관용, 군대 병사들에 약속된 보상 지급. 군대는 왕정의 체제에 다시 신임될 것이라는 것.
을 약속했다.
Monck entirely concurred with the disbandment of the New Model Army, although the regiment of which he was Colonel, given the name Coldstream Guards after his death,[19] survives un-amalgamated to this day.[15]
On 1 May the newly convened Convention Parliament formally invited Charles, as King Charles II, to be the English king in what has become known as the Restoration.[3][15]
몽크는 뉴모델아미 의 해산을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진행했다. 비록 자기도 거기의 장이었지만. 몽크가 만들었던 골드스트림 경호대 는 그의 사후에도 남았다. 지금까지도 현존한다 이 부대는. 새로 소집된 5월 1일 컨벤션 의회.는 찰스를 공식적으로 초청했다 칼스2세 킹.의 타이틀로, 이것이 리스토레이션. 이라는 왕정복위.로 알려졌다.
그리고, 자기땅 없는 저 노르망디의 앨버말 공작.을 받고. 연금 받는거고.
In 1664 Monck had charge of the admiralty when James, Duke of York, commanded the fleet, and when in 1665 much of the populace deserted London on account of the Great Plague, Monck, with all the readiness of a man accustomed to obey without thinking of risk, remained in charge of the government of the city.[15]
1664년.에 제독자리를 맡다, 요크 공작 제임스가 지휘할때, 1665년에 역병이 돌아 런던이 폐허가 될때 몽크는 위험하단 생각도 없이 언제든 복종한다는 자세로, 그 도시를 다스리는 다스리면서 남아있었다.
At the end of 1665, he was called upon to fight again, being given a joint commission with Prince Rupert against the Dutch in the Second Anglo-Dutch War. The whole burden of the preparations fell upon him. On 23 April 1666 the admirals joined the fleet, and on 1 June 1666 began the great Four Days' Battle, in which Monck showed not only all his old coolness and skill, but also a reckless daring which had seemed hitherto foreign to his character. As this recklessness had cost the English many ships, command of the fleet was taken from him and given to Rupert, whom he would accompany in the St. James's Day Battle, the last battle at sea in which he would participate. Later in the same year he maintained order in the city of London during the Great Fire of London.[15]
1665년 말에, 그는 전쟁으로 콜 받아서 프린스 루퍼트와 함께 네덜란드와 2차 전쟁을 했다. 모든 준비는 그의 임무였고, 다음해에 리더들이 함대에 합류하고 4일간의 전투.가 시작이 되고, 몽크는 자기만의 노련한 침착함과 스킬을 보여주었고 무모하기 까지 했다 자기 캐릭과는 달리 어떤면에선. 이 무모함은 많은 잉글랜드 배들이 피해를 보았고, 지휘권은 루퍼트에게 넘어갔고, 성제임스의 날 전투, 그 해전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다. 그 해 후반에 그는 런던 대화재 동안 런던을 지휘했다.
His last service occurred in the Raid on the Medway of 1667, when the Dutch fleet sailed up the Thames, and Monck, though ill, hurried to Chatham to oppose their farther progress.[15] From that time he lived generally privately (although he officially served as First Lord of the Treasury).
그의 마지막 공직은 메드웨이 침투였다 1667년. 59세. 네덜란드 함대가 탬즈강으로 출발하고 몽크는 병들었고 켄트의 채텀으로 서둘러 가서 네덜란드의 진군을 막으려 했다. 그이후 그는 대게 은거하며 살았다. 타이틀은 재무부 제일 짱 이었지만.
그리고 1670년. 62세에 죽은겨.
영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야.
몽크 없는 영국이란, 있을 수가 없어.
사버린과 서브젝트는 다른거야.
찰스1세 의 발언은 명문이다.
'세계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2. 義, 처자식 굶기지 않는 것 ft.신센구미 (3) | 2020.03.17 |
---|---|
유럽사295. 루이14세가 죽인 프랑스, 땅과 상공업의 사이에서 (2) | 2020.03.16 |
221. 칼에 지다, 놓기 싫은 책 (11) | 2020.03.14 |
220. 황금당나귀, 졸 재미써 이거 (1) | 2020.03.14 |
219. 프라하의 묘지, 반유대주의 조작 과정 (1) | 2020.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