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라는 아메리카. 가 발견이 되고, 정치체제.를 정식 바이스로이.체제로 시작하는게. 뉴스페인 부터야. 서기 1535년. 이전을 딱히, 인디스 바이스로열티. 콜럼버스 바이스로열티. 하는데 대중없고. 콜럼버스 가 어찌다스리나 감사를 보낸게 Bobadilla 보바디야.여. 프란시스코 데 보바이야. 이사람이 1500년 부터 감사겸 다스리다가 1502년에 푹풍으로 죽고. 이때 감사보고서가 아주 적나라하고 콜럼버스 깜빵가고. 1501년에 이사벨라.가 원주민도 카스티야 시민들.이라 공식화 하고, 1503년.에 엔코미엔다 encomienda, 엔코멘데로스 encomenderos 를 공식화해. Real Audiencia 레알 오디엔시아 라는 항소심법원도 두고. 10년 만에야 하는겨 이걸. 그리고 15년 지나서 뉴스페인 바이스로이.가 시작해. 서기 1535년. 지금 뉴멕시코 시티.에서 여기 바이스로이.가 쿠바와 히스파니올라(도미니카 아이티)에 중남미대륙의 짱인겨. 

Frey Nicolás de Ovando y Cáceres (BrozasExtremaduraSpain 1460 – Madrid, Spain 29 May 1511)
니콜라스 디 오반도 이 카세레스. 콜럼버스 기소당하고, 보바디야 가 대리로 다스리다가 폭풍으로 죽고 1502. 다음에 오는 사람이 카세레스.야. 얘때 원주민 학살하고. 그리고 나서, 이사벨라.가 1501년 원주민 노예부리지 말라 하고 엔코미엔다, 엔코멘데로스 를 공식화하고 항소심도 저기에 두는겨. 

 

Bartolomé de las Casas (Spanish: [baɾtoloˈme ðe las ˈkasas]; c. 1484[1] – 18 July 1566)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도미니칸 수도사고. 콜럼버스의 장남 디에고 때 들어오고, 최초의 인권 수도사고, 원주민 노예 반대 외치고, 그러면서 아프리칸이 노예로 들어온겨. 인권을 외친 사람이 아프리칸 을 노예화 시킨 주도자가 된겨. 아이러니인데. 즉 중남미에 아프리칸 노예를 시작하게 한 사람이 이사람이야. 

 

이전을 정리하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몬테주마2세 만난게 1519년.이고 알바라도 학살.로 아즈텍이 들어온게 1520년.이야. 이때 코르테스.는 자기 잡으러 온, 쿠바 총독 디에고의 명으로, 나르바에스 랑 전투하러 간 사이에 벌어진거고. 나르바에스 는 패하고 다시 오고나서,  나르바에스 원정 하는게 1527년 스페인 출발해서 1528년 플로리바 템파베이 닿고 멕시코만 해변을 도는겨. 네명이 살아돌아와. 1532.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게 데소토 1539-43.와 코로나도1540-42 원정이야. 

 

플로리다 를 발견하고 만진 사람은 후안 폰세.여 1513년. 코르테스 가 아즈텍 점령 전이여. 나르바에스.는 이 후안폰세.의 플로리다 를 15년 지나서 간거야, 코르테스에게 패하고. 

 

Around 1530, Nuño Beltrán de Guzmán (president of New Spain) was told by an Indian slave of the Seven Cities of Cibola  

 

코로나도.는 뉴스페인 대륙에서 땅으로 올라가는거고, 데소토.는 쿠바에서 바다로 플로리다 간거고.

 

이때 북미로 가는 이야기.는 누뇨 데 구즈만.이 인디언 노예에게 들었다는 시볼라.의 일곱도시들.이야. 도시 자체가 금으로 된겨. 길 자체도 금과 은이고. 금 찾으러 북쪽가는거고, 코로나도 보낸거고 여기에 모두 딸러빚 내서 투자한거고, 다 쫄딱 망한거고. 코로나도는 살아 돌아와서 재판받고, 데소토 는 죽고. 

 

 

About the same time Hernán Cortés was attracted by stories of a wonderful country far to the northwest, populated by Amazonish women and abounding with gold, pearls and gems. The Spaniards conjectured that these places may be one and the same.

An expedition in 1533 discovered a bay, most likely that of La Paz, before experiencing difficulties and returning. Cortés accompanied expeditions in 1534 and 1535 without finding the sought-after city.

On May 3, 1535, Cortés claimed "Santa Cruz Island" (now known as the Baja California Peninsula) and laid out and founded the city that was to become La Paz later that spring.  

 

에르난 코르테스.도 북미에 아마존 여자들. 금 진주 보석 으로 넘쳐난 도시들이 있다는 이야길 들어. 얜 아즈텍 점령하고, 바이스로이 체제로 될때 뉴스페인의 바이스로이 욕심내지만, 카를이 주지 않고 지역 엔코미엔다 맡는 엔코멘데로스.만 하는거고. 그러면서도 애들을 위로 보낸겨. 이때 찾은게 바하 캘리포니아.라는 길쭉한 반도여. 로드리게스 카브리요.가 찾은. 1543. 

 

Hernán Cortés de Monroy y Pizarro Altamirano, Marquis of the Valley of Oaxaca (/kɔːrˈtɛs/; Spanish: [eɾˈnaŋ koɾˈtes ðe monˈroj i piˈsaro]; 1485 – December 2, 1547) was a Spanish Conquistador 

에르난 코르테스 데 몬로이 이 피사로. 1547년. 62세에 죽어. 이사람때 나르바에스 원정. 코로나도 원정, 데소토 원정. 에 카브리요.의 마하 캘리포니아.인겨. 

 

저때 들썩이게 한 이야긴. Cobola 시볼라 의 일곱도시들.에 아마존 여자들이야. 이건 북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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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The southern portion of these coastal possessions were known as the Province of Tierra Firme, or the "Mainland province" (as contrasted with Spain's nearby insular colonies).[1]:15 The Province of Tierra Firme, or simply Tierra Firme, was also called Costa Firme  1510–1537

 

티에라 피르메. 코스타 피르메. 피르메.가 펌. 강력한 스토롱. 강력한 땅. 강력한 해변. 이건 해변에 걸친겨. 1510년 즈음에 둬.

 

히스파니올라 라는 지금 도미니칸 공화국 섬.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1504년 18세에 산토 도밍고.에서 지내다가, 쿠바 총독 디에고.를 무시하고 쿠바를 출발해서 유카탄 반도에 도착하는게 1519년.이여. 쿠바 하바나.의 위도 바로 아래가 요 유카탄 반도여. 이 반도에 아주 가까운 섬이 쿠바여 이게. 그리고 바로 몬테주마2세 있는 멕시코시티로 가는겨 당해에. 

 

히스파니올라 와 쿠바에서 1513년에 후안 폰세.가 플로리다 를 만져본거고. 1519년.에 이 유카탄 반도를 직접 점령하러 온거야. 이전에 콜럼버스는 4차 항해하면서 걍 아래들 만지고만 온거고 위 카리브해 섬들이랑. 

 

그러면서 히스파니올라.는 섬들에 유카탄반도와 플로리다 를 바라보는거고. 여기 체제는. 

 

서기 1510년.에 이 아래 긴 중남미는 이미 콜럼버스가 4차항해 하면서 다 만진겨. 베네수엘라 오른쪽 트리니다드 반도도 만지고. 유카탄 반도 아래 해변들과 베네수엘라 해변들이여 여긴. 

 

In 1509, authority was granted to Alonso de Ojeda and Diego de Nicuesa to colonize the territories between the west side of the Gulf of Urabá and Cabo de la Vela, and Urabá westward to Cabo Gracias a Dios in present-day Honduras. The westernmost portion was given the name Tierra Firme. Other provinces of this region during this era were Nueva Andalucia and Veragua or Castilla del Oro; the main city in Tierra Firme was Santa Maria La Antigua del Darién, now Darién, Panama, near at mouth of the Tarena river. The idea was to create a unitary administrative organization similar to Nueva España (now Mexico), near the Captaincy General of Guatemala.  

 

서기 1509년.에 알론소 데 오헤다. 디에고 데 누케사.가, 우라바 만, 카보 데 라 벨라, 우라바.의 왼쪽과, 카보 그라시아스 다 디오스. 를 담당하게 된건데. 카보 는 케이프 곶 삐죽이 이고. 우라바 만.은 콜롬비아 와 파나마 가 만나는 오른쪽 만.이고. 죽 콜럼비아 동쪽 해변이고. 카보 그라시아스 아 디오스.라는 만.은 유카탄 반도 아래 의 삐쭉이야. 유카탄은 여기까지 멕시코.이고 이게 푹 꺼지는 지역이 과테말라.가 아래 해변이고. 벨리즈.가 윗해변 나라여. 이 아래 나라가, 온두라스 와 나카라과.야. 이 두 나라가 접하는 경계선 삐쭉이가 카보 그라시아스 아 디오스.여. 온두라스 의 아래 해변이 엘살바도르.라는 짝은 나라고. 니카라과 다음이 코스타리카 이고 파나마 에 콜롬비아.야. 

 

티에라 피르메.가 온두라스에서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콜롬비아 를 잇는 반도에 해변을 맡은거고. 수도 가 지금 다리엔. 파나마 도시여. 이 다리엔 은 지금 콜롬비아 접경 도시고. 파나마 시티.라는 파나마 수도는 가운데여.

 

Alonso de Ojeda (c. 1466 – c. 1515) was a Spanish explorer, governor and conquistador. He travelled through GuyanaVenezuelaTrinidadTobagoCuraçaoAruba and Colombia. He is famous for having named Venezuela, which he explored during his first two expeditions, for having been the first European to visit Guyana, Curaçao, Colombia, and Lake Maracaibo, and later for founding Santa Cruz (La Guairita).  

 

알론소 데 오헤다.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 퀴라소 아루바 콜롬비아. 남미 위쪽 해변에 섬에 나라들이야. 이사람이 베네수엘라 1499. 33세에 가서 이름 짓고, 작은 베네치아 라며. 이때 같이 간 사람이. 

 

Amerigo Vespucci (/vɛˈspuːtʃi/;[1] Italian: [ameˈriːɡo veˈsputtʃi]; March 9, 1454 – February 22, 1512) was an Italian explorer, financier, navigator, and cartographer from the Republic of Florence.  

 

아메리고 베스푸치.야 피렌체 사람이고, 메디치 가문에서 일하다가, 작은 메디치, 나중 피렌체 대공작 받는 메디치. 이 메디치에서 콜럼버스 항해에 투자를 하는데, 이게 돈이 안된겨. 이때 거간꾼이 베스푸치.였고. 이사람이 아예 카스티야 사람으로 살면서 저기 배를 타는거야. 오헤다 랑 같이 베네수엘라 가서 작명한거고. 뉴월드.라는 이름이 이사람이 만든 작명이야. 뉴월드 란건, 인도 가 아니구나 새로운 세계군 하면서 나온 이름이야. 동시에 자기 이름 따서 아메리카 한겨. 즉 뉴월드 아메리카.에 대한 저작권은 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있어. 

 

Diego de Nicuesa (Spanish: [ˈdjeɣo ðe niˈkwesa]; died 1511) was a Spanish conquistador and explorer.[1]  

 

오헤다 와 같이 1509년에 담당한 이가 니케사.인데. 이사람은 주로 파나마 지협을 탐험하면서 식민지화 한거고, 오헤다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해변을 돌아다닌거고, 해서 이 둘이 대부분 이지역을 드러낸거고 그 다음에서야 여기 담당.을 한거야. 이들은 모두 젠트리 라는 하급귀족이여. 

 

대륙 만지고 돌아다닌건,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의 유카탄 반도 보다 이 아래가 훨 빠른겨. 1499 베네수엘라 등 1500년 직전후 부터 여긴 이리 돌아다니면서 만지면서 작명하고 다닌겨 지역들을. 20년 빨라 위에보다. 

Vasco Núñez de Balboa (Spanish pronunciation: [ˈbasko ˈnuɲeθ ðe βalˈβo.a]; c. 1475 – around January 12–21, 1519)

바스코 누녜즈 데 발보아. 제일 유명한 이가, 먼저 등장하는게 누녜스 발보아.여. 1513년에 파나마 지협을 뚫고, 배타고 상류로 가서 오르고 내려서 태평양을 만진겨 1513년. 이사람이 다리엔.도 먼저 닿았던겨 이전에. 이미 이때는 니케사 와 오데하 담당이었고, 티에라 피르메.를 시작한건 이사벨라 1504년에 죽고, 미친년 닉 후아나. 위에서 실질 킹 아라곤의 페르디난드가 한거야. 이때 중심이 오헤다. 니케사.에 이 발보아 야. 발보아 에게도 차터 를 줘서 막 식민지 시작한거고. 이게 겹치는겨. 

 

발보아 도 파나마 지협에 온두라스 니카라과 땅들을 세우고, 이게 오헤다 와 니케사 의 테라 피르메.로 나중 들어간거고. 이사람도 자기가 찍은 다리엔. 산타마리아 의 메이어. 영주 를 하는거고. 뒤에 새로생기는 카스티야 데 오로.의 영주도 해. 모두 티에라 피르메 의 관할인겨. 

 

티에라 피르메.가 서고,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아래의 남미땅들을 네등분하는겨. 이 아래 페루지역 왼쪽오른쪽 일직선을 뉴카스티야 이 아래를 뉴톨레도, 아래를 뉴안달루시아. 아래가 뉴 레온. 그러다 이게 페루 바이스로이.로 통합이 되는겨. 

 

The Viceroyalty of Peru (Spanish: Virreinato del Perú) was a Spanish imperial provincial administrative district, created in 1542, that originally contained modern-day Peru and most of Spanish-ruled South America, governed from the capital of Lima. Peru was one of the two Spanish Viceroyalties in the Americas from the sixteenth to the eighteenth centuries.  

 

1542년.에 아래는 페루. 위에는 1535년에 뉴스페인. 이 생기고. 이 두 축으로 가는겨 중미와 남미가. 그러다 남미는 뉴 그라나다. 리오 델라 플라타.가 떨어져 나가는거고 18세기에. 

 

 

Francisco Pizarro González (/pɪˈzɑːroʊ/; Spanish: [fɾanˈθisko piˈθaro]; c. 1471-1476 – 26 June 1541) was a Spanish conquistador, best known for his expeditions that led to the fall of the Inca Empire and the Spanish conquest of Peru.  

 

프란시스코 피사로 콘잘레스. 잉카 와 전쟁하는게 1532-72. 40년 간인데. 이걸 시작한 사람이 이 피사로.야. 이사람은 뉴카스티야 첫 거버너. 1529년. 를 취하고 페루 정복을 하는건데. 나이가 대략 50 훨 넘어서야 관직이 생기는겨 이사람은.

 

저때 모두들, 걍 이달고 라는 허섭 귀족이야. 다들 미친 돈키호테 인겨 재산 하나 없는. 이사람도 마찬가지고, 저 발보아 보다 더 거지여. 오히려 발보아는 좀 나은거고, 나이는 비슷하고, 오데하 는 훨 많고 나이가. 이 오데하, 발보아. 의 원정에 다 참여한 사람이지만, 별볼일 없는 사람인겨. 이 사람이 운대가 트이는게, 윗 사람을 잘 잡았어. 

 

Pedro Arias de Ávila (c. 1440 – March 6, 1531) (often Pedrarias Dávila) was a Spanish soldier and colonial administrator. He led the first great Spanish expedition to the mainland of the New World. There he served as governor of Panama (1514–1526) and Nicaragua (1527–1531), and founded Panama City (1519)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페드리아스 다빌라). 완전 할배여. 90에 죽은거로 봐. 이사람은 스페인의 잘나가는 귀족이야. 발보아 나 피사로 보다 삼십여년 많어. 헌데 발보아.가 태평양 만지는 1513년에 여기저기 발굴하면서 잘나갔걸랑. 이 발보아 도  허섭 귀족인게 들뜬겨 이게. 페드리아스 다빌라.가 발보아 를 치는거야. 이때 피사로 가 다빌라.의 측근이 되고 발보아를 체포해. 다빌라는 발보아 를 모가질 짤라 처형하고. 피사로 가 2인자 가 되는겨. 그러면서 파나마시티.를 피사로 가 발견하고, 이 가운데 땅은 페드리아스 다빌라.의 이름으로 파나마 부터 니카라과 에 이 다빌라.와 피사로 가 중심이었던거고. 오데하 와 니케사 는 이미 죽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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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티나오는 인간.

 

Pascual de Andagoya (1495-1548) was a Spanish Basque conquistador. He was born in the village of Andagoya, in the valley of Cuartango (Álava), in Spain.

As often happened at the time, Andagoya left as an explorer of the New World at a very young age of 19, on April 11, 1514, under the command of Pedro Arias de Ávila. The expedition left carrying an army of over 2,000 in 22 ships, with the objective of colonizing Central America.

The career of Andagoya commenced in Panama, whose capital Panama City he founded in 1519 with 400 settlers. Later he moved south towards the Colombian coast, until he reached San Juan, where he took charge as governor.[1]

This was when he learned of the existence of the Inca Empire, in the distant territory called "Birú", or "Pirú". In 1522 he attempted a conquest, but it ended in failure.[1]

With his health deteriorating, he returned to Panama and spread word of his discoveries, in particular the existence of a land of enormous riches of gold and silver, namely, Peru. In 1524 Francisco Pizarro, in association with the soldier Diego de Almagro and the priest Hernando de Luque, mounted an expedition using Andagoya's ships.[2]:24  

 

파스칼 데 안다고야. 안다고야 의 파스칼. 아주 어린 사람이야. 1514년 나이 19세에 다빌라.휘하로 온 사람인데. 콜롬비아 해변의 지역에 거버너 일도 맡고. 그러다가 여기서, 잉카 제국 이야길 들어. 비루. Biru 란 먼 지역의 땅을. 1522년 27세에 정복하러 가겠다하다가 병걸려서 못가. 파나마로 돌아와서, 금과 은으로 도배가 된 비루. 라는 페루 이야길 사람들에게 막막 한겨. 1524년, 50된 피사로 가 안다고야 의 배를 갖고 가는겨 페루로. 

 

 

 

위에선, 에르난 코르테스.가 1520년 알바라도 학살.이란 이름으로 아즈텍을 먹는데, 이때 원주민들이 금은 보석으로 치장을 했다고 하걸랑. 이 금은 이야기가 돈거고. 더하여 1530년 전후에 누뇨 데 구즈만.이 시볼라 일곱도시들.이야길 인디언에게 듣고, 코르테스.도 그런이야길 들어. 이게 1520-30년 즈음 유럽에 이런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오는거고. 

 

땅정복은 파나마 지협과 남미북쪽에서 활발하고, 여기도 황금의 도시 가 나오는겨. 

 

아즈텍 금이 먼저였고 1520. 시볼라 는 1530년 이고, 페루는 이 사이야 1522.

 

파나마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지나서 페루로 가는겨 저게. 1524년.에. 안다고야 말을 듣고. 

 

저때 피사로.는 발보아 죽고, 다빌라.의 신임을 얻은 후인겨. 이사람은 아주 늦게야 빛을 본겨. 50되서 시작이여 이사람은. 

 

두번을 다녀와

 

 

The Famous Thirteen (Spanish Los trece de la fama, "the thirteen of the fame", or Los trece de Gallo, "the thirteen of [Isla del] Gallo") were a group of 16th century Spanish conquistadors that participated in the Spanish conquest of Peru (second expedition) along with their leader, Francisco Pizarro. In 1527 Pizarro and his men were waiting on the Isla del Gallo, in bad conditions, when the supply ship returned from Panama with orders from the Spanish governor to abandon the expedition.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version of the story, Pizarro drew a line in the sand with his sword and said, "those on that side of the line can go back to Panama and be poor; those on this side can come to Peru and be rich. Let the good Castillian choose his path." In the traditional telling of the story, only thirteen men chose to stay with Pizarro.[1]:26[2]  

 

유명한 13명. 로스 트레케 데 라 파마. 갈로의 13명. 갈로 섬에서 최악의 13명만 남은겨. 피사로 가 리더고. 다들 포기한거고. 피사로 가 모래밭에서 선을 거. 이 선의 저쪽 인간들은 파나마로 돌아간다, 그냥 가난한데로 살거다. 이쪽 사람들은 페루로 가서 부자가 될거다. 훌륭한 카스티야 인들은 그의 길을 선택해라.  13명이 피사로를 따라서 페루로 가기로 한겨. 이게 2차 원정 이야기야. 그리고 다시 파나마로 왔다가 출발해서 페루 해변에 닿고, 금을 확인한겨. 

 

The Spanish conquest of Peru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campaigns in the Spanish colonization of the Americas. After years of preliminary exploration and military skirmishes, 168 Spanish soldiers under conquistador Francisco Pizarro, his brothers, and their native allies captured the Sapa Inca Atahualpa in the 1532 Battle of Cajamarca. It was the first step in a long campaign that took decades of fighting but ended in Spanish victory in 1572 and colonization of the region as the Viceroyalty of Peru.  

 

다시 페루 로 가려는걸 파나마.의 거버너.가 못가게 하고, 같이 카를5세(카를로스1세) 를 만나러 직접 스페인에 가. 카를이 보고를 받고, 이때 피사로 에게 뉴카스티야 라고 페루를 이름 짓고, 니가 저길 정복해서 거버너 가 되어라 하는겨. 이게 1532년 부터.의 페루 정복 이야 40년간.

 

Atahualpa (/ˌætəˈwɑːlpə/), Atawallpa (Quechua), also Atabalica,[5][6] AtahuallpaAtabalipa (in Hispanicized spellings)(c. 1502–26 July 1533) was the last Inca Emperor. After defeating his brother, Atahualpa became very briefly the last Sapa Inca (sovereign emperor) of the Inca Empire (Tawantinsuyu) before the Spanish conquest ended his reign. 

 

애터왈퍼. 아타발리카. 아타발리파. 마지막 잉카 황제. 여기도 내분으로 망한건데. 나 풀어주면 이 방을 모두 황금으로 채워주겄소 라고 피사로에게 제안하고. 꺼져 하고 죽여. 할때 애터왈퍼 와 피사로.야. 

 

엘도라도 는 다른 이야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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