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r against Sigismund (SwedishKriget mot Sigismund) was a war between Duke Charles, later King Charles IXand Sigismund, King of Sweden and Poland. Lasting from 1598 to 1599, it is also called War of Deposition against Sigismund, since the focus of the conflicts was the attempt to depose the latter from the throne of Sweden. The war eventually resulted in the deposition of Sigismund, with Duke Charles taking over the government and later also acceding to the throne. 

 

1598년 지기스문트 가 폴란드에 스위든 킹.인 상태에서 삼촌 카를.이 멋대로 의회소집하고 핀란드의 농민반란 커즐전쟁 곤봉 부추긴듯 하고 해서 스위든으로 가는겨. 얘가 단치히.에서 배타고 가는거걸랑. 아 이 단치히 때문에 또 진도가 못나가고 과거로 돌아간건데. 

 

튜튼 기사단.이 신성로마황제 호헨슈타우펜 가문 붉은수염 프리드리히1세. 뒤의 2세의 할배여. 기벨리니여. 괼피(벨프)의 사자공 하인리히(헨리)에게 바바리아 작센.을 다 돌려줬어 이전 삼촌 콘라트.가 뺏은걸. 그러다 롬바르디아 원정갈때 저 사자공이 또 쌩까서 다시 뺏아서 아스카니아 가문의 곰 알베르트.와 비텔스바흐가문에 각각 나눠줘. 그리고 십자군 레반트를 가는겨. 이사람이 20대 때 십자군 2차.를 자기 삼촌 콘라트.와 갔었어. 이때 저 벨프 사자공 헨리.랑 아스카니아 곰 알베르트.도 레반트 2차.에 갔고. 2차 십자군이 프랑스 루이7세가 이혼하기전인 아키탄 엘레오노르.랑 갈때야. 

 

동양땅에서. 이 십자군 레반트.2백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무도 없어. 오직 나 하나 외엔.

 

이건 사실이야. 시오노 나나미할매의 십자군 이야기와 지중해이야기가. 이게 세권과 두권인가인데 이것도 꼭 보도록해. 이 할매 글들은 다 번역이 졸 잘되어있어. 필독서야. 하 헌데 짐보단 못하지만 말야. 꼭 보도록 하고.

 

레반트 십자군 이란건. 저때까지 유럽중세사.와 오른쪽 투르크 들 이야기에. 몽골 칭기스칸 이야기를 모~두 알아야지 저 이야길 할수 있어. 이건 엄청난 시야와 인과와 변수들이 작동하는 게임이걸랑. 이걸 얘기할 두뇌와 지능을 가진 인간은 이 조선어족엔 없어. 있을 수가 없어. 이 조선어족 문꽈 인문계 인간들은 참 세상빠닥에서 가장 무지한 인간들이야 이게. 아 저 유럽사와 세계사를 정리해보면서 더욱더 강하게 드는 명제야. 항진명제야. 공리도 아냐.  증명이 가능해. 유럽사 세계사를 보면 자연히 수많은 증거들이 너무나 쌓여. 수만페이지로 말할 수 잇어. 이 조선어족 인간들은 너무나 너무나 미개해 이 문꽈는. 이꽈애들이 대단한겨. 이꽈는 문꽈의 토양에서 나오는거걸랑. 자기들이 직접 맨땅에서 걍 어원들을 쌩으로 외워서 지금 우리네가 그나마 이리 사는겨. 쟤들 밤낮으로 걍 책만 판겨 이꽈애들은. 그리곤, 적폐소리를 듣는거야. 

 

이 조구들. 조선사구들은 말야. 이건 짐승도 아니고. 벌레야 벌레. 걍 저 시체 파먹는 구데기 수준이야 이게.

 

저런 애들이 이 땅에선. 영웅이고 열사고 투사야. 존경받을 위인이고 선생이야. 참 끔찍한 땅이야 .

 

이제 곧 반미놀이를 할거고 말야. 자연히 중국과 손잡고 북조선과 한민족이 되는겨 이게. 지금 돌아가는 꼬라지가 그러네. 

 

쟤들도 지들의 꿈을 이루면서. 속으론 좀 떨리는겨 ㅋㅋㅋ. 아 이게 맞나 진짜? ㅋㅋㅋ. 

 

자기들만의 단어였걸랑. 외세에 굴복하지 말고 떳떳 당당. 저기서 외세.는 정확하게 미국.과 일본.이야 쟤들에겐. 

 

그러면서 배부른 돼지가 된 길빠닥에서 벗어난 층 애들은 자기 자식들을 또 양키와 일본 땅에 유학을 보내는겨.

 

저긴 쟤들의 무슨 가치.니 이념이니 이딴것도 없어. 조선 사구 시절.의 걍 진영 놀이야 저게. 모든 시민단체니 환경단체가 입 싹 닫고 침묵하는거 봐. 쟤들은 걍 자기편가름 놀이 이외엔 없어 저게. 

 

저게 사구.야. 조선 사구. 조구야 조구. 조구의 후예들인데. 머 그타고 왜구니 원구니 처럼 칼질도 못해. 떼거지로 모여서리 뺏는 짓만 할줄 알아. 걍 시체파먹는 떼거지 구데기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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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제가 되시고 프리드리히1세.가 늙어서 다시 가는게 3차 레반트 십자군이야. 이때 잉글랜드 사자심왕 리차드.와 프랑스 쪼다 필리프2세.가 가는거고. 여기사 살라딘.과 만나는거야. 이 십자군이야기가 재밌는겨 이게.

 

헌데 저때 저 할배황제가  터키땅 가는길에 심장마비로 죽어. 

 

On 10 June 1190, Emperor Frederick Barbarossa drowned near Silifke Castle in the Saleph river  

 

실리프케 성.이 토러스 산맥 아래. 지중해 해변이 있는 곳의 살레프 강.이야. 오른쪽 더 가면 레반트입구야. 저때가 6월10일 이야. 터키 땅 맨 아래 지중해 접하는 해변이 위도가 36도.야. 여기가 우리네 대전.이랑 같어. 서울 아래여. 지중해변이야. 저때 한창 더울때걸랑. 프랑크들은 저때 갑옷 입고 오는겨. 스텝 투르크애들이  희안하고 싄기한거고. 얘들은 펄럭 옷차림에 말에서 활쏘는 애들이걸랑.  아이언맨들이랑 싸운겨 생전 첨으로. 그래서 다 뺏긴거고 초기에. 

 

더운겨 저기서 걍 강에 드갔다가 68세 노인네가 걍 급사한거야. 

 

조선 역사를 유럽사에 비교해선 안되는게. 쟤들은 킹 자체가 참전 하는 애들이야. 조선이나 중국은 안에서 하렘놀이 집단 강간놀이 하면서 공자왈 하는 애들이걸랑. 이런걸 마치  당연한듯이 푸는데 말야. 조선과 중국은 당연히 킹은 칼 잡아선 안되는 거예요. 유럽애들은 깡패 칼잡이들이라서 전쟁하는거구요. 이렇게 미리 선을 거버려 이 사가들이.

 

이 조선과 중국이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당연히 없는거야. 자기들은 당연히 하렘놀이 돈놀이 법망놀이를 해도 되는 애들.이라는 정의의 사도 란 인식이 찐한겨. 자기들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는겨. 그건 불법이 아니고. 자기들은 당연히 해도 돼. 왜냐면 니덜 불쌍한 인민들을 따뜻한 감성팔이 하면서 위로해주고 무상으로 처먹게끔 적폐들 뜯어서 나눠주면서 길빠닥에 잠깐 쇼잉하던 목소리가 아프던 깜빵놀이했던 해온 인생이라. 자기들은 당연한겨 저 무의식이. 

 

이 조선과 중국. 조구와 짱구.는 그래서 저런게 없어. 자기 스스로 위험 무릅쓰고 희생이란걸 해 본적이 없는 핏줄들이야 이게. 저런걸 유럽은 당연한 칼잡이. 극똥은 글자 문 글월 문 의 문치주의 라 당연히 나서서는 안돼. 로 선을 거.  비열하고 치사한 역사 해석이야.

 

더러운건. 조구 사구 라는 애들도 더럽지만. 더 추악하고 역겹고 비열한건. 현대에 저렇게 지들의 조상들 조구사구를 예찬하는 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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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스문트3세.가 66년생이고. 저때 32세야. 쇨더만란드 공작인 나중 스위든 킹 카를9세.는 48세야. 조카와 삼촌.

 

요한3세.가 죽은게 1592년.이야. 이 아들 지기스문트.가 5년전 나이 21세. 1587년.에 폴란드 카먼웰스 킹에 올라. 아주 새파란 나이에 오른겨. 저때 오스트리아 대공작이랑 전쟁도 한거고. 어리지만 당찬겨 얘가. 5년 후에 스위든 킹인 아빠가 죽어. 스위든 킹 대관식을 2년 후1594년에 한겨. 좀 늦어. 스위든에서 먼가 찝찝한거였지. 어쨌거나 스위든 킹 실질되고 6년후에 1598년 전쟁을 한거야. 폴란드에서 바다건너 가는건데.

 

Fleming managed to quell the revolt but died in April 1597. Roughly at the same time, a letter arrived from Sigismund's headquarters in Poland stating that he would not accept Charles as regent. The Duke then used a tactic which his father had employed, namely to resign from office. However, the response was not what Charles had been hoping for: the King accepted Charles's resignation and invested complete power in the Privy Council.

Despite the difficult situation, Charles summoned another illegal Parliament the same year, this time in Arboga. Only one of the Privy Councillors showed up. The reason was that Charles's goal of deposing Sigismund had now been revealed, and the men understood that a serious revolt was brewing.[1] When Duke Charles threatened the absent men with severe punishment some of them lost courage. Erik Gustavsson Stenbock, Arvid Gustavsson Stenbock, Erik Larsson Sparre [sv], Erik Brahe (1552–1614) [sv]and Sten Banér [sv] fled immediately to Sigismund.  

 

직전에 핀란드 곤봉 농민전쟁 커즐 워.가 진압이 되었지만. 핀란드 귀족인 클라우스 플레밍 Kaus Fleming 이 죽었어. 핀란드는 지기스문트.의 아빠 가 공작이었고 킹한거고. 아들이 이어받은 완전한 지기스문트 나와바리야. 핀란드인 귀족 플래밍 가문이 대리하는거고. 카를 공작이 의회 소집해서 섭정을 선언하는데 지기스문트가 안받아. 카를이 사임을 해. 이런 하야 놀이.가  흔한겨. 헌데 이게 뜻대로 안돼. 스위든 내부적으로도 지기스문트 와 카를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지기스문트는 그래 삼촌 내려와 하는거고. 다시 의회 소집해서 단도리하는겨 카를.이. 이러면서 지기스문트 편 귀족들이 폴란드로 도망가는겨. 그리고 지기스문트.가 넘어오는건데.

 

In February 1598 Sigismund assembled an army consisting of merely 5,000 men, mostly Hungarian and German mercenaries.[1] A larger army had been proposed, but had been dismissed since Sigismund expected Swedish forces to join him, and also did not want to come into conflict with them.

The advisers and the King expected military support from Finland and Estonia (homes of the Swedish gentry formerly commanded by baron Klaus Fleming). They also wanted help from Denmark–Norway and pro-Sigismund parts of Sweden. The diplomat Laski was dispatched, but Denmark did not show any interest. 

 

지기스문트.가 2월달에 병력을 소집해. 저게 재밌는게 말야. 용병이야 용병. 끽해야 5천명이야. 대부분 헝가리에 독일땅 용병이야. 용병으로 먹고사는겨 헝가리와 독일저지대 란츠크네히트.야. 

 

저때도 유럽은. 걍 천단위야 저 전쟁이. 가장 오해하는게 유럽사의 전쟁이야. 쟤들은 용병을 쓰고 끽해야 수천 단위면  큰 전쟁인겨 저게. 아시아 의 전쟁과 전혀 개념이 달라. 아시아 전쟁은 수십만 단위의 약탈이야. 수십만을 동원하려면 돈이 어마무시한거야. 저걸 유지할 수가 없어. 약탈을 허용하는거야 그래서. 그래서 중국들 전쟁을 보면 전쟁 터지면 그야말로 지옥이 되는겨. 아주 도시 자체가 흉가가 돼. 흑사병 중세 이후 거대한 세 번의 시기가 청나라때까지. 그 시작은 중국이라는 나라야. 

 

제1차 페스트 범유행(541년 ~ 750년): 이집트에서 시작해 지중해 세계(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를 거쳐 북서 유럽으로 전파.

제2차 페스트 범유행(1345년 ~ 1840년):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 중국 쪽으로도 전파되었을 가능성 있음. 흑사병도 제2차 범유행의 일부.

제3차 페스트 범유행(1866년 ~ 1960년대): 중국에서 시작해 전세계로 전파. 특히 인도와 미국 서해안의 피해가 심했음

 

저게 다 역사서술이 잘못 번역이 된겨. 1차는 오호난화 오호십육국때 하서주랑에서 퍼진겨. 고고학적으로 티나와. 이게 유럽으로 간겨. 2차.는 몽골애들이 화북점령하면서 생긴거고. 3차는 청나라애들이 운남성에서 백만명 이상 죽이면서 퍼진거야.

 

이 중국 역사는. 후짐들의 역사야 이게. 

 

두 애들이 남들한테 역사를 직시하라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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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당시 지기스문트.가 폴란드 킹 11년차야. 스위든 킹6년차고. 폴란드에선 기반을 확실히 다진겨. 스위든에서 왔지만 엄마가 정통 야기에워 가문이야. 얜 완전히 폴란드 에서 짱이야 스위든 바싸가문이지만. 동유럽은 야기에워 땅이야 당시.

 

폴란드 귀족애들이 당연히 지기스문트 편을 드는겨. 응모해 자기들도 가겄다고. 지기스문트가 이걸 거절을 해. 자기 삼촌을  우습게 본거야. 스위든 자체는 자기땅이야. 더하여 핀란드도 자기 세력이고. 리보니안 전쟁 끝나고 에스토니아라는 스위든도 자기세력으로 믿는겨. 저 에스토니아 도 저게 핀란드에 마주한 핀란드 스위디시.가 저기에 들어간거걸랑. 덴마크도 자기편 들어줄줄 알았는데 거절당해. 덴마크 이야긴 나중에 하고 또 새면 안되니까 말야.

 

5천명 용병 데리고 간겨 외국인 용병을. 2월에 모아. 헌데 정작 5월에 건너가. 바람때문에 특히나. 지중해와 마찬가지로 저기가 덴마크 섬들에 가려서 발트해가 지중해 못지않은 변덕바람의 바다야.

 

출발이 단치히.야. 지금 그다인스크.라고 한글로 이름 바꾼. Gdansk.

 

저 지도를 보면. 당시 단치히.Danzig 는 로얄 프러시아.야 Royal Prussia. 저 강이 비스와 Vistula. 폴란드 중심가르는 핵심강이야. 이 오른쪽이 프러시아 더치. 공작령이야.

 

둘다 어차피 폴란트킹.에 하미지 하는겨. 둘다 튜튼 기사단이야. 로얄프러시아.는 로마 카톨릭이고. 더치 프러시아.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이전 튜튼이고. 해서 두 튜튼은 웬수야 이게.

 

왼쪽이 포메라니아.야. 원래 저 단치히 포함 작게 있던 포메라니안.이라는 슬라브의 땅들이 자기들 고향땅을 튜튼에 뺏기고 왼쪽으로 이동해서 메클렌부르크 까지 넓어진겨 이게. 지금 폴란드 포메라니안.은 그래서 이게 게르만들이 많아. 게르만들이 메클렌부르크.에 포메라니아 까지 와서 슬라브와 섞인거야. 

 

Gdańsk (/ɡəˈdænsk/, also US/ɡəˈdɑːnsk/,[2] Polish: [ɡdaj̃sk] KashubianGduńskGermanDanzig [ˈdantsɪç] 

 

폴란드어로 그다니스크.여 원래. ń 폴리쉬 에 엔. 에 위 어큐트 엑센트. 날카로운 강조. 라는 다이어크리틱.이 붙으면. 무조건 .니. 로 읽으라는 지령이걸랑 저건. 해서 폴리쉬.는 그다니스크.고 게르만은 단치히.라고 부른거고. 카슈비안.Kashubian 이란건 포메라니안.의 자식들이야. 여기가 원래 포메라니안.의 고향이야. 이들이 왼쪽 해변으로 옮겼지만 이 언어족은 사라진겨 지금. 

 

グダニスクポーランド語Gdańsk グダーィンスク、 

 

이걸 일본분들께서. 구다인스쿠.로 읽으셨걸랑. 그래서 요걸 모음 살짝 바꿔서 그다인스크. 한거야. 지금 그다니스쿠.로고 제대로 발음표기로 지명 업그레이드를 한겨. 이걸 우리네 표기는 여전히 구글 한글 지도가 그다인스크.고. 백과사전 이름은 그단스크. 영어식 표기고. 저 구글지도 지명들 다 일본 발음의 잘못된 옛날의 카타카나.를 한글로 표현한게 지금 쓰는 도시 이름 나라 이름.이야. 일본들은 이걸 다 바꿨어. 우리넨 여전히 옛날 일본이 발음한 걸 쓰는거야. 왜냐면. 직접 번역할 능력 의 대갈통이 안되걸랑 이 인문계 들이. 니넨 내가 이런 말 하면  과한 소린줄 알텐데. 천만이다.

 

저 테레비 팔이 책팔이 하는 모든 문꽈 인문계 지식인 놀이 하는 애들은 모두 조구사구 의 벌레 수준의 지능으로 보면 돼.

 

저 그다니스크. 단치히.가 폴란드 중심 아래 크라크푸.에서 바르샤바에서 저까지 흐르는 비스와강변.의 도시야. 이게 폴란드의 핵심도시야. 한자동맹의 도시였어 그래서. 폴란드 물자가 여길 통해서 드나드는거야 중세에.

 

저기가 시작이 포메라니안.이야. 이들은 폴란드 초기 더치.에 하미지 안한 독립 지역이야. 그러다 튜튼이 저 위 칼리닌그라드 부터해서 이리로 내려온거야. 포메라니안.은 여길 튜튼에 뺏기고 왼쪽으로 이동해서 넓어지면서 더치.를 세우면서 폴란드 킹에 하미지를 하는거고. 

 

월드 워 때도 여기가 핵심이야. 월드워 원.때 이 도시는 폴란드 땅이 아냐. UN 유엔에 속한 독립 도시야. 그래서 폴란드가 바로 위 항구도시를 이때 새로 만든게 그디니아 Gdynia 그디냐 란 도시야.

 

그다니스크.가 역사적으로 힘든 도시야 그래서. 저기 위 쭉 곶이 병풍막이 하면서 항구도시로 최곤겨 심해가 깊고. 나치때 여기가 또한 중심이고 전장의 중심이고. 이 오른쪽 해변에 또한 아우슈비츠 같은 캠프 만들어. 십만여명이 죽은 곳이 이쪽이야 캠프에서.

 

아우슈비츠.는 독일어 지명이고. 폴리쉬로 Oświęcim 오슈비엥침.이야. 여긴 크라크푸 서쪽에 있어. 110만 명을 죽인걸로 보고 여기 90퍼가 유대인으로 보고.

 

야 정말  머 역사부정법 이란걸 만든다면서 말야. 반나치법에 홀로코스트 부정법.을 벤치마킹으로 들이대면서 어쩌고 하는데 말야.

 

홀로코스트 5백년의 나치 애들이.  나치 찬양 이상으로 처벌하겠다는 발상.은 정말 기가 막히진 않아. 

 

 

조구사구.의 조선 오백년은 홀로코스트 5백년으로 보면돼.

 

차라리 조선 오백년을 찬양하면 역사부정한다 법을 만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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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프리드리히1세 황제가 3차 십자군때 급사하고. 이때 따라온 게르만 기사들이 주인장 잃고 내려가서. 튜튼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레반트에 남아. 튜튼이 기원전 고대로마때 게르만들이야. 이들이 여기 있다가 폴란드 피아스트 더치.가 프러시안 십자군 요청하고 간게 서기 1225년 전후고. 이들이 2백여년 저기 있다가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에 완전히 대패하고. 1466년에 로얄 프러시아.로 폴란드에 고개숙이고. 1525년에 오른쪽 프러시아 더치.가 생긴겨. 

 

Meanwhile, three Protestant leaders, Nicolaus Olai BothniensisLaurentius Paulinus Gothus and Ericus Jacobi Skinnerus [sv], attempted to stop the Finnish Sigismund loyalists. They were able to get the support of the farmers of Uppland, and after some minor fighting, Stålarm's men withdrew. They felt threatened by Duke Charles's navy, and were ordered not to get involved in any major battles. This event has been somewhat peculiarly named "The Sausage Campaign", because the farmers captured the Finns’ bags, containing sausages. The Sausage Campaign was a minor victory for Duke Charles. The greatest threat was coming from the south  

 

지기스문트.는 아래 바다에서 스위든 아래 해변에 닿는거고. 위에선 핀란드인들이 동쪽에서 스톡홀롬 쪽으로 오는겨. 클라우스 플레밍의 자식들이 있는거야 지기스문트에 충성하는. Uppland 우프란드.가 스톡홀롬 바로 위야. 이걸 막기 위한 카를.쪽 프로테스튼트들이 니콜라우스 올라이 보트넨시스. 로렌티우스 파울리누스 코투스. 이들이 모두 대주교야. 신학자고. 나이 50에 35세야. 주교들이 무기를 드는겨 이게. 이게 종교전쟁이 되어버린겨. 폴란드 지기스문트가 은연중에 카톨릭에 빠진겨. 원래 폴란드는 종교를 그리 안따져. 귀족들은 후사이트에 프로테스탄트도 많고 저당시. 자모이스키.도 칼뱅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전향을 햇지만 자기 국가 이익을 위해서 프로테스탄트인 스위든.과 손잡고 로마카톨릭 합스부르크는 피하자 는 사람이걸랑. 

 

리더들이 이념에 빠지면. 그 나라는 반드시 몰락을 하게 되어잇어. 이건 인간 역사의 항진명제야. 조구사구의 이념의 나라는 이말이 먼지 몰라. 

 

저기에 프로테스탄트 스위든 농민들이 합세하고. 핀란드가 쫓겨나. 저걸 소세지 캠페인.이라고 해. 핀란드 애들 가방에 소세지가 많았걸랑. 얘들이 도망가면서 가방을 버린겨. 즉 소세지가 쳐들어온겨 스위든에. ㅋㅋㅋ.

 

At the end of May 1598 Sigismund landed on Swedish soil at Avaskär. The King opened peacefully by sending the diplomat Samuel Łaski to Kalmar for negotiations. His task was to convince the city's commanders to open the gates. However, the negotiations led nowhere. Instead, the King took his soldiers and marched on Kalmar. The army halted just outside the city. The plan was to frighten the commanders into opening the gates. To make his message even more terrifying, Sigismund threatened the city with severe punishments and to withdraw the nobility of all children in the city. The propaganda worked well and Sigismund was able to make his long-desired entry on August 1. 

 

지기스문트.가 아밧케르.에 도착해 그다니스크.에서. 스웨덴 남쪽 해변 오른쪽 끝이야. 바로 돌아 올라가면 칼마르.야. Kalmar 칼마르 유니온.의. 여기가 스톡홀롬 다음 핵심도시야. 협박 위협으로 성문을 열어 들어가. 

 

아직 스위든.이 저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겨. 지기스문트.가 당연히 쎄. 구스타브 바싸.의 직계야 얘가. 어쨋거나 카를 공작.은 정당성이  약한겨 구스타브의 막내라지만. 

 

After the fall of Kalmar, Duke Charles found himself with major trouble on his hands. The Polish Crown army attracted Swedish followers and Stockholm, lacking military defence, was easily taken with the help of the nobility and officers of Götaland. After this event, the cavalry of Uppland joined up Sigismund, and new forces were mobilised in Finland and Estonia.  

 

칼마르가 그냥 떨어진게 카를한텐 큰거야. 구스타브 바싸 시작이 교회 바꾸고 제도 바꾸고 징병제를 유럽최초로 만들었지만 이 군대가 초기엔 농민들로 구성되서 전쟁에 약해. 용병들에 안되는겨. 독립 직후 덴마크랑 그래서 전쟁할때 재수로 이긴겨 덴마크가 용병에 대금지급 늦어서. 에스토니아.는 이전 핀란드지역과의 연으로 갖고 온거고. 그러다 다시 덴마크랑 7년전쟁에 다시 리보니안 전쟁하면서 막 군사력을 갖춘거걸랑. 이러면서 힘을 많이 뺏긴겨. 킹은 폴란드로 가고. 계속된 전쟁으로 세금은 더 올리고 재정이 약해지고 군사력이 예전만 못해. 지기스문트3세가 5천명만 데리고 간 이유야. 스위든을 우습게 볼 수 밖에 없고. 얘가 코트를 스위든에 안 있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이유야. 당시 폴란드 카먼웰쓰 코트가 훨씬 화려한겨 당시엔. 스위든은 갓 독립한 촌동네야 이사람 시선에선. 저리 칼마르 앞에서도 호탕 치니까 문이 그냥 열린거고. 

 

그래서 예타란드.의 귀족들과 공무원들이 지기스문트에게 몰리는거야. 소세지캠페인 의 핀란드도 다시 회복해서 내려오는거고. 

 

스톡홀롬.도 폴란드 로 돌아왔어. 카를 공작은 이 아래 왼쪽 쇠더만란드.가 자기 터.야. 

 

The Battle of Stegeborg took place on a meadow near Stegeborg Castle, Sweden on September 18 (N.S.), or September 8 (O.S.), 1598.[4] It is part of the so-called War against Sigismund, in turn part of the Polish–Swedish Wars  

 

스티에게보리. 스톡홀롬 과 쇠더만란드 아래의 해변.이야. 지기스문트가 접수된 스톡홀롬에 가려고 여기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가 폭풍으로 다시 난파되고 병력잃고 다시 와. 이때 백여명만 있던걸로 봐. 이걸 알고. 위에서 내려오는 삼촌 카를.이 수천명을 데리고 야밤에 기습을 하는겨. 스티에게보리 전투. 이걸 지기스문트.가 눈치를 챘어. 여기서 삼촌 카를.을 죽일 수 가 있었는데. 살려주는겨. 자긴 스위든 킹이야 여전히. 삼촌 죽이러 온게 아니란거지.  

 

쟤들은 저런 맛이 있어 후계자 전쟁을 해도. 동양 빠닥에선 저런 게 있을 수가 없어.

 

어쨌거나 말야. 저때 삼촌 카를.이  쪽팔린겨. 자긴 세속을 떠나려해. 주위 귀족들이 말리는겨. 저게 9월 8일 이야

 

The Battle of Stångebro, or the Battle of Linköping, took place at LinköpingSweden, on 25 September 1598 (O.S.) [5]and effectively ended the personal union between Sweden and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that had existed since 1592. In the battle, an army of c. 8, 000–12,000 commanded by Duke Charles defeated a mixed force of c. 5,000–8,000 consisting of an invading army of mercenaries  

 

스톤예브루 전투. 린셰핑 전투. 9월 25일. 즉 조카한테 목숨 구하고 17일 후야. 린셰핑 이 스티에게보리.의 왼쪽 내륙이야. 여기서 다시 붙은겨. 린셰핑.은 도시 이름이고. 스톤예브루.는 이 도시 안에 지역이름이야. 

 

스위든 알파벳.에 å 위에 링.을 오버링.이라는 다이어크리틱.은 장음. 길게 발음하는겨. 원래 아~.야. 헌데 이게 시대변화하면서 오~ 가 돼. 해서 저 에이 오버링 알파벳.은 무조건 오~로 읽어. 스위든의 알파벳 O 오.는 우. 발음이야. 

 

만명 내외씩이야. 큰 전쟁이야 저게. 여기서 카를 공작.이 이기는겨. 지기스문트는 탈출하고.

 

만약에 스티에게보리.에서 지기스문트.가 삼촌을 죽였으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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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스위든 전쟁.은 리보니아 에서 잠깐 부딪힌듯 만든 한겨. 스위든은 걍 에스토니아.만 거기 귀족이랑 손잡고 자기꺼 한거일 뿐이야. 스위든의 적은 노브고로드.야. 리투아니아와 같이. 12세기 전후부터 러시아 전신과 안좋은거지 폴란드는 친해. 폴란드는 스위든.과 사이가 좋았어야 해. 아니면 걍 다 먹던가. 저때 죽이고 스위든을 아예 통째로 먹던가. 

 

얘가 32세로 겉멋만 들은거야. 21세에 킹을 하고. 먹으려면 죽이고. 아니면  친하게 진해던가. 폴란드는 스위든.을 적으로 두면서 끝의 시작을 간거야. 문제는 러시아야 러시아. 러시아도 적. 스위든도 적. 아래 오스만도 적으로 만들고. 이 지기스문트 가 특히나 후반에 완전히 폴란드를 걍 역사속에서 죽이려고 작정을 한겨 이 인간은. 마치 지금 조구사구의 어디민국을 보는 듯 한데 말이지. 

 

The Polish–Swedish War (1600–11) was a continuation of struggle between Sweden and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over control of Livonia and Estonia, as well as the dispute over the Swedish throne between Charles IX of Sweden and Sigismund III of Poland.  

 

그리고 바로 다음해. 폴란드 애들이 다시 스위든과 전쟁을 하는겨. 서기 1600-11. 리투아니아 위.야. 카먼웰스라 같은 나라가 되었고. 스위든.이 에스토니아.에서 아래로 잠식을 하는거고. 지기스문트.는 자기 공약이었어 에스토니아.를 폴란드에 주겠다며 여기 킹을 한거걸랑. 스위든 킹 자리 미련도 있고. 이전 에 진건 재수없어서 진거고. 동유럽 최강국이야 저때도. 자기들에겐. 동쪽 이반4세는 들어왔다가 밀려 나갔고. 스위든은 얘들 눈에는 유치하게 보이는겨 여전히. 

 

저때 얀 자모이스키.는 아래 몰도바.가서. 왈리키아의 용감 미하이.가 세운 보이보드.를 내쫓고. 오스만이랑 타협 다시 보고는 저 리보니아 로 가는겨 스위든과 싸우려고. 자모이스키.는 하기싫은 전쟁 억지로 간겨 저게 말년에. 

 

Jan Zamoyski, fresh from his victory against the Moldavians, came in to help against the Swedes, with 12,000 men, and 50 artillery pieces, 15 of which were classified as heavy. Charles was unable to deal effectively with such an army and was forced to retreat. However, during the retreat he left sizable numbers of defenders at various captured fortresses in Livonia. Zamoyski now took to siege warfare instead of chasing the retreating King, soon capturing Wolmar(Valmiera) and Fellin (Viljandi, Felin). By 1602, the Swedes were only left with control of Reval (Tallinn, Talin, Rewl), Pernau (Pärnu, Parnau, Parnawa), Hapsal (Haapsalu, Hapsalu) and Dorpat (Tartu). However, Zamoyski, now 60 years old, had fallen ill and Chodkiewicz took command and laid siege to Dorpat. At Wesenberg (Rakvere), he defeated a Swedish reinforcement force under Arvid Eriksson Stålarm sent to relieve the Swedish troops in Dorpat. The town surrendered in April 1603.[1]  

 

얀 자모이스키.가 스위든과 전쟁시작하자 마자 리보니아로 간거야. 12000명과 50개의 대포. 그중 15개는 좀 큰대포. 카를 9세가 안돼. 스위든은 폴란드에게 안돼 원래. 아직은 아냐 스위든의 시대가. 스위든이 아래 리보니아땅에서 다시 다 쫓겨나고 북쪽 가운데 해변 탈린.(레발)만 남은겨. 자모이스키.가 저걸 다 한겨. 할배여 이사람은. 그리곤 지기스문트.한데 가서리 비난  해대고 왜 스위든이랑 척지냐 이색햐 닐 내가 왜 델꼬 왔는디. 그리곤 병걸려 죽은겨.

 

이사람 죽고. 끝난거야 폴란드는. 그리곤 이 지기스문트.가 합스부르크.와 손을 잡는겨 이게. 악수만 두는겨. 자모이스키.가 가장 두려워했던 수걸랑. 그래서 오스만과 또한 적이 되는거고. 오스만이 쳐 올라와서 폴란드가 적극 개입을 해야 해. 이전까진 오스만은 폴란드랑 친했어. 저게 로마카톨릭 이랍시고 지 종교전쟁을 하는겨 이게. 폴란드는 그따위 종교 이념 과는 철저히 격을 둔거였걸랑. 그래서 저 종교전쟁판에 휩쓸리지 않았던겨. 후사이트들 칼뱅들 루터들 로마 카톨릭들이 걍  같이 있었던 폴란드야. 얘가 망친겨 이 폴란드를. 스위든 애가 와서리. 

 

Jan Karol Chodkiewicz (c. 1561 – 24 September 1621; Belarusian: Ян Караль Хадкевіч, Jan Karal ChadkievičLithuanianJonas Karolis Chodkevičius) was a military commander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rmy who was from 1601 Field Hetman of Lithuania, and from 1605 Grand Hetman of Lithuania, and was one of the most prominent noblemen and military commanders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of his era. His coat of arms was Chodkiewicz, as was his family name.  

 

얀 카롤 홋키예비치. 이사람이 얀 자모이스키.를 이어서 전쟁을 하는겨. 리보니아에서. 

 

The Battle of Kircholm (27 September 1605, or 17 September in the Old Style calendar then in use in Protestant countries) was one of the major battles in the Polish–Swedish War. The battle was decided in 20 minutes by the devastating charge of Polish–Lithuanian cavalry, the Winged Hussars.[3] The battle ended in the decisive victory of the Polish–Lithuanian forces, and is remembered as one of the greatest triumphs of Commonwealth cavalry.  

 

키르콜름 전투. 리가만 아래.야. 전장터 중심이 리가.아래에 다우가바 강 Daugava 하류야. 여기 먹으면 리보니아 다 먹은겨. 이걸 홋키예비치.가 일대삼 소수 병력으로 이겨. 저때는 이미 대포와 플린트락 총싸움이야. 현대전과 다를게 없어.

 

헌데 폴란드 세임에서 병참 지원이 안되는거야. 세금도 잘 안걷히고 이 체제가 먼가 시안해진겨 폴란드가. 귀족애들도 예전의 정체성이 사라져. 저 지역을 스위든과 뺏고 뺏기는거야. 그러다 스위든 카를 9세가 죽어. 1611년. 그러면서 전쟁이 잠시 끝나는겨. 즉 에스토니아 아래의 라트비아 땅은 영향력이 딱이 어디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어중간한 지역이 돼. 

 

The Battle of Khotyn or Battle of Chocim or Hotin War[7] (in Turkish: Hotin Muharebesi) was a combined siege and series of battles which took place between 2 September and 9 October 1621 between a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rmy and an invading Ottoman Imperial army.  

 

홋키예비치.는 나중에 오스만2세 술탄.과 전투인 코틴.전투에서 죽어. 이것도 소수병력으로 저 대규모 술탄부대를 이긴겨 드네스트르 강(니스터) 하류에서. 얀 자모이스키.를 잇는 이들이 훌륭한 이들이야 다들. 저당시 킹과 귀족들이 쓰레기라서 그렇지. 저때 오스만 술탄 오스만2세.가 예니체리 애들에게 암살당하는겨 전쟁패배후에. 

 

저 오스만과의 전쟁이 역시 아직 지기스문트3세 살아있을 때야.  오래살았어. 3년전에 독일 종교전쟁 30년짜리 시작하고. 자모이스키도 죽었겄다 합스부르크랑 손잡고 오스만은 적이되서리 쳐들어오는겨 술탄이 직접. 이걸 그래도 홋키예비치.가 가서 막아. 죽고.

 

Prince Krzysztof Radziwiłł (Christopher Radvila, LithuanianKristupas Radvila) (22 March 1585, Biržai – 19 November 1640) was a Polish-Lithuanian noble (szlachcic), and a notable magnate, politician and military commander of his epoch. Sometimes referred to as Krzysztof Radziwiłł II, to distinguish him from his father, Krzysztof Mikołaj 'Piorun' Radziwłł.  

 

자모이스키. 홋키예비치.를 잇는 사람이 크리스토프 라지뷰.야. 리투아니아 귀족이야. 

 

 

The Polish–Swedish War (1617–18) was a phase of the longer Polish–Swedish War (1600–29). It continued the war of 1600–11 and was an attempt by Sweden to take Polish pressure off Russia.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was then also fighting Tartars and (on the southern front) the Ottoman Empire. Russia and Sweden were at that stage allied, prior to the Ingrian War, part of Russia's Time of Troubles. The 1617–18 war's cause was a dispute over Livonia and Estonia, and a dispute between Sigismund III Vasa and Gustavus Adolphus over the Swedish throne.  

 

스위든.은 카를9세의 아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구스타브2세.가 즉위해. 이사람이 독일 30년전쟁.에 후반전에 스위든이 참전하면서 마무리되는겨. 30년 전쟁의 주인공은 스위든.이야. 이사람이 죽고서도 딸 크리스티아나 때 계속 이어가. 이 크리스티아나.는 스위든 역사에서 욕꽤나 먹는데. 로마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걸랑. 이여잔 정치에 관심이 없어. 문화에 미친여자야. 르네상스를 이여자가 하는겨 개인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스위든이 가만 안 납두는거고. 말로는 재정 낭비 사치 어쩌고 하지만 이미 스위든은 건국이후 전쟁하면서 재정이 약해. 저 여자탓을 하는거지. 저 여잔 죄없어. 이후 카를10세가 구스타브 바싸.의 딸의 핏줄이야 가문이 다를 뿐. 지금 스위든 킹.이 가문이 다르지만 아빠의 모계쪽으로 구스타브 바싸의 피야. 스위든의 바싸의 사람들이야. 

 

아돌푸스.가 킹이 되서 다시 리보니아.로 가는겨. 프로테스탄트들이 힘실어주고.  저게 1617-18 이야.

 

저 스위든을 리보니아에서 상대하는 사람이 크리스토브 리지뷰.야. 폴란드 코트.는 지원안해주고 해도 저 스위든을 다 막는겨. 도시 리가 위로 쳐들어오고. 리지뷰.는 리투아니아 사람이야. 이때 스위든.이 지키는 땅은 쿠를란드 젬갈리아 공국.이야. 리보니안 십자군 기사단장이 리가만 주위로 만든 큰 공국령이야. 폴란드 카먼웰스에 하미지 하는겨. 여길 리지뷰.가 막아내 스위든으로 부터. 그리고 지기스문트.한테 이걸 리투아니아.로 복속시켜달라해. 카먼웰스 소속이면 이게 폴란드 킹덤꺼냐 리투아니아 대공국꺼냐 애매한거걸랑. 확실하게 리투아니아로 달라.는걸 거절당해.

 

리지뷰.는 칼뱅이야. 지기스문트는 로마카톨릭이고. 리지뷰.는 자모이스키 처럼 합스부르크는 안돼. 지기스문트는 반대고. 헌데 지기스문트가 늙어 암살당해 죽고. 이 다음 두 킹.이 얘 두 아들 들이 바싸들이 이어가는겨. 얘들도 로마 카톨릭이야. 합스부르크 편을 드는거고. 이래저래 자모이스키 후예들은 안되는겨 정세가. 

 

폴란드는 이 상황에서 스위든과 전쟁하면서 러시아 암흑기 내전때 러시아를 먹을라고 쳐들어가는겨 얘들이. 이 지기스문트는 정말 폴란드란 나라를 망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이야. 러시아의 복수야 2백년지나 폴란드 지우기는. 

 

이 상황에서 오스만과 적이 되고.

 

The Polish–Swedish War of 1621 to 1625 was a war in a long-running series of conflicts betwee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nd the Swedish Empire. It began with a Swedish invasion of the Polish–Lithuanian fiefdom Livonia. Swedish forces succeeded in taking the city of Riga after a siege. The Commonwealth, focussed on war with the Ottoman Empire (such as the battles of Cecora and Chocim), was unable to send significant forces to stop Gustav Adolf, and signed a truce favorable to Sweden. The Commonwealth ceded Livonia north of the Dvina (Düna) river, and retained only nominal control over Riga. The new truce in Mitau (Jelgava, Mitawa) was signed and lasted from November 1622 to March 1625  

 

구스타브2세 아돌프.가 다시 리보니아로 쳐들어가. 핵심은 리가만의 리가.야 여전히 지기스문트3세때고. 이전에 30년 전쟁 터진거고 유럽대륙은. 리가를 쳐들어가서 리보니아 를 대부분 갖고 오는겨 스위든.이. 이 다우가바.강 위쪽은 다 스위든께 돼. 쿠를란드 젬갈리아의 반. 즉 지금 라트비아 땅 반까지해서 그위 에스토니아까지 스위든 땅이 돼.

 

The Polish–Swedish War of 1626–1629 was the fourth stage (after 1600–1611, 1617–1618, and 1620–1625) in a series of conflicts between Sweden and Poland fought in the 17th century. It began in 1626 and ended four years later with the Truce of Altmark and later at Stuhmsdorf with the Treaty of Stuhmsdorf.  

 

구스타브2세 아돌프.가 이 다음엔 저 다우가바 강 아래로 내려가고. 다음엔 칼리닌그라드 프러시아 더치.땅에 그다니스크(단치히)쪽인 로얄 프러시아.에 비스와 강을 따라 쭉 올라가서 바르샤바 근처 까지 들어와. 음청난겨 이 구스타브2세 아돌프가. 

 

그리곤 독일30년 전쟁. 후반전에 참여하는겨. 스위든이. 유럽대륙 본토에 이제 이름을 새기게 되는거야 스위든이. 

 

Christian IV (12 April 1577 – 28 February 1648) was king of Denmark and Norway and duke of Holstein and Schleswig from 1588 to 1648. His 59-year reign is the longest of Danish monarchs, and of Scandinavian monarchies.

 

이때 덴마크 킹.이 크리스티안 4세.야. 11세에 킹이 되어서. 초기에 지기스문트랑 카를공작이랑 전쟁할때 중립을 선언하고 안껴. 이사람이 덴마크에서 60년을 킹을해. 71세에 죽어. 스위든 보다 먼저 독일 30년 전쟁에 뛰어들고는 걍 찬물에 몸담그고 바로 돌아와. 이사람이 외교적으로 국제정세 보는 눈이 없는겨. 저때 덴마크.가 그나마 안전했지만. 반대로 힘을 못키우고 스위든이 주도하게 되는거야 뒤를 이어서. 스위든 땅의 자기들 해변을 다 뺏기는거고.

 

뒤의 스위든 엠파이어.하면서 스위든 땅인 아래 예타란드 해변에서 덴마크를 다 내몰고 서포메라니아.에 에스토니아 리보니아까지 갖고 오게 된건 저 카를9세의 아들 구스타브2세 아돌프.가 깔아준겨 저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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