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장년에 상좀 바단냐. 거떨 좀 주라니까니. 트키나 요즈믄 테레비를 전혀 안봐서리 영상도 안보고해서리 파니 어찌 도라가고인는지도 몰거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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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을 좀 보면, 오스만이야기는 이전 몇번 얼핏 썰했지만. 오스만도 저 유럽 이야기가 풀려야 얘들이 풀려이게. 
 

 

오스만.의 시작은 쇠위트. sogute. 지금 터키 수도 앙카라.는 월드워 원.때 패하고 이때에야 투르크애들 수도가된겨. 처음엔 쇠위트. 다음엔 Bursa 야. 오스만 시작이 죽고 2대 때 저기 부르사.로 옮겨서. 그다음 저 왼쪽끝에 에디른. Edirne 이 아니라. 에디르네.야.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이름의 폴리스.의 투르크발음이야. 그리고 메메드2세가 콘스탄티노플.의 투르크발음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며 여기가 주구장창 수도였던거야. 

 

 

오스만은 창립하고. 북쪽 흑해와 서북쪽 마르마라해.와 서남쪽 에게해로 가는거야. 동쪽은 관시미가 없어. 이 동쪽은 콘스탄티노플 함락하고 메메드2세가 정벌하기시작하는겨. 150년 후에. 

 

The Sakarya (Turkish: Sakarya Irmağı, Greek: Σαγγάριος, 

translit. 

Sangarios) is the third longest river in Turkey. It runs through what in ancient times was known as Phrygia.

 

사카리아 강. 이 저 아래 터키 중부에서 발원해서  얘가 오른쪽으로 휘어서 저 보믄 polati 폴라티를 에서 확꺾여서 서쪽 쇠위트 위로 해서 벨레지크.에서 다시 꺾여서 북쪽 흑해에 카라수 Karasu. 로 흘러가. 앙카라.에도 이 강의 지류가 흘러서 저기가 수도가 된거야. 이게 터키에서 세번째로 긴강이야. 오스만의 젖줄이 이 강이야. 오스만은 북쪽으로 이강따라 카라수까지 점령하러간거야.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으로 가면서. 발칸으로 건너간겨 다음부터. 

 

이즈니크. Iznik 이즈미트 Izmit. 

 

Nicaea or Nicea (/nˈsə/; Greek: Νίκαια, Níkaia; Turkish: İznik) was an ancient city in northwestern Anatolia, and is primarily known as the site of the First and Second Councils of Nicaea (the first and seventh Ecumenical councils in the early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he Nicene Creed (which comes from the First Council), and as the capital city of the Empire of Nicaea following the Fourth Crusade in 1204, until the recapture of Constantinople by the Byzantines in 1261.

 

Nicomedia (/ˌnɪkəˈmdiə/;[1] Greek: Νικομήδεια, Nikomedeia; modern İzmit) was an ancient Greek city in what is now Turkey.

 

쇠위트.에서 서북쪽으로 바로 이즈니크. 이즈니크 라는 호수.의 동쪽접한 도시야. 이게 니케아.라고 오역된 니카이아.라는 도시야. 니케아 공의회.로 머리에 심어진. 이걸 요즘에야 니카이아.라고 바꾸는 중이여. 

 

더 위로 가면 이즈미트.가 있어. 여긴 마르마라해.의 만.에 접한겨. 호수가 아냐. 이게 니코메데이아.였어.

 

오스만이 바로 쳐내서 모는게 니카이아.의 비잔틴이야. 이게 가장 중요한 전투여. 그러면서 비잔틴이 아나톨리아에서 물러나는겨 발칸에만 머문거고 저기서쫓겨나서.

 

 

ニカイアΝίκαια)は、古典ギリシア語で「ニケ(勝利)の街」を意味する都市名である。中世ギリシア語・現代ギリシア語ラテン語ではニケアで、ニカエア、ニケーアと書かれることもある。ヘレニズム世界の各地に同名の町が複数あり、フランスニースの古名もニカイア(ニカエア)である。

 
일본애들이 저걸 지금 니카이아. 라고 하지만, 그러면서. 중세 그리스어. 현대 그리스어. 라틴어.로는 니케야. 니카에야. 가 있었다. 라고 저건 이들이 변명하는거걸랑. 
 
The place is said to have been colonized by Bottiaeans, and to have originally borne the name of Ancore (Ἀγκόρη) or Helicore (Ἑλικόρη), or by soldiers of Alexander the Great's army who hailed from Nicaea in Locris, near Thermopylae. The later version however was not widespread even in Antiquity.[1] Whatever the truth, the first Greek colony on the site was probably destroyed by the Mysians, and it fell to Antigonus I Monophthalmus, one of Alexander's successors (Diadochi) to refound the city ca. 315 BC as Antigoneia (Ἀντιγονεία) after himself. Antigonus is also known to have established Bottiaean soldiers in the vicinity, lending credence to the tradition about the city's founding by Bottiaeans. Following Antigonus' defeat and death at the Battle of Ipsus in 301 BC, the city was captured by Lysimachus, who renamed it Nicaea(Νίκαια, also transliterated as Nikaia or Nicæa; see also List of traditional Greek place names), in tribute to his wife Nicaea, who had recently died.[1]
 
저게 고대에는 안코레. 헬리코레.라고 그리스어로 표기했다가. 알렉산더의 사트랍인 안티고노스.이름따서 안티고네이아 했다가. 니카이아. 라고 뤼시마코스.가 바꾼겨. 이걸 라틴어로 Nikaia 또는 Nicaea 였어. ae 발음은 아에.가 아니라. 아이. 야. 카이사르 caesar 를 카에사르.라고 안하는것처럼. 저 일본위키가 썰하듯 니카에야 던 니케야던 한 적이 없어.
 
얘들이 이걸 니카에야. 니케야.로 잘못 읽었던겨 일본애들이. 이걸 고대로 한글로 뻬껴서리. 모음 살짝 바꾸고 니케아. 한거고. 니케아 공의회.가 아냐 니카이아 공의회.라 다 바꿔야해. 저건 잘못된 번역이야. 공의회.란 단어도 누구가 만든 말일까. 우리말은 정말 심각한겨 이게. 모~~~~든 말이 일본애들 말이라 보면 돼. 찔끔 중국이말이 섞인거고. 
 
영어로는 나이시어. 항상 영어발음도 같이 외워. 소크라테스.는 영어로 사커티즈.야. 
 
 
니코메디아.가 아냐. 니코메데이아.야. 영어 니코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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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이나 인도나 중국나. 얘들 이야긴. 왜 저들은 저리 개들이 되었나.란 관점에서 보면 돼. 
 
특히나 게르만이 중세에서 티나올때. 인도나 중국는 외계인수준의 문명이야. 얘들이 왜 망하고 근대를 실패하고 지금 강가늬 왕구기 되언냐는거지.
 
인도에 대한 아름다운 성스러운듯 이미지는 백퍼 주작된겨. 인도는 지금 똥덩어리 국가야 그게. 겐지스강은 똥천지야. 
 
저것도 유럽애들이 한몫한건데 저런 이미지 주작작업이. 유럽애들이 마치 말이지, 자기들 문명을 낮추고 동양 문명을 오리엔탈리즘 신비적 으로 띄우면 진보적인양 열린 인간인양 대접을 받는거걸랑. 해서 쟤들 영화가 동양빠닥을 그릴땐 환타지를 그리는겨. 리차드 기어.가튼 애들이 띄우걸랑. 저러면 마치 진보적인 인간인양. 거기에 빠져서 가서 강간 당하고. 병 걸리고. 저긴 문명이 아냐 지금도. 이집트도 별다르간. 하물며 중국.
 
조선이 그 똥바닥 천지에서 그나마 쟤들보다 나은겨. 이게 이유가 있어. 헌데 또한 곧 쟤들 따라가는겨 다시. 이게 이유가 있어. 저럴 가능성이 지금 짙은겨 이게. 불쌍한건 다음세대 애들 부터지. 길가다가 꼬마애들 보면 불쌍해. 재들은 끔찍한 세상을 겪게 되걸랑 이 이념의 땅에서. 머 나랑 먼상관이람 얼렁 뒈지면 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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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뉴스보니까. 풍수가 불길해서 옮겨야한다 ㅋㅋㅋ. 근거가 머냐니까 근거가 많대. ㅋㅋㅋ
 
 
저앤 정말 야 저따위 들 저 꼰대 들. 저 치자층에서 저 조선 이야기를 사람들 대갈빡에 심는 들. 위대한 문화 개하는 들 저거. 저 대부분 이야기는 조선이걸랑 저게. 1100년전의 문화는 다 죽었어. 남아있는것도 별로 없어. 조선 오백년동안 조오오온나게 지웠걸랑. 가장 큰게 책이야 책. 한국문집총간에 양만 따져도 95퍼센트가 조선시대 글이야. 끽해야 시작이 최치원이야. 그리곤 건너뛰어서 고려말 조선초야. 고려사 고려사절요 란 사서도 조선시대 글이야 그게. 모~~든게 조선이야. 다른 책들 갖고 있으면 목짤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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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6월 1일 을유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장례 제도를 의논하면서 서운관 구장의 참서를 불태울 것을 명하다
"내가 서운관 구장(舊藏)의 참서(讖書)509) 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직도 있다는 말인가? ..., 나만이 믿지 아니하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만약 참서를 불살라 버리지 않고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事理)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깊이 믿을 것이니, 빨리 불살라 버리게 함이 이씨(李氏) 사직(社稷)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損失)됨이 없을 것이다."
 
하교(下敎)하여 참서(讖書)를 금하였다. 예조(禮曹)에 교지를 내리었다.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11월 5일 병진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하교하여 참서를 금하다
"참위(讖緯)·술수(術數)의 말은 세상을 미혹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이 심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마땅히 먼저 버려야 하기 때문에, 이미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요망하고 허탄(虛誕)하여 바르지 못한 글을 골라서 불에 사르게 하였다. 이제부터 서울과 외방에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요망하고 허탄한 글은 오는 무술년 정월까지 한하여 자수하여 바쳐서 역시 불살라 없애게 하고, 만일 혹시 정한 기한까지 바치지 않는 자는 여러 사람이 진고(陳告)하도록 허락하여 조요서(造妖書)의 율에 의하여 시행하고, 범인의 가산은 고한 사람에게 상으로 충당하라."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2월 29일 계사 3번째기사 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참서와 비기를 감추어 두었던 자를 귀양보내게 하다
 
참서(讖書)와 비기(秘記)를 감추어 두었다가 탄로난 자는 도신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한 뒤에 세 차례 엄형(嚴刑)하여, 해도(海島)로 정배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배윤현(裵胤玄)의 일로 인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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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에도 저을 하는겨. 지들 생각과 다른 이야기는 참언이야. 예언주작이고 거짓이고. 비기. 비밀 요사스런겨. 다 태우고 다 잡아 족쳐.
 
 
 
조선이 가장 추악하고 역겹고.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개 다. 라고 지미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저게. 인간을 생각을 못하게 만들고. 다른 생각을 안하게 하고. 편협 얄팍 망상질의 유교놀이만 하게 한겨. 이 후유증이 지금 이 시대의 치자들을 낳은거야. 이건 아주 지긋지긋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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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7월 22일 계유 7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풍수학 제조 전 중추원 부사 조비형이 풍수학의 중요성에 관해 아뢰다
풍수학 제조 전 중추원 부사 조비형(曺備衡)이 아뢰기를,
 
"가만히 보오니, 풍수의 학문이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여 옛 사람들의 술법이 정미하옵거늘,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게다가 왜곡되게 배운 것으로 외곬으로만 고집하는 무리들이 속된 습관에 만족하고 좁은 소견에 구애되어서, 이미 자기의 그른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당나라로부터 송나라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유신들에게 명하여 사천감(司天監)을 맡아 영도하게 하고, 또 비각(秘閣)의 책들을 내어주며 초야의 술법 학자를 찾아 가지고 다르고 같은 것은 교열하고 검토하여 모두 이치에 맞게 하여 세상에 통용되게 함으로서 정치에 유익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집을 짓고 무덤을 쓰는 것은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 이를 보내는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날 고려 때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지리의 서적을 청했던바, 송 태조가 베낀 책을 보냈기에 그것에 따라서 시행은 하였으나 그 이치를 터득하지 못했고, 겨우 이 이치를 조금 안다는 자도 아직 오활하고 괴망하여 상식 없는 말을 면하지 못하여서 유식한 학자들에게 미워서 싫어함이 되었으니, 어찌 음양학의 죄라 하겠습니까. 우리 왕조에서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정함에 있어 모든 학문에 다 훈도(訓導)를 두어서 정밀하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사온데, 오직 풍수학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 그것을 논설하는 자들이 각기 편벽된 소견을 가지고서 모두 제가 옳다 하고 서로 배척하여 시비를 다투오니, 어찌 음양의 일에 정한 이치가 없어서 한결로 귀착되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신이 어리석고 미련한 몸으로서 두 번째 제조(提調)의 어명을 받자오매, 이 학문이 잘못 쓰이고 있음이 깊이 걱정되옵니다. 원하건대 유신들 중에 뜻있는 자를 명하시어 훈도를 삼아서 여러 서적을 참고하고 징험하여 깊이깊이 연구하여 한결로 귀착되게 하여 신진의 길을 열어 주시면, 사람들이 여러 갈림길에 미혹하지 아니하고 술법이 바로잡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조에서 의논하여 아뢰게 한바,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조에 명하여 적당한 자를 가리어 훈도에 임명하게 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8월 3일 양력 1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심순택이 홍릉의 새 터를 간심하고 와서 보고하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은 오랫동안 시골 집에 있었으므로 지사의 이름도 모르고 누가 나은지도 모르며 또 신과 같이 풍수학(風水學)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지사를 고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저 깊이 헤아려서 하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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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은 시작부터 풍수학.에 제조. 提調. 를 둬. 풍수학을 관장하는 관아에 제조.라는 당상관이야. 저따위 학문에 대한 공식 중앙관직을 두는겨. 고종때도 저 을 하는겨. 서기 1900년에.
 
 
해서 여전히 . 선거만 하면 머 모든 들이 묘자리를 옮기느니 어쩌니. 
 
청와대도 풍수가 안좋아서리 대똥녕들이 다 운수가 안좋은겨 ㅋㅋㅋ. 
 
 
 
이게 문명이냐 문명이냐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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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애들이 이땅바닥에선 원로고 석학이고 위인이야. 
 
 
‘집단지성의 성채’ 위키백과, ‘지식정보의 편향’ 넘을 수 있을까
국내 연구진 위키 빅데이터 분석
적은 비율 슈퍼편집자 존재 확인
왕성한 편집으로 헌신하지만
소수의 편집 불균형도 심해져 
위키 편집자는 백인남성 중심
여성 관련 문서 적은 젠더 편향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7109.html?_fr=mt1#csidx894e9fd3334a12bbee1750c3e5cf179 
 

오늘 기사. 위키가 편향적이다. 백인남성 중심이다. 참 개소리도 저따위 개소리가 없어. 

 

영어 위키 대부분은 말야. 쟤들 딕셔너리. 사전.에서 대부분 갖고 온겨 이 개걸레신문아. 그저 백인우월주의 시선 어쩌고 저쩌고. 영어를 읽을 능력은 안되고, 좀 알아도 깊은 맥락을 모르니 내용파악은 안되고, 걍 백인애들이 다 점령한겨 백인 남성애들 시선으로 도배가 된겨 할 줄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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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처음 지도에서. 오스만.이 베이. bey 가 되는 베일리크 beylik 지역이. 아나톨리아 서북부야. 셀주크로부터 시작한 베이.라는 타이틀이야. 저곳이 고대에 비튀니아. 야  Bithynia. 

 

 

Asia Minor in the Greco-Roman period (332 BC - 395 AD) 

 

이전에 로마얘기할때 저것을 축약한 이미지.를 봤는데. 저 지명은 익숙해야해. 저 시기가 기원전 332년에서 기원후 395년 이라지만.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에 나오는 지명과 거의 같아 저게.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특히나 저 지도 를 모르면 재미가 없어. 지도 이해없는 이야기는 의미없어. 걍 그시간에 잽.이나 봐.

 

흑해 남부가. 비튀니아. 옆에 파플라고니아 Paphlagonia. 옆에 폰투스 Pontus 옆에 아르메니아. 저 끝에 콜키스. 가 보여. 황금양모피 종착역이야. 아르메니아.는 엄청난 나라야 저게. 3천년 역사 내내 전쟁에, 월드워때는 터키애들에게 150만이 학살을 당해. 그래도 저 나라가 지금 있어 저 지명이. 조지아.와 함께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면 꼭 구십도 허리 꺾어서리 인사를 하도록해. 조선민족으로썬 넘볼수 없는 피곤함을 이기고 살아오신 분들이야. 

 

저 아래 가운데에 갈라티아 Galatia 가 있어. 이건 저때 막 생긴 나라이자 지명이야. 

 

Alexander III of Macedon (GreekΑλέξανδρος Γ΄ ὁ Μακεδών; 20/21 July 356 BC – 10/11 June 323 BC)

 

저 지도는. 알렉산더형이 태어나시고. 딱 20세 되신 전336년에 마케도니아 킹에 오르시고 그 다음해인 전335년에 출발하실때여. 그리고 다음해인 334년 비씨.에 헬레스폰트를 건너신겨. 그당시 부터의 지명인데.

 

아 이 알렉산더 형님 언급할땐 웬지 존대를 해드려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이 생기네 이거.

 

 

갈라티아.는 알렉산더 형님 출현하실땐 없는 지명이야.

 

From their new bases in northern Illyria and Pannonia, the Gallic invasions climaxed in the early 3rd century BC, with the invasion of Greece. The 279 BC invasion of Greece proper was preceded by a series of other military campaigns waged in the southern Balkans and against the kingdom of Macedonia, favoured by the state of confusion ensuing from the disputed succession after Alexander the Great's death. A part of the invasion crossed over to Anatolia and eventually settledin the area that came to be named after them, Galatia.

 

갈라티아. 갈리아인들의 땅이란겨. 켈트여 그리스어로. 켈토이. Keltoi 가 켈트.가 돼.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기 쓰면서 저들을 갈리. Galli 한겨. 이게 갈리아. 골. 한겨. 사람과 땅을. 이들이 기원전 279년에 그리스를 쳐내려오는겨. 더하여 이들이 바다건너 아나톨리아로 가서리 저 아플라고니아.의 아래에 정착을 한겨. 여기 중심이 앙카라.야 지금 터키 수도. 이 갈라티아가 가운데 길죽하게 퍼져. 갈라티아.는 알렉산더 형님 하늘나라 가시고 나온 이름이야. 일리아스엔 없어.

 

 

갈리아애들이. 로마약탈한게 기원전 390년.이야. 7개월을 아주 아작을 내. 이때 로마는 망했어야해. 로마인들이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버티고 내려와. 쟤들은 아주 로마를 개작살내고 더이상 놀고 먹을게 없어서 떠나고. 

 

얘들이 백년후에 간 곳이 발칸땅인겨. 로마는 백년 전에 당해서. 이때부터 강국이 된겨. 고대로마는 저 갈리아애들의 사망직전까지의 약탈.에서 탄생한거야. 이때부터. 원인을 찾고. 그리스 벤치마킹을 하고. 체제를 바꿔. 이 조선 민국에선 꿈도 못꾸는겨 저 2500년전의 로마인을. 오직 남탓. 오직 적폐. 오직 일본. 오직 양키. 참 세상에 이딴 족속들이...많지 참. 후진애들 공통점이야 지금. 

 

갈리아애들이 로마로 다시 갈라다가, 못가는겨 오 달라졌어. 해서 알프스 돌아서리 그리스로 쳐내려간거야.

 

저때 로마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계속 확장할때걸랑 반도에서. 남단 발굽까지 간거야. 해서 여기 그리스사람들이 본토에 퓌루스. 퓌로스.를 부르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왔다리 갔다리 이긴듯 진듯 하다가 돌아가걸랑. 해서 퓌루스의 승리. 하면 이겨도 진 전쟁.으로 사람들이 놀리는거고. 

 

갈리아들의 발칸 쳐 내려가는건 저때야. 저당시 마케도니아의 그리스땅은 알렉산더 형 죽고 디아도코이 후계자들 시절이고. 에피루스.의 피루스.가 당시 마케도니아랑 친하걸랑. 퓌루스가 로마에 가서리, 병력이랑 돈이 부족해서 마케도니아 킹에 지원요청을 해. 거절당해. 그리고 결국 패하고 돌아온겨. 그러면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에게 복수를 하는겨 니 왜 안 도와줬냐고. 그리곤 스파르타 내려가고 아르고스.에서 어떤 병사의 엄마가 지붕위에서 던진 짱돌에 맞아 주그시는데.

 

할때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킹은 저때 갈리아족들이 걍 그리스를 쳐 내려올때걸랑. 여건이 안되는겨 퓌루스를 도울. 저당시 갈리아애들이 텟살로니카 아주 남단 델파이 까지 갔어. 그리곤 트라키.지나서리 위로 보스포로스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로 가서리 저 갈라티아.에서 정착을 해. 

 

저 서부에. 뮈시아 뤼디아 카리아 뤼키아. 저 해변에 이오니아. 눈여겨 봐야해. 남부해변 킬리키아 Cilicia 여기가 해적들 본거지고 고대의. 시리아와의 경계가 카파도키아. 글라피라.가 헤롯 장남에게 시집갔던 곳. 

 

폰투스.가 왼쪽 팜플라고니아.도 먹어. 그 옆 비튀니아.라는 오스만 베일리크.는 고대로마의 동맹국이야. 이 비튀니아.의 니코메데스4세.가 카이사르 게이상대 소문난거고. 폰투스.는 미트리다데스.로 유명해. 로마가 술라.랑 카이사르 고모부 마리우스.랑 내전할때 로마를 치려했다가 술라 수하 루쿨루스.가 조지면서 역사에서 사라지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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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루스.가 돌아가고. 갈리아족들도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고. 퓌루스.를 부른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이. 카르타고 막을려고 로마를 부르는거고. 이때부터 포에니전쟁이 시작되는거고. 하면서 포에니전쟁 이후에 퓌루스에 대한 복수질겸 로마가 그리스를 먹으면서 아나톨리아로 진출하는데 말야. 

 

이때 가장 먼저 분위기를 알고 로마의 푀더라티. 동맹국에 끼들어간게 저 비튀니아.라는 오스만의 땅이야. 바로 마르마라.를 접하고. 니코메데이아.가 고대로마때 두개네개 나눌때 아나톨리아의 수도인 이유야. 마르마라에 바로 접한겨. 아래 니카이아.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에 접한겨. 휴양지로 좋은겨. 해서 여기서 이름있는 공의회가 열린겨 자주. 

 

바로 저기 오른쪽 접한곳이. 오스만이 시작한 터.인 소위트.인거야. 

 

 

이곳이. 비튀니아.의 고대로마도 그렇거니와. 이전 고대그리스.의 이오니아.지역이라 총칭하는 아나톨리아 해변.의 문화에는 안들어가지만 저 기운이 스민겨 저기가. 그러면서. 로마가 발흥할때는 로마를 찐하게 습한곳이 여기야. 더하여 비잔틴때는 콘스탄티노플 세우기 전에는 여기야 중심이. 수도가 옮기고서도 비잔틴이 찐한겨 지정학적 위치로. 동과 서의 접점이야. 

 

오스만.시작이 터가 좋은겨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오스만 서기 1299년. 이전의 1500년 쌓인 문명이 이후의 오스만을 만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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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tugrul (Ottoman Turkish: ارطغرل‎, Turkish: Ertuğrul Gazi, Erṭoġrıl; often with the title Gazi) (died c. 1280[2]) was the father of Osman I, the founder of the Ottoman Empire. While his historicity is proven by coins minted by Osman I which identify Ertuğrul as the name of his father, nothing else is known for certain about his life or activities.[3]According to Ottoman tradition,[1] he was the son of Suleyman Shah, leader of the Kayı tribe of Oghuz Turks, who fled from eastern Iran to Anatolia to escape the Mongol conquests. According to this legend,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Ertuğrul and his followers entered the service of the Seljuks of Rum, for which he was rewarded with dominion over the town of Söğüt on the frontier with the Byzantine Empire.[4] This set off the chain of events that would ultimately lead to the founding of the Ottoman Empire. Like his son, Osman, and their descendants, Ertuğrul is often referred to as a Ghazi,[5] a heroic champion fighter for the cause of Islam.

 

오스만.의 아버지.가 에르투룰. 영어 얼투구럴. 

Ğ (g with breve) is a Latin letter found in the Turkish and Azerbaijani alphabets, as well as the Latin alphabets of Laz, Crimean Tatar, and Tatar. It traditionally represented the voiced velar fricative /ɣ/ or (in case of Tatar) the similar voiced uvular fricative /ʁ/ in all those languages. However, in Turkish, the phoneme has in most cases been reduced to a silent letter, serving as a vowel-lengthener.

 

지 G 위에 누운 초승달 부호.를 브리브 breve. 라고 해. 이전 시 시딜러.처럼 로마.가 이민족 발음으로 새로운 글자를 만든겨 자기들 알파벳 발음에 없는. short brief. 짧은소리야. 스텝 발성중에 나는 소리. 기본은 소리나는 벨라 프리커티브.란건 벨라.가 입천장 안쪽 뼈없는 연한곳. 연구개여. 여서 나는 마찰소리. 크. 야. 보이스드.란건 유성음이란겨. 그.에 가까와. 여기서 나는 소리야. 발음을 해보면 알아 입 구조를 느껴봐. 헌데 유독 투르크.말은 저 글자는 졸 생략.해서 소리가 아예 없어. 저 그.소리를 내는데 무지 빨리 내서 안들리는겨. 해서 저걸 에르투그룰. 로 읽지 말고 에르투룰. 로 읽어야해.

오스만의 아빠가. 당시 아나톨리아는 럼셀주크. 로마셀주크여. 셀주크의 먼 사촌이 여기와서 세운겨 독립하고. 콰리즘 샤.와 같은 시기에. 에르투룰.의 아버지는 오구즈 투르크.의 카이 부락.의 추장이었는데 이란동쪽으로 갔다가 이 서쪽 끝으로 옮겼다 몽골을 피하려고. 아버지가 죽고. 즉 오스만의 할배가 죽고. 에르투룰.과 추종자들은 럼셀주크.로 고개숙여 들어갔다. 여기서 소위트. 마을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비잔틴에 접하는. 에르투룰.은 가지. Ghazi 로 언급된다. 가지.는 이슬람의 뿌리를 지킨 역사적인 전사.에 대한 호칭이다.

오구즈 투르크.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쪽접한겨. 서기 550년에 선 투르크국 돌궐국이 분열통일분열통일 2백년하면서 스텝에 다시 온갖 투르크들이 난립을해. 저 돌궐국이 망할때가 무함마드가 막 나와서 이슬람이 시작할때야 레반트에서. 해서 투르크들이 슬라미가 되는겨 저때부터. 우마이야 압바스가 왼쪽은 비잔틴에 막히고 오른쪽에 윗쪽으로 가면서 저 흩어진 투르크들을 점령해나가는거고. 점령못한곳의 경계지역들도 이슬람을 받아들이는거고 스텝들이. 우마이야는 이베리아반도로 가고 압바스는 바그다드나 카이로에서 자리잡으면서 교황위치로 가서 칼리프하고 레반트와 이란땅과 스텝은 아랍족 페르시안족 투르크족들이 자잘한 술탄에 칸으로 자리잡는겨 이걸 카스피해 아래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레반트넘어서 통일하고 곧이어 럼셀주크가 아나톨리아. 화리즘샤가 셀주크 오른쪽 이란땅에 들어서는겨. 투르크와 페르시안이 이슬람이 되면서 저리 크게 세덩어리로 있는거야. 그리고 당시 이집트에서 시작한 아유비드 다음 무슬림노예 맘룩.도 말야. 성루이의 십자군을 십자군국가들을 내몰지만. 얘들도 그 다이너스티의 후기는 투르크족.이 권력이야. 해서 칼리프.가 바그다드에서 카이로로 옮기기도 해.
저럴때 콰리즘 샤. 때메 칭기스칸이 오시는겨. 그리고 훌라구.의 일칸국.이 들어서. 오스만의 할배가 있던 오구즈투르크가 화리즘 샤 있던 곳의 북쪽접경이걸랑. 괜히 몽골사신들 상인들을 다 죽여서리 칭기스칸이 쳐들어와서 오구즈투르크 사람들이 저 부근에서 작게 부족단위로 살다가, 옮긴거야 이란동부로. 즉 아래로 간겨. 여기가 코라산지역이야. 헌데 칭기스칸이 우르겐치에서 대학살을 하고. 도망간 킹. 샤 부자.를 쫓아가잖아. 칭기스칸은 몸소 동남쪽 코라산.으로 수부테이.와 제베.는 서쪽으로 찾으러 가는겨 저 부자.를. 저때가 서기 1221년이걸랑. 파르완전투. 저 시기가 얼추 오스만할배.가 움직이는 이동경로랑 시기가 똑같애 짐이 보믄. 해서 코라산까지 갔다가, 그 샤의 아들 자랄 앗딘.의 .아 음청나 이.때메 칭기스칸이 오는거 또 보고 이사람은 서쪽 끝으로 간겨 아나톨리아 저 맨 끝 비튀니아.로. 몽골애들 피할려고. 수부테이와 제베는 저길 안가고. 코카서스로 해서리 위로 간거걸랑.

그러면서. 여기도

 난세걸랑. 술탄도 좋지머. 그럼 니가 왼쪽에서 비잔틴을 막아라. 당시 비잔틴은 비튀니아까진 있었던거야.저기 럼셀주크.의 술탄한테 가서리 하미지를 하고. 에르투룰 부자가 바쌀이 되서 처음엔 앙카라 옆의 땅을 받아. 여기서 비잔틴을 내쫓는겨 더 왼쪽으로. 이 공으로 에르투룰.이 술탄한테서 쇠위트.땅을 받은겨. 

 

He was most likely born around the middle of the thirteenth century, possibly in 1254/5, the date given by the sixteenth-century Ottoman historian Kemalpaşazade.[12] 

 

Osman became chief, or bey, upon his father’s death in 

c.

 1280.[13] Nothing is known for certain about Osman's early activities, except that he controlled the region around the town of Söğüt and from there launched raids against the neighboring Byzantine Empire. The first datable event in Osman's life is the Battle of Bapheus in 1301 or 1302, in which he defeated a Byzantine force sent to counter him.[15]

 

 

오스만.은 서기 1255년.정도로 봐 출생이. 서기 1280년.에 베이.가 돼. 

 

The Seljuk Empire   

1037–1194

The Sultanate of Rûm (also known as the Rûm sultanate  1077–1308

 

The Khwarazmian dynasty 1077–1231

 

.

The Abbasid Caliphate 750–1258, 1261–1517

 

 

저때를 잘 봐야할게. 레반트 십자군.이랑 싸우는 상대가. 누구냐는겨 대체. 

 

The First Crusade (1095–1099) 십자군이 처음 시작이 서기 1095년이 시작이라지만

 

The Siege of Nicaea took place from May 14 to June 19, 1097, during the First Crusade. The city belonged to the Selduk Turks who surrendered to the crusaders. After the siege followed the Battle of Dorylaeum, and the siege of Antioch all in modern Turkey.

 

첫 전투.는 서기 1097년 6월 19일. 니카이아. 에서야.

In July 1095, Urban turned to his homeland of France to recruit men for the expedition. His travels there culminated in the ten day Council of Clermont, where on Tuesday 27 November he gave an impassioned sermon to a large audience of French nobles and clergy.

 

교황 우르바누스2세.가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하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연설한게 1095년이야. 11월 27일. 해서 이걸 레반트 십자군의 시작으로 보는겨. 지지부진하다가 처음 나서는게 은자 피에르.의 민중십자군.이란 거지떼야. 이 바람으로 귀족들이 나선겨. 먼저 간 민중십자군은 의미가 없어 이건. 걍 다 죽거나 사라져. 저 은자 피에르.만 또 십자군 이야기에서 계속 이후 티나오고. 재밌어 저사람. 아 이 십자군 이야기.를 할려다가 정작 못했는데 말야. 이 이야길 제대로 풀 사람은 짐 밖에 없는데 말야.

 

 

 

해서 연설 다음해에 귀족들이 리쿠르트해서리 출발해서 비잔틴에를 가는겨. 저때 말이지. 니카이아.는 투르크땅이야. 여긴 바다가 아니라 호수야. 이즈니크 호수. 그럼 바로 위에 니코메데이아. 지금 이즈미트. 여긴 바다 만 해변이야. 여긴 비잔틴이야.

 

 

십자군들이 바다건너 편히 쉬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곳이 저 니코메데이아.라는 이즈미트인겨 바다건너서.

 

 

In the eighth century the Emperor Constantine V established his court there for a time, when plague broke out in Constantinople and drove him from his capital in 746–47.[13] From the 840s on, Nicomedia was the capital of the thema of the Optimatoi. By that time, most of the old, seawards city had been abandoned and is described by the Persian geographer Ibn Khurdadhbih as lying in ruins, with settlement restricted to the hilltop citadel.[10] In the 1080s, the city served as the main military base for Alexios I Komnenos in his campaigns against the Seljuk Turks, and the First and Second Crusades both encamped there.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지만, 여전히 니코메데이아.는 황제의 코트로 쓰이는겨 종종. 8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염병이 돌았다. 그래서 수도를 잠시 여기로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840년대 부터는 니코메데이아.는 군사적 요충지로 쓰이는거야. 이미 도시기능은 사라진거고. 군사적 기능만 남은겨 니코메데이아가. 그리고 1080년대에는 여기가 셀주크 투르크를 상대하는 메인 본부가 된겨. 일 이차 십자군의 캠프가 여기야. 비잔틴의 아나톨리아 땅의 마지막 지푸라기인겨 여기가. 이게 백년 후에.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이 점령하면서 오스만것이 돼.

Nicaea (İznik), located on the eastern shore of Lake Askania, had been captured from the Byzantine Empire by the Seljuk Turks in 1081, and formed the capital of the Sultanate of Rum. 

 

이즈니크.라는 니카이아.는 투르크에게 먹힌겨 서기 1081년에. 해서 비잔틴이 계속 로마교황에게 징징대는겨 무슬림좀 막아달라고. 바로 위가 니코메데이아. 이즈미트.야. 니코메데이아가 마지막 지푸라기야. 다시보믄 오래버틴겨 저게. 십자군애들의 힘으로. 성루이의 패배와 인질사건이 레반트만을 뺏긴게 아냐. 결국 터키땅을 뺏긴겨. 지금 터키땅의 주인은 투르크라는 터키애들이 아냐. 쟤들 이전의 주인은 비잔틴이고 그리스야. 비잔틴은 그리스어를 썼어. 해서 말야. 월드워 원.때 그리스가 저 터키땅을 다 먹으려 했걸랑. 터키.는 원래 사라지는겨 지도상에서. 헌데 막판에 저 터키.를 살린게 터키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이야. 얘들 촛불 들때 항상 기대는 상징이야 지금.

 

 

저 영토가 역사적으로 니꺼니 내꺼니. 논쟁하는건. 의미없어. 저런거에다가 말야. 논리를 들이대면서 분노질 어쩌고 하는건 코메디야 코메디. 치자들이 민들 갖고 우롱하는겨 그건. 뻔히들 서로 아는거고 그런걸. 헌데 개무시카게 진짜 저런거에 일생을 거는 애들도 있어. 불쌍한겨.

 

 

 

레반트 십자군 천 전투가. 니카이아.야. 이사람들은 니코메데이아.에서 캠프를 차리고 출발을 한겨. 서기 1097년. 
저때 상대는. 럼셀주크.

Kilij Arslan (Old Anatolian Turkish: قِلِج اَرسلان; Persian: قلج ارسلان Qilij Arslān; Modern Turkish: Kılıç Arslan, meaning "Sword Lion") (‎1079–1107) was the Seljuq Sultan of Rûm from 1092 until his death in 1107. He ruled the Sultanate during the time of the First Crusade and thus faced the attack.[1] He also re-established the Sultanate of Rum after the death of Malik Shah I of Great Seljuq and defeated the Crusaders in three battles during the Crusade of 1101

 

럼 셀주크.가 니코메데이아.를 점령한게 아슬란 술탄.의 애비야. 이 자식이 1차 십자군의 첫 전투 니카이아.전투를 상대하는겨. 

 

셀주크 투르크.가 서기 1037년에 서는데. 얘들이 시작은 니샤푸르. 레이. 이스파한. 이 카스피해 오른쪽아래와 남부야. 저 아나톨리아 땅은 먼 곳이야. 

 

40년 후에 서는게 오른쪽의 콰리즘 샤.와 서쪽 아나톨리아.의 럼 셀주크.야. 콰리즘 샤.의 창업자는 투르크의 노예인 맘룩인데 페르시아핏줄이고. 럼셀주크.는 셀주크의 먼사촌이야. 같은 핏줄이지만 독립국이야 럼셀주크는.

 

그리고 바로 얘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서쪽 비잔틴을 치기 시작한겨. 레반트.는 셀주크. 아나톨리아는 럼셀주크. 이게 전혀 달라. 엄밀히 말해서. 1차 십자군을 아나톨리아 에서 상대하는 애들은 럼셀주크 애들이야. 얘들이 레반트가면서 상대하는 애들은 셀주크 투르크야. 얘들이 서로 연합이 잘 안돼. 

 

 

쟤들은 다 술탄.이야. 바그다드에 있는 압바스 칼리프.는 얜 속세 권력이 없는 듯 보여도. 얜 이슬람의 교황이야. 얘가 술탄들을 지배하는겨. 얘가 저당시 교황이 게르만 군주들 휘두르는것보다 권력이 훨 쎄. 저 두 술탄들이 저당시 핵심이지만. 저 외에 자잘한 칸체제와 술탄체제가 또한 있어. 대표적인게 저 두개고. 칼리프.가 중간에서 얘들 조율을 하는 위치걸랑. 이게 잘 안돼. 칼리프는 점점 허울뿐이게 되고, 오스만 바예지드2세때 이것조차 술탄이 칼리프하게 되는겨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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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이 니카이아.에서 럼 셀주크.를 몰아내고. 다음 전투가. 

 

The Battle of Dorylaeum took place during the First Crusade on July 1, 1097, between the crusaders and the Seljuk Turks, near the city of Dorylaeum in Anatolia. It was won by the crusaders.

 

도륄라이움 전투. 여기가 저 첫 지도에. 예스키셰히르. 란 곳이야. 여기도 상대가 저기 셀주크 투르크.라 하지만. 정확히는 럼셀주크.인겨. 
1차 십자군이 계속 내려가서. 레반트를 막 들어서는 입구가.

The Siege of Antioch took place during the First Crusade in 1097 and 1098. 

 

안티오크. 전투. 안티오케이아. 가 정확한 표기야. 지금 터키땅이 레반트 찔끔 들어간 곳이여. 바로 아래가 레바논이야. 

 

즉 여긴. 셀주크 땅인겨 럼셀주크가 아니라. 이 안티오크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가 상대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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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반트 십자군.은 아나톨리아 땅이 목적이아니고. 오직 예루살렘이야. 1차십자군이 레반트땅을 나눠서리 십자군 국가들을 세울때 이건 예루살렘을 방어하기 위해 주위에 세우는겨. 즉 럼셀주크.는 자기들 땅을 안뺏긴겨. 나중엔 뺏긴곳도 다시 갖고 와.

 

The Siege of Edessa took place from November 28 to December 24, 1144, resulting in the fall of the capital of the crusader County of Edessa to Zengi, the atabeg of Mosul and Aleppo. This event was the catalyst for the Second Crusade.

 

십자군 국가.가 북쪽에 세우는 땅이 에뎃사.야. 여긴 지금 터키 동남부 끝이여. 시리아와 접하는. 즉 레반트 완전 북부야. 위에서 내려오는 무슬림을 막겠다는겨. 저땅을 무슬림이 뺏아. 이때 뺏는 애는 Zengi 젱기 술탄애들이야. 레반트의 셀주크에 하미지 하는 술탄이야. 해서 2차 십자군 전쟁하러 다음에 프랑스 루이7세랑 마누라 문제의 엘레오노르.가 오는겨. 둘이 레반트와서리 돌아갈땐 웬수되서 이혼하고 엘레오노르는 헨리2세랑 재혼하는거고. 

 

 

The Second Crusade (1147–1149)

 

저 2차 십자군.이 1150년 직전에 와. 저 이전에도 사소한 십자군들이 와. 이걸 아나톨리아에서 막는게 럼셀주크였어. 얘가 다 막아 자질구레한 십자군은 레반트 오기전에. 저 2차십자군의 루이 병력을 괴롭히는것도 럼셀주크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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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셀주크의 친척.인 가운데 셀주크.는 왼쪽 레반트는 프랑크애들인 십자군애들이 뜬굼없이 와서 먹었어. 처음엔 얘들이 말야. 대체 저 프랑크란 애들이 왜 오는 줄 몰랐어. 왜 레반트까지 오는지 전혀 감을 못잡아. 비잔틴이 뺏긴 니카이아를 찾을려고 온건가? 니카이아 이겼으면 그냥 갈줄 알았걸랑. 꾸역 꾸역 내려오는겨 쟤들이. 처음엔 얘들이 걍 멋도 모르고 당한겨. 더구나나 투르크 는 스텝 기마족이야. 걍 옷 가볍게 입고 칼질하고 화살 쏘는겨. 더운곳이여 더군다나. 헌데 완전 눈만 빼꼼 하고 온몸을 철갑을 두르고 나타난겨 이상한 애들이. 칼로 아무리 쑤셔보려해도 팅기나가. 저런애들은 처음 상대를 해본겨 이 투르크 스텝애들이. 걍 꼼짝없이 당한거야 그래서. 

셀주크 투르크.가 1194년에 망해. 

The Third Crusade (1189–1192)

 

십자군 3차. 사자심왕 리차드와 프랑스킹 필리프2세가 오는건 저 직전이야. 이걸 상대하는건 이집트에 삼촌따라 가서 아예 파미드를 없애고 아유비드.를 세운 살라딘.이야. 살라딘.은 셀주크 투르크족의 장교야. 이집트에 보냈더만 지가 저기서 다이너스티를 맹근겨. 리차드를 얘가 상대하는겨. 그러다가 필리프2세가 먼저 돌아가서 병딱이 동생 실지왕 존.꼬셔서 앙주땅 뺏고. 리차드가 급하게 돌아가는겨 레반트에서. 그러다 포로되고. 아 리차드 재민는데. 넘어가고.

 

그리곤 살라딘.은 바로 죽어. 60 다되었걸랑. 뒤를 아유비드로 잇는거고.

 

셀주크.가 살라딘 죽고. 바로 망한겨. 3차 십자군후 2년 후에. 

 

얘들은 이미 레반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메소포타미아쪽에서 다른 술탄들이 반란을 하는겨 하미지 하던. 해서 바로 셀주크 투르크는 사라지고. 다른 술탄이 먹고. 

 

The Qara Khitai (alternatively spelled Kara Khitai; Mongolian: Хар Хятан; 1124[note 1]–1218)

 

저걸 또 바로 먹는애들이. 카라 키타이.라는 서요.야. 거란족. 중국에서 여진족 금나라에게 쫓겨서리 여까지 와서 서요.를 세우고 그 아래 코라산까지 가서 저 셀주크를 먹은 술탄을 서요가 먹는겨. 

 

저럴때 동시에. 콰리즘 샤.가 카스피해 오른쪽에서 확장하는거고. 

 

저런걸 다 해결하고 싸그리 정리한게. 칭기스칸이야. 파르완전투 1221년이 저 직후야. 콰리즘 샤.가 파르완전투 직전에 도망가는거고 우르겐치.에서. 망하는 시기 1231년.이라는건 도망다니는 샤.의 아들 자랄 앗딘. 아 음청난 인간. 얘가 죽는 해야. 

 

즉 셀주크 투르크.망하고 바로 콰리즘 샤가 망해. 몽골애들 괜히 죽여서. 

 

그리고 세운게 일칸국.인겨. 훌라구.가 레반트 오른쪽에다가.

 

저때도 말야. 럼셀주크.는 아나톨리아 에 있는거야. 셀주크랑 콰리즘 망해도 백년을 저 서쪽에서 버틴겨. 

 

헌데 얘들은. 일칸국.이란 몽골에 하미지를 해. 바쌀이 된겨 몽골에. 

럼 셀주크.가 오른쪽 몽골에 대들까 하미지 할까. 하는 시절에. 오스만.이 태어나서. 아빠를 이어서. 베이. 영주가 된거야. 그리고 럼셀주크 술탄은 아나톨리아.에 대한 영향령을 점점 잃는거야. 그리곤 오른쪽 일칸국에 들어가는거고.

1299년.에 오스만.은 독립선언을 하는겨. 저 비튀니아 땅에서. 나이 45세 정도로 보는거고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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