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 遷(しば せん、紀元前145/135年? – 紀元前87[1]/86年?[2])は、中国前漢時代の歴史家で、『史記』の著者
漢武帝刘彻(前157年7月30日-前87年3月29日)
사마천은. 한무제 때 사람이야. 유방의 한나라에서 기억할 만한 인간은 한무제.와 후한을 세운 광무제.야
항우가 기원전 202년에 죽어. 유방은 7년 후인 195년에 죽어.
사마천은 저 둘의 이야기 후 육칠십년 후에 나와서리 이야기를 쓴겨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는. 해서 그 이전의 이야기 보다 훨 생생해.
요즘 짐이 글질할 여유가 안되서리 자세히는 못쓰고. 나중에 썰하고 말야.
중국의 이야기는 사마천을 뺄 수가 없어. 사마천의 사기.는 제일 생생한 원자료야 raw data. 후대의 사가들은 이걸 가감하고 주를 더했을 뿐이야.
대게들 사마천의 사기.를 오해하는게. 저 사기.란 이야기를 유자의 냄새로 해석을 해. 특히 이땅바닥 지식인자연 하는 애들은 말이야.
이땅바닥 이 조선민국은 말야. 여전히 유자의 나라걸랑 이게. 미친나라여 이땅바닥이. 여전히 조선을 지폐로 모시는 나라.
사마천은 송이나 명처럼 그리 유자 티를 쎄게 안내. 사마천은 사농공상 지랄 하지 않았어. 화식열전 평준서 를 봐. 후대의 유자들은 저따위 돈벌이 이야기는 말하지도 않아. 사마천은 돈 많이 벌라고 한 인간이야. 사마천은 공자가 주나라 띄우기 식으로 주나라를 띄우지 않았어.
사마천은 무지하게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썰 풀려고 애를 썼어.
삼국지에서 그 왕윤.이 채옹 죽일때도 말이지. 채옹이 대 학자걸랑. 죽이더라도 한서를 쓰게 해달라. 한서를 쓰고 죽게 해달라
왕윤이 그래, 꺼져. 사마천도 니랑 똑같이 한무제님한테 그따위 말로 살아남아서리 사기.를 썼는데 우리네 한고제 한무제 욕질한거 봐라. 너도 우리 한 욕질할거 뻔할 뻔자다 하걸랑.
孔子からの影響
父から「第二の孔子たれ」と厳命された司馬遷は、既に若い頃から儒教の教育を受け、その影響を強く受けた。具体的には、『史記』において人物や出来事の判断基準に、多く孔子の言葉を導入している。これらは、『春秋』『礼記』『論語』から出典不明なものまでを含め、何かしらの論評において「孔子はこう言った」と引用したり、または自らが意見を述べる形式で孔子の著作から言論を襲用している形で書かれたりしている[54]。特に司馬遷は、孔子思想において六芸(「詩」「書」「礼」「楽」「易」「春秋」に大別する文化的伝統[注 4])を重視し、孔子の言を借りて六芸こそが人を正しく導くと述べ[55]、これらを歴史的事象や人物を評価する基準に用いた[56]。
사마천이 아부지로부터 제2의 공자.가 되라고 해서리, 유학을 찐하게 교육받고 글을 쓰민서리 공자 말을 인용한다 하지만, 가만 디다 보믄 꼭 그렇지도 않아. 물론 공자냄새가 나긴 하지만, 후대의 소위 지금 우리네 식의 그따위 공자놀이 정의놀이 잣대로 이야기를 풀지 않아 그따위 편향적으로.
나중에 썰하고. 해서리,
저 중국이야기들 하는 한글러 애들의 대부분의 오류가 머냐면. 저 글자들 속의 사 士. 야
저걸 선비 사. 해서리. 선비하면 유자. 해서 다 유학자다. 유교쟁이다. 란 생각을 암암리에 하고 하게하걸랑.
저 사마천의 사기.를 번역하민서리 저따위 선비 사.란 글자들 나오는데 말야. 저걸 다 선비 하믄서 은근이 그 쓰레기 유학자로 유자로 생각을 하게끔해.
무식한건데
상형자전.의 갑골을 보믄. 저기선 갑골문에서 안보이고 금문부터 보인다 하지만.
(即
,是“又”
的变形)的宽刃战斧
。
造字本义:手持大斧作战的武夫。
도끼를 손에 쥔 형상이걸랑. 부월. 큰도끼를 부. 작은 도끼를 월. 해. 부 나 월은 권력의 상징이야. 지팡이 손잡이 처럼. 집지대부 작전적 무부. 큰 도끼를 쥐고 싸우는 무부. 무사란 뜻이걸랑
周代の身分制社会構造で支配者層は、周王の下に諸侯・卿・大夫・士で構成されて官職と邑(都市国家)を世襲していた。士は支配階層の最下層に位置していた。春秋時代も中頃になると、この階層秩序が崩壊して官職や土地を失うものも現れ、世襲の官職や土地に基づかず知識や力によって仕官する新しい支配者層が士とされるようになり、諸子百家が生まれた。
秦・漢になると古き身分制社会は姿を消し、皇帝による中央集権国家が作られ、民を支配するのが皇帝の手足である「吏」となると、士は在野在朝の才能・知識ある人士を意味するようになった。
三国時代になると在野の士が積極的に求められ、魏・晋は九品官人法という官吏採用法によって士を官吏に登用し、士による政権が誕生することになった。
やがて九品官人法による官吏登用が才能よりも門地が優先されるようになっていくと、士も門閥貴族化し、「士族」と呼ばれるようになる。
宋代、科挙という試験にもとづく官吏登用が一般化すると、貴族政治から中央集権体制へと移行し、読書人が文人官僚となり、士と大夫を併せた「士大夫」といわれる支配階層が成立した。やがて士大夫のための新しい学問が模索され、儒学に朱子学などが登場することになった。
공자가 언제적 인간이냐. 주나라 티나오고 오백년 후에나 나온 인간이야. 저때 사. 란 선비 사가 공자 유교의 선비 사 겄니.
진나라 한나라 때 저 사.가 공자 유교의 사. 겠니. 저때는 유 儒. 유자 라 했어. 공자 따르는 들은 유자 라고 한겨. 사. 라는 건 주나라때 왕 밑에 제후. 여러 후들. 다음에 경. 다음에 대부. 다음에 사. 라는 지배계급층에 제일 아래 단 애들이 사. 제자백가
들이 다 이 사. 선비 사.란 사 애들이야.
진.한 때는 사. 라는 애들은 지방이든 조정이든 재능있고 지식 있는 인사 들을 의미 했을 뿐이고.
삼국시대 부터 저 사.는 특히 재야. 즉 지방이나 산림에 잘 안보이는 애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자 해서리 조조의 구현령.으로 저 사 들을 조조가 적극적으로 찾아다녀. 저 사.가 유학자 사 공자쟁이 유교쟁이 사 겠니.
저게 나중에 송대에 와서리 공자 사후 천오백년이 지나고 이게 쓰레기 이념만 쌓이고 인간들 개돼지 노예로만 취급하는 이념만 남아서리. 이 사 란 글짜를 유자 들이 갖고 가는겨 이게.
유학 유교란건 말야. 인간세상을 죽여. 유학 유교는 인간을 말살하게 해. 그것도 표 안나게 점점. 아주 슬그머니 살며시. 좀먹듯이. 눈에 안띄게. 그러다 막판에야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어느순간 그 세상바닥을 엎어버리게 해. ㅋㅋㅋ 해서 인간들이 이 유학이란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악함인줄 모르게 하는겨
이땅바닥이 여전히 조선 유학자들을 지폐로 모심질 하는거걸랑 그래서.
중국애들은 저게 자기들 나라를 망쳐도 개뼉따귀로 망친걸 뼈저리게 자각해서리 뼈저리게 반성을 해서리 저걸 다 엎어버렸걸랑.
쪽빠리도 그랬어. 수만명을 죽이고 죽여 과거 반성을 하민서리. 그런 피비린내 나는 반성을 하고 메이지 유신을 하는거지
헌데 이놈의 땅바닥은 저따위 유교 유학을 여전히 상전 받들듯이 하고, 조선왕조를 여전히 위대하다 위대하다 하는겨.
사쿠라 가 조선의 위대함을 어찌 압니까? 하는 인간들의 말글이 이땅바닥 사람들의 사유의 천장을 쳐. 낮고 후지지. 저따위 인간들이 이땅바닥에서 위대한 석학이자 소설가이자 지성인이야. 골때리는건데
문제는 저 사마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거니와. 저런 글자 하나하나를 제대로 해석하는 인간들이
이땅바닥에 말야
단 하나.
도 없다는 거지.
사마천의 사기를 한글로 보믄 이거 먼 유학자의 유교이야긴가 하는거고. 전혀 아니걸랑 그게. 사마천은 그따위 정도로 유학쟁이덜을 빨아대지 않았어.
고려때도 무인시대 하잖니? 원래 무사 걸랑. 헌데 조선부터 지금까지 사가들이 말야. 고려 무사 들은 무사 가 아냐. 무인 아니면 무신. 무.를 쥔 신하란 거지.
쪽빠리들의 무사. 부시. 사무라이.는 저따위 선비.니 유교쟁이들이 아녀 절대루다가..
사.란 글자는 선비님들 유교쟁이들만 쓰는 단어란겨 저게 그 이땅바닥 애덜의 무의식은.
짐은 이땅바닥 지식인애들을 혐오 결멸 멸시를 하는데 말야.
고려애들의 무인시대는 무사시대.로 바꾸도록 해. 후진 시대긴 하지만.
본격 중국사.는 다음에 하자. 짐이 요즘 마음의 여유가 안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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