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 Walter Raleigh (/ˈrɔːli, ˈræli, ˈrɑːli/; c. 1552 (or 1554) – 29 October 1618), also spelled Ralegh,[2] was an English landed gentleman, writer, poet, soldier, politician, courtier, spy and explorer. He was cousin to Sir Richard Grenville and younger half-brother of Sir Humphrey Gilbert. He is also well known for popularising tobacco in England. Raleigh was one of the most notable figures of the Elizabethan era.  

 

Sir Richard Grenville (15 June 1542 – 10 September 1591), also spelt GreynvileGreeneville, and Greenfield, was an English sailor who, as captain of Revenge, died at the Battle of Flores (1591), fighting against overwhelming odds, and refusing to surrender his ship to the far more numerous Spanish. His ship, Revenge, met 53 Spanish warships near Flores in the Azores. He and his crew fought the fifty three in a three-day running battle. Many Spanish ships were sunk or so badly damaged that they had to retire from the battle. Revenge was boarded three times and each time the boarders were seen off.    

 

월터 롤리. 리차드 그렌빌. 둘이 사촌인데. 월터 롤리 가 열살 어리고. 

 

Sir Humphrey Gilbert (c. 1539 – 9 September 1583)[1] of Compton in the parish of Marldon and of Greenway in the parish of Churston Ferrers,[2] both in Devon,  

 

험프리 길버트.가 롤리 의 형인데, 씨가 다른 형이야. 엄마가 같어. 이들은 manor 매너 라는, 캐슬은 좀 안되고 규모있는 집과 정원에 작은 영주 가문이야. 이런이들을 젠트리. gentry 라고 해. 영국귀족계층으로. 하급 귀족이야. 저들이 모두 드레이크 와 호킨스 의 1588 스페인 아르마다 때의 동시대 인물들이여. 

 

Sir Francis Drake (c. 1540 – 28 January 1596[3]) Tavistock

Admiral Sir John Hawkins (also spelled as Hawkyns) (1532 – 12 November 1595) 

 

드레이크 와 호킨스 는 세컨드커즌이고, 드레이크는 태비스톡 Tavistock 이고 호킨스는 플리머스 Plymouth 출생이야. 모두 데본 Devon 이고. 롤리, 길버트, 그렌빌. 저 셋도 데본 이야. 플리머스 는 데본의 서쪽해변에 이 강 중류가 태비스톡 이고, 롤리 는 이스트 버들리 Budleigh. 형 길버트 는 그린웨이. 여긴 데본 동쪽 아래 해변이고. 그렌빌 은 비디포드 Bidiford 데본 북쪽 해변이야. 엘리자베스 일때 저 다섯 인간들이 모두 데본 이여. 

 

존 호킨스 가 가장 나이가 많고, 드레이크 와 그렌빌 이 비슷하고, 월터 롤리.가 가장 어려. 

 

드레이크 와 호킨스 는 1588 아르마다 다음에 바다에서 계속 스페인상대로 사략하다가 카리브해에서 죽은거고. 호킨스는 푸에르토리코에 묻히고, 드레이크는 세달후에 바다에 수장하고, 1595 1596. 

 

롤리, 그렌빌, 길버트 이 셋은 아일랜드.를 빼놓을 수가 없어. 이 셋은 어쨋거나 귀족이고, 드레이크 호킨스 와는 결이 다른겨. 호킨스는 배 있는 집안이라 잘살고 드레이크는 아빠가 걍 교회 직원이고, 완전 바닥에서 시작한 이들인데, 저 셋은 있는 집안이야. 그래서 서로 거의 안면이 없어. 저 두 그룹이. 

 

The Rathlin Island massacre took place on Rathlin Island, off the coast of Ireland on 26 July 1575,[1] when more than 600 Scots and Irish were killed.  

래뜰린 섬 학살.이 1575년.이야. 

 

아래에선 데스몬드 반란.이 1차 2차 로 해서 1569–1573 and 1579–1583. 아일랜드가 위와 아래가 저때 반란인겨. 엘리자벳 취임하고. 래뜰린 섬 학살이 데스몬드 터질때 있던 사건이고, 여기에 드레이크 가 불려가서 아일랜드 섬 막고 존노리스 가 래뜰린섬 학살한거라 드레이크가 요걸로 엮이걸랑. 드레이크는 원래 이 아일랜드는 관심이 없던 인간이여. 오직 스페인 뿐이여 적대심은. 

 

아래 데스몬드 반란때 잉글랜드의 지도부들에 낑기는 사람들이 저 셋이여. 말단 귀족으로. 저 셋이 아일랜드 남부에서 땅을 얻어서 자리를 잡는겨. 

 

Shane O'Neill (IrishSeán Mac Cuinn Ó Néill; c. 1530 – 2 June 1567), was an Irish chieftain of the O'Neill dynasty of Ulster in the mid 16th century. Shane O'Neill's career was marked by his ambition to be The O'Neill – sovereign of the dominant O'Neill family of Tír Eoghain  

 

북쪽은 얼스터 Ulster 에, 오닐 들이 중심이고, 오닐 이 여기 아일리쉬여 시작이. 아빠가 티르 오엔 Tir eoghian 의 킹 이었어. 헨리8세에게 하미지 하고, 여기 Tyrone 티론 의 첫 earl 백작이 된겨 오닐.들이.

 

이 오닐 과 접한 부락이 O'Donnell 오도넬.이야. 오닐 과 오도넬 은 경쟁하는 아이리쉬.고 이들도 튜더로 들어오지만, 뒤에 다시 반란 하는거고. 오닐 과 오도넬 은 아이리쉬 토종이고.

 

Somhairle Buidhe Mac Domhnaill (Somerled of the yellow hair, son of Donnellanglicised Sorley Boy McDonnell, or MacDonald in Scotland) (c. 1505 – 1590)

 

셰인 오닐 아빠뻘이, 솔리보이 맥도넬.이야 이전 썰. 맥도널드(맥도넬) 은 스콧 애들이여. 스콧애들이 아일랜드 얼스터로 이민온겨. 얘들은 원래 용병으로 먹고살던 애들이여. 쎄. 오닐 의 여동생이 이 솔리보이 맥도널 부인.인데. 이 맥도날드 는 원체 쎄. 잉글랜드 싫어. 오닐 은 잉글랜드에 하미지 하는거고. 결국 오닐 과 맥도날드 가 이때 전쟁하고, 오닐의 셰인 이 이 솔리 보이.에게 죽어. 이게 서기 1567년 이야. 이 얼스터 쪽은 맥도날드의 솔리보이.가 주도하는겨. 이걸 치러 가는게 존 노리스.와 드레이크 였고, 래뜰린 섬 학살 1575년 이고, 솔리보이.의 자식들과 친인척이 저섬에서 다 죽고, 복수를 하면서 버티다가 이사람도 85세에 늙어 죽어. 세력이 다 쇠해서 잉글랜드에 위협이 안돼. 스페인 아르마다 때는 패잔병 스패니쉬들을 도와주지만. 

 

이 얼스터 에서 반란할때 도움 청하는 곳이 아래의 데스몬드인겨. 데스몬드도 바빠 당시. 데스몬드 반란이 동시에 터진겨.

 

데스몬드 Desmond 는 지금 먼스터 Munter 주.라는 남부여. 이 데스몬드 바로 위의 영지가 오르몬드 Ormond 야. 

 

데스몬드 는 피츠제럴드.FitzGerald 가문이고. 요 바로 위 오르몬드.는  버틀러 애들이여. 얘들 둘도 사이가  안좋아. 엘리자벳 오르고, 앵글리칸 다시 세우고, 피츠제럴드 는 정통 카톨릭을 고수하고, 버틀러 들은 잉글랜드에 적극 하미지 하는겨. 데스몬드 반란 할때 오직 피츠제럴드 가문만 들고 일어난거고, 버틀러 들은 1차나 2차나 잉글랜드편에서 데스몬드를 진압하는겨. 

 

그래서 저 이름들이 말야, 오닐. 이란 이름이 오히려 애매한거야 이게. 오닐 이란 걸 아일랜드가 자부심있게 쓰지만, 오히려 맥도날드.가, 이민온 스콧애들이 자주 주체 면에선 잉글랜드에 붙어먹은 오닐 을 조지고, 끝까지 싸운애들이 맥도널드여 저 당시. 그리고, 아래는 버틀러 보다 피츠제럴드.여. 이게 줄여 제럴드 하는거고. 아이리쉬 들이 내세우는 이름이 제럴드가 되는겨 이게. 그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 농장 아빠가 제럴드여. 

 

저 데스몬드 진압할때 참여하는 인간들이, 험프리 길러트, 월터 롤리, 리차드 그렌빌.이야. 

 

Sir Henry Sidney (1529 – 5 May 1586), Lord Deputy of Ireland

 

아일랜드 책임자.가 헨리 시드니.이고, 이사람이 데스몬드 반란할때 가장 대갈.이여. 험프리 길버트.가 이 사람의 직속이고. 길버트 는 미리 아일랜드에 가있던거고, 자기 동생과 사촌을 부른겨 이 길버트가 헨리 시드니.밑에 있으면서. 이들이 데스몬드 진압하면서 여기서 영지를 얻고 자리를 잡아

 

Walter Devereux, 1st Earl of EssexKG (16 September 1541 – 22 September 1576)

얼스터 쪽 반란 진압 책임자.는 월터 데버루 라는 에식스 백작.이야. 존 노리스 와 드레이크 는 얘 말 들은거고.

 

 

저들은 다들 이튼 칼리지.에 옥스포드 여. 미들 템플 이라는 변호사 바리스터 협회 등록된 이들이고. 그렌빌.은 나이 20에 팔리어먼트여. 드레이크 호킨스 와는 걍 차원이 다른겨. 헌데 당대에 가장 위대한 두 인간은 드레이크와 호킨스지만. 

 

저들 모두 1588 스페인 아르마다 에서 해변을 지켜. 아, 험프리 길버트 빼고, 이사람은 1583년에 죽어. 다섯 중에서 가장 먼저. 

 

길버트.는 나이 젤 많은 형인데, 아일랜드 터 잡고, 잉글랜드 와서 플리머스.의 팔리어먼트. 하원의원이 돼. 그리고 이사람도 40넘어서, 바다로 가고 싶은겨, 남들처럼 먼가를 찾고 싶어. 이사람이 북동항로 북서항로 시도를 하는겨 중국 갈라고. 

 

The rest of Gilbert's life was spent in a series of failed maritime expeditions, the financing of which exhausted his family fortune.

After receiving letters patent on 11 June 1578,[13] Gilbert set sail in November 1578 with a fleet of seven vessels from Plymouth in Devon for North America. The fleet was scattered by storms and forced back to port some six months later. The only vessel to have penetrated the Atlantic to any great distance was the Falcon under Raleigh's command.  

 

아일랜드로 번 돈을 저 북동 북서 항로 찾으면서 다 쓰는겨. 배를 사고 사람도 사고 식량도 사고, 저게 돈이  드는겨 저때. 킹은 허가증 주면서 너 찾으면 몇대몇 하는거고. 즉 저건 모두 개인이 자기 돈들 투자해서 갔던겨 저당시. 특히나 잉글랜드는. 

 

이사람이 잉글랜드에 남겨준게, 뉴펀들랜드 섬.이야. 북미의. 

 

여긴 존 캐봇.이 1497년에 먼저 찾았어. 프랑스는 이후 백년만에 정착 시도하는겨 이게. 

 

험프리 길버트.가 1583년 에 뉴펀들랜드에 닿고. 여길 잉글랜드꺼다 하고, 돌아가다가, 포르투갈 앞바다 아소리스.의 섬에서 죽어. 나중에 사촌동생 리차드 그렌빌.도 이 아소리스 제도 에서 죽어. 

 

배가 다섯척인데, 험프리 길버트 가 타던 배가 저 부근에서 빠져서 이사람은 죽은겨.

 

When Golden Hind came within hailing distance, the crew heard Gilbert cry out repeatedly, "We are as near to Heaven by sea as by land!" as he lifted his palm to the skies to illustrate his point.[1][16] At midnight the frigate's lights were extinguished and the watch on Golden Hind cried out "the Generall was cast away".[1] Squirrel had gone down with all hands. The frigate was devoured and swallowed up by the sea.[1]  

 

골든 하인드 호.가 소리들리는 거리로 닥아갔을때, 승무원이 길버트의 반복 외침을 듣아. 우리는 바다옆 천국 가까이에 있어. 그는 그의 손바닥을 하늘로 올렸다 자기 위치를 알리려고. 한밤중에 그 배의 빛은 꺼졌고, 골든 하인드에서 관측병이 외치다. 사령관이 사라졌어. 스쿼럴호는 가라앉았다 모두를 태우고. 

 

Gilbert's Latin mottoesQuid Non ("Why not?") and Mutare vel Timere Sperno ("I scorn to change or to fear")  

 

험프리 길버트.의 모토.가 라틴어로. 퀴드 논. 왜 안된다는거야? 무타레 벨 트메레 스페르노. 나는 변하는 것과 두려운 것은 안할란다. 스페르노 는 냉소비하 보다는, 딱 끊는겨. 

 

저때가 1583년.이야. 나머지 선원이 돌아오고 뉴펀들랜드섬.을 알게 된거고, 엘리자벳이 길버트 이야기를 듣고서 시작한게 북미 정착시도 인겨. 이게 로어노크섬 정착 시도여. 이걸 지시받은게 월터 롤리.인거야. 

 

데스몬드 반란.이 엘리자벳이 취임하고 최고의 관심사인거고, 저때 헨리 시드니 밑에서 있던 길버트.에 롤리.에 그렌빌.이 엘리자벳 관심으로 들어온겨. 

 

Between 1579 and 1583, Raleigh took part in the suppression of the Desmond Rebellions. He was present at the Siege of Smerwick, where he led the party that beheaded some 600 Spanish and Italian soldiers.[14][15] Raleigh received 40,000 acres (16,000 ha) (approx. 0.2% of Ireland) upon the seizure and distribution of land following the attainders arising from the rebellion, including the coastal walled town of Youghal and, further up the Blackwater River, the village of Lismore. This made him one of the principal landowners in Munster, but he had limited success inducing English tenants to settle on his estates.  

 

월터 롤리.는 데스몬드 2차때 형이 불러서 간겨. 6백명의 스패니쉬와 이탈리안 용병들을 참수한 무리를 이끌다. 롤리는 4만 에이커를 받다. 아일랜드 땅 0.2퍼센트. 이 월터롤리.가 여기서 기반을 마련하고, 이 부 를 바탕으로 자기가 펀딩해서 로어노크 로 사람들을 보내는겨 이게. 

 

In 1584, Queen Elizabeth granted Raleigh a royal charter authorising him to explore, colonise and rule any "remote, heathen and barbarous lands, countries and territories, not actually possessed of any Christian Prince or inhabited by Christian People," in return for one-fifth of all the gold and silver that might be mined there.[17] This charter specified that Raleigh had seven years in which to establish a settlement, or else lose his right to do so. Raleigh and Elizabeth intended that the venture should provide riches from the New World and a base from which to send privateers on raids against the treasure fleets of Spain.  

 

험프리 길버트.가 죽은 해.에 데스몬드 반란이 최종 끝난거고. 1583년. 엘리자벳이 다음해 차터를 주고 월터롤리.에게, 먼, 숨겨진, 야만의 땅들을 탐험하고 식민지화해서 다스려라, 그리스도 영주가 소유치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지 않은 땅들을. 1/5 오분의 일, 니가 찾는 모든 금과 은, 발굴될, 을 다 니가 갖고, 나머지는 킹덤꺼다. 롤리.에게 7년을 주고 그 넘어는 권한을 뺏기는겨. 롤리와 엘리자는 부를 취하는 거에 더하여, 스페인 배들을 사략하는 전초기지로 북미를 이용하는데 쓰려고 했다. 

 

월터 롤리.는 아일랜드 외엔 몰러, 안가봤어. 퀸이 가라고 해서 간겨. 

 

Raleigh himself never visited North America, although he led expeditions in 1595 and 1617 to the Orinoco River basin in South America in search of the golden city of El Dorado. Instead, he sent others in 1585 to found the Roanoke Colony, later known as the "Lost Colony"  

 

Raleigh quickly arranged an expedition to explore his claim, which departed England on April 27, 1584.[4]:14 The fleet consisted of two barques

 

롤리.는 나중에 엘도라도 찾으러 직접 두번을 가는데 훨 나중에 40 넘어서. 이때 갓 30세여. 이때는 걍 자기 돈이랑 친구들 돈 모아서, 보낸겨. 험프리 길버트가 1578년에 처음 차터를 받은겨 정착지 찾는. 다음 받은게 월터 롤리.여. 1584년 에 출발시켜. 바크 선 두대로. 이건 탐사하러 보낸겨. 얘들이 가을에 돌아와. 찾았대 사람 살 곳을. 

 

The first colony was established by governor Ralph Lane in 1585 on Roanoke Island in what is now Dare CountyNorth CarolinaUnited States.[1]:45, 54–59 Following the failure of the 1585 settlement, a second colony led by John White landed on the same island in 1587, and became known as the Lost Colony due to the unexplained disappearance of its population  

 

1584년 탐사대가 돌아와서, 다음해 1585년.에 배 7척 이 가는겨. 이때 함대 총 지휘자.가 사촌형 리차드 그렌빌.이야. 이때 정착을 실패하고 다시 돌아와서, 2년 후 1587년 에 다시 가. 

 

White returned to England with Fernandes, intending to bring more supplies back to his colony in 1588.[1]:93–94 Instead, the Anglo-Spanish War delayed his return to Roanoke until 1590.[1]:94, 97 Upon his arrival, he found the settlement fortified but abandoned. The word "CROATOAN" was found carved into the palisade, which White interpreted to mean the colonists had relocated to Croatoan Island. Before he could follow this lead, rough seas forced the rescue mission to return to England.[1]:100–103

The fate of the approximately 112–121 colonists remains unknown.  

 

1587년.에 120 여명.을 정착을 시킨겨. 두번째 시도에. 로어노크섬.에. 헌데 아무것도 없걸랑. 가져간 식량이니 머니 없어 이게. 현지 조달이 안돼. 존 화이트.가 내 잉글랜드 가서 부자재 가축 머 갖고 오마 해서 갔는데, 저때가 1588 스페인 아르마다 걸랑. 스페인 패하고 막 대서양에 스페인애들이 눈을 부라리고. 2년 동안 못간겨 저길. 2년 만에 가보니까 글자 하나 크로아토안. 이란 알파벳만 새겨지고 다들 사라진겨. 

 

저들이 어찌 되었는지 몰라. 먼 글자인지 머 암호인지 알길없고. 

 

저 이후, 지속적 물품 공급 및 지원이 필요한걸 깨닫고, 회사 차원의 펀딩과 지원 이 시작이 되는겨. 

 

The fight was later romanticized by the poet Alfred Lord Tennyson in his work The Revenge: A Ballad of the Fleet: "Out-gunned, out-fought, and out-numbered fifty-three to one",[12] Grenville was said to have wished to blow up his ship rather than give up the fight, as Tennyson wrote:[12] "Sink me the ship, Master Gunner! — sink her! split her in twain! ... Fall into the hands of God, not into the hands of Spain!" Grenville's crew however refused to obey these suicidal orders and his officers surrendered what was left of their vessel to the Spanish, on a promise of fair treatment.  

 

리차드 그렌빌.은 1591년 플로리스 전투. 아소리스 제도 의 섬이야. Flores. 여기서 스페인 배 사략하다가, 1대 53 으로 싸워. 53척의 스페인배에 포위되었어. 저때 리벤지 호.의 캡틴이었고. 이 리벤지 호.가 드레이크 배의 이름이여. 이 리벤지 라는게 영국 해군의 상징이야. 도망 못가고, 난 53대 1 로 싸울껴. 하다가, 승무원들이 항복하고, 그렌빌은 배신자. 욕 소리지르고. 포로가 되는데, 스페인배들에 잡혀서 가다가 저 바다에서 폭풍 맞아서 다들 죽은겨. 그랜빌도 저때 죽은거고. 

 

He remained imprisoned in the Tower until 1616. While there, he wrote many treatises and the first volume of The Historie of the World (first edition published 1614)[38] about the ancient history of Greece and Rome. His son, Carew, was conceived and born (1604) while Raleigh was imprisoned in the Tower

 

엘리자벳.이 1603년에 죽고. 제임스1세 가 올라. 이때 월터 롤리.가 반역죄.로 기소가 되서 목숨은 붙고 10년 이상 1616년까지 런던타워에 갇혀. 이때 쓴 책이 세계의 역사. 여.  얘들은 깜빵가면 책을 써. 그리고 풀려나서. 다시 엘도라도 가는겨.

 

In 1617, Raleigh was pardoned by the King and granted permission to conduct a second expedition to Venezuela in search of El Dorado. During the expedition, a detachment of Raleigh's men under the command of his long-time friend Lawrence Keymis attacked the Spanish outpost of Santo Tomé de Guayana on the Orinoco River, in violation of peace treaties with Spain, and against Raleigh's orders.  

 

엘도라도 찾으러 두번째 간겨 이게. 엘리자때 한번 가고. 이것도 제임스의 허가를 받고 간건데. 이때는 제임스가 스페인이랑, 이제 사략질 안하께요, 싸우지 마셈. 하며 지낼때걸랑. 헌데 엘도라도 찾으러 갔다가, 이사람 친구 가 이끄는 무리가 총격전에 휘말리고 여기서 롤리의 아들이 죽어. 이 친구는 자살을 해. 

 

이 총격전으로, 스페인이 너 조약 어겼다, 제임스에게 항의하는거고. 월터 롤리.를 사형시키는겨. 

 

Raleigh was beheaded in the Old Palace Yard at the Palace of Westminster on 29 October 1618. "Let us dispatch", he said to his executioner. "At this hour my ague comes upon me. I would not have my enemies think I quaked from fear." After he was allowed to see the axe that would be used to behead him, he mused: "This is a sharp Medicine, but it is a Physician for all diseases and miseries." According to biographers, Raleigh's last words (as he lay ready for the axe to fall) were: "Strike, man, strike!"[43]  

 

웨스트민스터 궁 야드에서 참수되었다 1618년 10월 29일. 그는 처형수에게 말했다. 이 시간되면 나는 원래 열이 나걸랑. 나는 나의 적들이 내가 무서워 떨었다고 생각하게 하고싶지 않아. 그는 도끼가 자기 머리 자르는걸 봐도 된다고 허락받고서 말했다. 이건 날카로운 약이야. 모든 질병과 불행을 위한 의사지.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롤리의 마지막 말들은. 스트라이크 맨 스트라이크. 쳐라, 이봐,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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