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or the Old (Old East Slavic: Игорь, Igor'; Russian: Игорь Рюрикович; Ukrainian: Ігор Рюрикович; Old Norse: Ingvarr; died 945) was a Varangian ruler of Kievan Rus' from 912 to 945.
러시아 가 류릭 올렉 이고르 의 바랑기안 들인데. 이고르 가 류릭의 아들이고, 올렉은 류릭의 처남 정도로 보고, 이고르 가 조공 받으러 갔다가, 죽어
Igor was killed while collecting tribute from the Drevlians in 945. The Byzantine historian and chronicler Leo the Deacon (born ca 950) describes how Igor met his death: "They had bent down two birch trees to the prince's feet and tied them to his legs; then they let the trees straighten again, thus tearing the prince's body apart."[
드레블리언.이 우크라이나 북부에 드네프르강 서쪽의 사람들이야. 비잔틴 사가 디콘 리오.가 쓰길, 드레블리언들이 이고르의 양 다리를, 각각 버치 나무 가지를 휘어서 묶은겨. 그리고 나무가지를 턱 놓으니까 튕겨 오르면서 찢어 죽인거지.
이고르 의 부인이 성녀 올가 야.
Olga (Church Slavonic: Ольга;[a] Old Norse: Helga; Christian name: Elena; c. 890–925 – 969) was a regent of Kievan Rus' for her son Sviatoslav from 945 until 960.
In the 950s, Olga traveled to Constantinople, the capital of the Byzantine Empire, to visit Emperor Constantine VII.
올가, 가 쎄인트 가 붙걸랑. 남편 죽고 나서, 복수 하고, 콘스탄티노플 가서, 마케도이나조 의 황제 방문하고, 페이건 에서 그리스도 로 개종을 한겨. 이여자 의 손자 가 블라디미르 대제 고 어릴때 키운겨 이 할머니가. 이 블라디미르 가 마케도니아 조 의 안나 와 결혼하는거고, 이 안나 는, 성녀 올가 가 비잔틴 갔을때 황제 콘스탄틴7세 의 손녀 여.
남편이 서북쪽 드레블리안 땅에 갔다가 죽었어. 키예프 로 드레블리안들이 사람을 보내서, 올가 에게 너 우리 두목이랑 결혼하고 니덜 우리 부락 밑으로 들어오라는거지.
After Igor's death at the hands of the Drevlians, Olga assumed the throne because her three-year-old son Sviatoslav was too young to rule. The Drevlians, emboldened by their success in ambushing and killing the king, sent a messenger to Olga proposing that she marry his murderer, Prince Mal. Twenty Drevlian negotiators boated to Kiev to pass along their king's message and to ensure Olga's compliance. They arrived in her court and told the queen why they were in Kiev: "to report that they had slain her husband...and that Olga should come and marry their Prince Mal."[13] Olga responded:
자기들 두목 이 말 Mal 이고. 20명이 와서, 전하는겨. 올가 가, 어차피 죽은남편이 살아나는것도 아니고, 당신들한테 예의를 다하는걸 많은 사람들한테 보이겠다며, 내일 오라는겨. 드네프르 강 따라 보트 타고 온 이들을, 보트까지 사람들이 가마를 태워보내는 의례를 해주겠다며. 자기들이 명령을 하고, 사람들이 태워서는, 바로 구덩이에 산채 로 다들 떨어뜨려 죽여. It is written that Olga bent down to watch them as they were buried and "inquired whether they found the honor to their taste." 올가 가 굽어보며 물었다, 그들이 찾는 입맛에맞는명예를 찾았는지.
Olga then sent a message to the Drevlians that they should send "their distinguished men to her in Kiev, so that she might go to their Prince with due honor."
올가 가 다시, 드레블리안 에 메세지를 보내, 자기를 말 한테 데려갈 보다 고급진 사람들을 보내라고. 마땅한 예의를 다갖춰 달라며. 더 고급사절들이 오고 이들을 목욕탕에 들여보내서 다 태워죽여.
Olga sent another message to the Drevlians, this time ordering them to "prepare great quantities of mead in the city where you killed my husband, that I may weep over his grave and hold a funeral feast for him." When Olga and a small group of attendants arrived at Igor's tomb, she did indeed weep and hold a funeral feast. The Drevlians sat down to join them and began to drink heavily. When the Drevlians were drunk, she ordered her followers to kill them, "and went about herself egging on her retinue to the massacre of the Drevlians."[13] According to the Primary Chronicle, five thousand Drevlians were killed on this night, but Olga returned to Kiev to prepare an army to finish off the survivors.
다시 사절을 보내서, 지금 가니까, 자기 남편이 죽었던 도시 안에 거창한 술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해. 남편 무덤에 대고 울고 장례식을 치루고 결혼식을 하고 싶다며. 그리고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이고르 의 무덤에 가서 울고 장례식을 치뤘고. 드레블리안들이 함께하면서 심하게 취하다. 드레블리안들이 취했을때, 따라온이들에게 명령해서 죽이라고 하다. 이날밤에 5천명을 죽였대. 올가 가 키예프로 돌아와서 나머지들을 죽이려고 군대를 준비하고. 바로 다시 가서 포위를 해. 1년 동안 포위전인데 진전이 없어. 드레블리안 은 결사적이고. 올가 가 협상을 해. 대신, "Give me three pigeons...and three sparrows from each house."[14] The Drevlians rejoiced at the prospect of the siege ending for so small a price, and did as she asked. 각각의 집에 있는 비둘기 세마리 참새 새마리 를 댓가로 달라고 해. 드레블리안 들이 기뻐해, 아주 작은 댓가로 전쟁을 끝내게 되어서. 각 집의 새들을 모아서 줘. Olga then instructed her army to attach a piece of sulphur bound with small pieces of cloth to each bird. At nightfall, Olga told her soldiers to set the pieces aflame and release the birds. 올가 가 모든 새들에, 유황 을 입힌 헝겊조각을 붙이라고 하고, 밤에 그 유황조각에 불을 붙이게 하고는 새들을 모두 날려보내. 새들이 자기 둥지들에 가서 성안의 모든 집들을 다 태우는겨.
올가, 도 바랑기안 이고, 초기에 같이 온.
The Varangians (/vəˈrændʒiənz/; Old Norse: Væringjar; Medieval Greek: Βάραγγοι, Várangoi;[1][2] or Varyags (Old East Slavic: варяже, varyazhe or варязи, varyazi; Russian: варяги, varyagi; Ukrainian: варяги, varyahy; Belarusian: варагі, varahi; Medieval Greek: Βαριάγοι, Variágoi,[3]) sometimes referred to as Variagians,[4] was the name given by Greeks, Rus' people, and others to Vikings.
버랜지언즈. 러시안 바랴기. 그리스어로, 바란고이. 때로는 배리애지언스. 다른 곳에선 바이킹들로 언급됨.
영어로 버랜지언즈. 바란지언즈 면 몰라도, 바랑기안 은 이딴건 없는 말이야. 모든 조선어는 바랑기안 이걸랑.
ヴァリャーグ
일본어로 바랴구. 슬라브 러시안을 쓴겨. 이걸 바랑기안 이라는 듣보잡 말로 돌려 까기 하는거지. 왜냐면, 조선어로는, 저 발음 을 모르는겨. 조선 말 모든게 일본 애들의 가르침으로 발음 하고 뜻 을 밝히는거야.
우리네는 일본이 없었으면, 지금 문명 이란, 없는거야. 이 조선 어족 인간들은, 번역할 능력 지능이 안되는겨 여전히. 마갸르 족을 지금도 마자르 라고 하듯이. 이 일본 말글 속에서 살면서, 이 친조선 적폐 들이, 친일적폐 놀이하면 대단한 냥. 정말 드럽고 추악해 저것들은. 그런 놀이하기전에, 니덜 말글로 된 제대로 된 책을 내. 모든 말글이 일본 말글 로 살면서, 일본애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도 좀 하고
Varjager 스위디시 로, 바리아게르, Væring 노르웨이어로 바링.
Kievan Rus' or Kyivan Rus'[2][3] (Old East Slavic: Роусь, romanized: Rusĭ, or роусьскаѧ землѧ, romanized: rusĭskaę zemlę, "Rus' land") was a loose federation of East Slavic and Uralic peoples in Europe from the late 9th to the mid-13th century,[4][5] under the reign of the Rurik dynasty, founded by the Varangian prince Rurik.
키예반 루씨. 이것도 조선말로 루스 라고 하거든. ルーシ(ルス) . 일본애들이 예전엔 루스 라고 했다가 루시 로 바꿔. 잘못된 소리인걸 알고. 일본들 루스를 여전히 루스 하는겨. 영어발음도 저건 루씨 야.
조선말은 에스 발음은 무조건 스 여. 쓰 씨 이따위로 쓰면 맞춤법이 아닌겨. 참 무식한 맞춤법이야. 스 시 쓰 씨 전혀 이건 소리가 달라. 잘못된 맞춤법 이야. 쓰 씨 로 써야 하는걸 무조껀 스 시 로 쓰는겨. 왜? 일본 발음 이걸랑 ㅋㅋㅋ. 이 조선 말 하는 학자들은, 정말 거시기들이야 저 인문학자 들은.
버랜지언즈. 바랴기. 바리아게르, 라는 단어들은, 게르만 애들 말이야. 노르족 애들. 이걸, 그리스 살마들이 들어서, Βάραγγος 바란고스, 복수 바란고이, 라고 한거야. 맹세의 무리. 라는 게르만말이야.
There are a number of raised stone memorials called runestones throughout Scandinavia of which almost all are found in Sweden. Many date to the Viking Age, and there are many associated with the Varangian Guards. These Varangian runestones commemorate various fallen warriors through carved runes, and mention voyages to the East (Austr) or the Eastern route (Austrvegr), or to more specific eastern locations such as Garðaríki (what is today Russia and Ukraine). The losses that the Varangian Guard suffered are reflected by the largest group of runestones that talk of foreign voyages, such as those known as the Greece Runestones.[19] These were raised by former members of the Varangian Guard, or in their memory. A smaller group consists of the four Italy Runestones which commemorate members of the Varangian Guard who died in southern Italy.
The oldest of the Greece runestones are six stones in the RAK style, which dates to the period before 1015 AD
버랜지언즈, 바리아게르, 바링, 이라는 단어가, 룬문자 의 돌, 룬스톤들에 찍혀있어. 가장 오래된 게 서기 1015년 전으로 보이는, 그리스 룬스톤들 에 있어. 그리스 룬스톤 이란게, 바이킹들이 그리스 비잔틴까지 다녀온 룬문자로기록된돌 들이 스칸디나비안 에 있는겨. 이탈리 룬스톤은 이태리 다녀온 기록의 룬문자 돌들.
The Varangian Guard (Greek: Τάγμα τῶν Βαράγγων, Tágma tōn Varángōn) was an elite unit of the Byzantine Army from the tenth to the fourteenth century.
버랜지언즈 라는건, 버랜지언 가드의 줄임이야. 타그마 톤 바란곤. 바란고이, 바란고스들 의 군대. 비잔틴 마케도니안조 때에 생긴, 버랜지언들로 구성된 병력단위 야.
The Rus' provided the earliest members of the Varangian Guard. They were in Byzantine service from as early as 874. The Guard was first formally constituted under Emperor Basil II in 988, following the Christianization of Kievan Rus' by Vladimir I of Kiev.
류릭 이 라고다호수를 넘어서 노브고로드 를 세운게 서기 862년 으로 봐. 올렉 이 키예플 점령한게 879년 이야. 이들이 라고다 로 들어오는게 서기 750년대로 보고, 슬라브 와 핀란드인들에게 조공을 받아 그러다가 점령한겨. 루씨 들이 들어와서 백년되서 노브고로드 를 세운겨. 류릭 부터. 바로 이들이, 비잔틴 의 병력 용병으로 들어가는게 서기 874년 이야. 그러다가 블라디미르 대제가 안나 와 결혼하고 그리스도하면서 버랜지언즈 만의 병력을 이루는겨 비잔틴 에서.
버랜지언즈 하면, 버랜지언즈 가드. 라는 황제 근위대 인겨 이게. 황제가 자기민족을 못믿어서, 타민족으로 된 애들을 근위대로 쓰는거야. 이때부터 버랜지언즈, 라는 바랴기 가 되는겨, 바이킹들과 슬라브들이 섞인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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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러시아 역사가, 정말 제일 처참한거같아, 지금 보믄. 예전엔 그러려니 했는데, 정말 찐한 역사가 이 러시아 야. 도스토예프스키 는 괜히 나온게 아냐.
아, 정말, 이 조선 사 란건, 진짜 똥 그자체 고
아까 어디 글보다가, 누구가 미안하다 고맙다 놀이 하나본데 ㅋㅋㅋ. 저게 빠 애들은 기분이 나쁜가? 저게 인간 으로서 저게 , 할 소리가 아니거든. 제대로 머리가 올려져 있는 이면 할 소리가 아니거든. 지들도 쪽팔린건가? 저런거에 부들부들 하는거보면? 저 지능 구조가 참 시안해. 인간 자체가 거시기인 이를 존경하는 무리들이, 적극 변호를 못할망정 왜부들부들 대는지. 어떻게 저런 이 가 인간의 탈을 쓰고 정치놀이 를 해대는지. 저런걸 존경 한다며 무리를 지어서 쫓아댕기고. 야 저 댓글 보니 웃기던데 쟤들 왈, 중국 심기 건드리면 안됩니다. 천안점 을 방문했대 육사라며. 우리가 기댈 곳은 중국 과 북조선 입니다. 일본도 우리 적이고 미국도 적이고, 우리가 기대고 꿈꿀곳은 북조선과 중국입니당 중국 심기건드리면 안됩나당. ㅋㅋㅋ. 조궁님 책을 보니 감동입니당 ㅋㅋㅋ.
이 땅은 정말 사라져야 해 우주에서.
역사 가 똥이야 똥.
아, 저 러시아 역사 가 새삼 다시 느껴지는데. 미래 는 러시아 슬라브 들이 한 몫 할 수 밖에 없어. 저들은, 결국, 버랜지언즈 라는, 바랴기 라는 슬라빅 이 아니라, 바리아게르 라는 스위든 이고, 바링 이라는 노르웨이 여. 스칸디나비안 게르만 인간들이, 러시아 여. 슬라브 와 섞인.
아 이 인간들 역사 정말, 처참해. 찐해. 지금까지 인 17세기 까지 언급할때도 참 처참했지만 말이지, 20세기 까지 여긴 처참해. 짧고 굵고 강해. 끽해야 저 서기 862년 노브고로드 에, 879년 키예프 부터 시작하지만, 성녀 올가 의 이야기부터, 아 찐해 진짜. 저 올가 이야긴, 저때 태어난 비잔틴 사람의 기록이야 저게.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냐.
7년 전쟁 이야길 풀려다가 , 갑자기 러시아라는 나라 가 닥아와서 그런건데. 일단 이런 굵직한 전쟁사 를 큰 맥락으로 정리를 하고, 인물사 를 몇개 좀 풀려고 했는데, 아 너무 구찮아서 요즘.
The Battle of Jumonville Glen, also known as the Jumonville affair, was the opening battle of the French and Indian War,[5] fought on May 28, 1754, near present-day Hopwood and Uniontown in Fayette County, Pennsylvania.
7년 전쟁이, 1756-63 이지만, 이 시작은, 2년전인, 1754년 5월 28일, 주몬빌 글렌 전투, 라기는 거창하고, 주몬빌 사건 이 결정적인겨. 이 문제가 쌓여서, 북미 가 도화선이 되서 시작한게, 7년전쟁이야. 대륙에선 실레시아 문제 가 다시 등장한거고. 주몬빌 과 실레시아, 이 두개를 핑게로 영국과 프랑스 가 거대하게 붙은겨. 프랑스 는 완벽하게 무너진거고.
George Washington (February 22, 1732[b] – December 14, 1799) was an American political leader, military general, statesman, and Founding Father of the United States, who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from 1789 to 1797
저 사건때 등장하는게, 조지 와싱턴 이라는 인간이야. 얘가 22세 때여. 얘는 부자집안이고, 증조 할배가 80년전에 와서 땅 사서 투자한게 대박이 난겨. 이 와싱턴은 돈에 치인 부자인겨. 그래서 초대 대통령할때 청렴운동하민서, 나 월급안받을텨 해대는것도 원래 이인간집안 자체가 어마어마한 부자거든. 주몬빌 사건 은 얘가 만든겨 이게. 이걸 인디안 핑게 를 대는건지 아닌지는 몰라. 머든 결정적 자료는 없걸랑. 이 조지 와싱턴 때문에 7년전쟁이 터진겨 이게. 저 갓 22세 때문에. 드주몬빌 이라는 캐나다 장교의 군대를 기습해서 다 쳐죽이걸랑. 글렌 이란게 계곡이고, 저당시 저기를 나중에 주몬빌 계곡 이라고 이름 짓고 전투 라 붙였지만, 걍 습격사건이야. 프랑스 는 따지는거고 전시도 아닌데 왜 몰래 죽이냐 단지 탐사를 간건데. 저건 영국 입장에선 솔직히 할 말이 없어 명백히 잘못한겨.
유럽대륙에서의 핵심은 실레시아 야. 이전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때, 합스부르크 의 마리아테레사 가 부들대는게, 실레시아 를 프러시아 에 빼앗긴거거든. 이걸 되찾아와야해 무조건.
프러시아 와 오스트리아 의 사이에서, 가장 결정적인 나라가, 러시아 야.
Frederick II (German: Friedrich II.; 24 January 1712 – 17 August 1786) was a Prussian royal and military leader who was King of Prussia from 1740 until his death in 1786.
Maria Theresa Walburga Amalia Christina (German: Maria Theresia; 13 May 1717 – 29 November 1780) was the ruler of the Habsburg dominions from 1740 until her death in 1780, and the only female to hold the position
프러시아 의 프레데릭2세 가 서기 1740년, 28세 에 킹에 올라.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1740-48 은 프레데릭2세 가 시작하는겨. 12월에 실레시아 를 쳐들어가면서. 이사람이 봄에 킹에 오르고, 자기 마스터플랜 짜고, 바로 쳐들어가는겨. 항상 킹에 오르고서 자기 임기 마스터플랜 을 짜고, 나이가 젊은애들은 바로 시작하는겨 이 프로세스는 똑같아. 프러시아 는 브란덴부르크 와 오데르강하구의 포메라니아 가 연결되고 오데르강 따라서 실레시아 를 먹기로 한겨, 그리고, 비스와 강의 하류 에 그다니스크 단치히라는, 여기는 로얄프러시아 여. 여긴 프로이센 이 아냐. 이 로얄프러시아 까지 먹으면 거대한 킹덤이 되거든 이어져 있는. 프레데릭2세 젊은애가 이걸 하려 했던거야. 결국 이 인간은 이걸 하는겨. 폴란드 삼분할 을 이 인간이 제안한거거든. 이 목적은 저기 중간 로얄프러시아 를 갖고 와서 잇는거거든. 이 시작이, 실레시아 먹는거야.
12월에 실레시아 를 쳐들어가는겨 1740년. 이 다음해 에 바바리아 의 나중 황제 칼7세 가 움직이는겨. 비엔나 를 돌아서 프라하 가서 보헤미아 킹하고, 겨울에 프랑크푸르트 가서 황제 대관식 한거걸랑. 프레데릭2세 가 무대를 다 마련해 준겨 이게.
마리아테레사 의 가장 큰 웬수놈이 저 프레데릭2세 야. 칼7세 죽고, 합스부르크 가 황제 다시 갖고 왔어. 실레시아 를 찾아야해. 7년전쟁 1756-63 시작할때는, 44세 와 39세 여. 다섯살 어린 마리아 에겐 저 프레데릭2세 가 평생 웬수 야. 7년후에 정말 끝낼수가 있었걸랑. 프러시아 를 지울 수도 있었어.
저당시 러시아 역사 없인 유럽사를 말할 수 없어.
18세기 부터는 영국과 함께 러시아가 주연으로 등장하는겨. 이 때부터의 서유럽과 러시아를 알기위해 지금까지 또한 러시아 이야길 했던거고
십자군 12세기 부터의 유럽사는 투르크 이야기 모르면, 몰라. 징기스칸 오스만 모르면 유럽사 몰라
8세기 샤를마뉴에 프랑크 에 비잔틴 이야긴 무함마드 무슬림 이야기 모르면, 몰라.
서로마 망하는 장면은 한나라 의 흉노정벌 이야기에서야 제대로 시작이 돼.
유럽사라는게 우습게도 주변 이야길 해야만이 풀리는겨 이게. 오직 나밖에 못푸는건데 그래서.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1740-48 에 7년전쟁 1756-63 은 러시아 이야기가 풀려야 만 이해가 되는겨
저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다음엔 여자들의 시대야. 예카테리나1세 안나이오안노브나 안나레오폴도브나 엘리자베타 예카테리나2세. 다섯여자 의 시대야. 마지막 예카테리나2세는 벨리카 가 붙어. 그레이트 가 남자는 벨리키 여자는 벨리카.
저기서 참 이해가 안되는 게 예카테리나 두 여자가 권력자가 된거야. 이 두여자는 러시아에서 아무런 기반이 없어. 완전히 실력으로 꿰찮겨. 참 드라마틱해. 둘은 아무런 족보도 서로도 없이 차리나 이름 만 같은건데.
이 러시아 이야기들이 진짜 드라마틱해.
민중봉기도, 이전 소금봉기 표트르 아빠 알렉세이 때 모스크바를 뒤엎고 권력 2인자 를 걍 찢어죽여. 얘들이 프랑스 보다 백년 빨라. 민란이 수도를 점령한건 또한 잉글랜드 가 훨 먼저여. 잭 케이드 반란이 장미전쟁 시작할때거든. 얘들이 런던까지 쳐들어와. 런던시민들은 처음엔 반기다가 저 약탈해대는거에 정부편을 드는거고. 저게 셰익스피어 헨리6세 연극이고 또한. 이 민들이란게 얼마나 무지한건가, 얼마나 선동하기 쉬운게 민들이란 건가. 민주 라는 말 은, 서로 죽여라 라는겨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인민 이 주인인 나라는, 아작 이 나는겨 미래가 없고 여자들은 창녀 가 되는기라. 곧 이 남조선의 미래인거고.
할때도 러시아 가 저런게 오히려 앞서. 이 러시아 란 나라 참 웃기는 나라야 이게. 얘들은 왕정 마지막 장식할때도, 화끈해, 걍 황실 가족들 다 앉혀놓고, 드르르륵 갈겨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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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짪은 버랜지언즈 바리아게르 바링 이 정말 찐하게 웨스턴껄 흡수하면서 그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거야. 도스토옙과 차이코프스키 가 우연히 산출된게 아냐
아, 이 조선땅. 거시기 들 밖에 나올게 없는 땅.
Elizabeth Petrovna (Russian: Елизаве́та (Елисаве́та) Петро́вна) (29 December [O.S. 18 December] 1709 – 5 January 1762 [O.S. 25 December 1761]), also known as Yelisaveta or Elizaveta, reigned as the Empress of Russia from 1741 until her death in 1762.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1741년, 32세 에 차리나 가 되걸랑. 합스부르크 의 마리아 보다 8년 위야. 이 언니가 오스트리아 후계 전쟁 1740-48 터질때 올라서, 7년전쟁 1756-63 때 까지, 재위 하걸랑. 엘리자베타 가 53세에 죽는데, 이여자만 안죽었으면, 프레데릭2세 는 지금처럼 떠받들여지지 못해. 독일은 전혀 다른 역사 가 되어있을 거야.
엘리자벳 다음이, 표트르3세 다음인 예카테리나 2세라는 그레이트 여. 벨리카. 엘리자벳 은 표트르대제 벨리키의 딸이야. 표트르 대제 가 죽고 또 러시아 역사가 피곤한겨 예카테리나 2세 전까지. 1725-62 . 이 다음인 자식 짜르 폴 도 암살로 죽어. 황제 든 킹이든 암살로 죽는것도 가장 흔한게 또한 이 러시아야. 마지막엔 걍 온 가족 모아놓고 사진 한방 찍어주고 걍 드르륵 갈겨죽여.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갑자기 죽은겨 황제 가족이. 정말 기가막힌 역사야 저 러시아라는건. 저리 죽이고 온갖 사탄 딱지 붙이고, 저런 역사 서술은 모두 거짓이야. 프랑스 1789 대학살 로 선동 해대는 거짓역사. 저거 전부 거짓이야 거짓. 저 거짓 의 이야기를 책으로 교과서로 배우는겨 사실이라며. 아, 1500년 후에 저 선동의 애들을 다 죽여 말살시킨다는 이야기로 그나마 편해져. 진짜 정의는 살아있는거지.
저럴 수 밖에 없어. 결국 저 선동하는 인민놀이는 다 뒤질 수 밖에 없고 사라질 수 밖에 없어. 왜냐면, 힘이 없어 얘들은. 선동 당하는 몇몇 에게만 통하고 행사되는 힘일 뿐이야. 역사 의 무게 에 니덜따위 선동 조작 의 힘은,
저때까지 의 러시아 역사 가 참 재밌는데, 이 러시아 역사 가 정말 제일 재밌는 거 같아 어찌보면. 재밌다는건 드라마틱하다는겨.
표트르 가 요도결석으로 1725년에 죽어. 신장에 방광이 로마노프는 유전적인듯.
Catherine I (Russian: 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Миха́йлова, tr. Yekaterína I Alekséevna Mikháylova; born Polish: Marta Helena Skowrońska, Russian: Ма́рта Самуи́ловна Скавро́нская, tr. Márta Samuílovna Skavrónskaya; 15 April [O.S. 5 April] 1684 – 17 May [O.S. 6 May] 1727) was the second wife and Empress consort of Peter the Great, and Empress regnant of Russia from 1725 until her death in 1727.
표트르 의 부인이 캐서린, 예카테리나 1세 야. 1684년생. 12년 어려. 이게 웃긴게, 표트르 가 자기 이복형 이반5세 하고 차르 하다가 형 죽고서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모든것 뜯어고치기 서유럽심기 를 하거든. 결혼 도 서유럽 애들과 적극 하라며, 자기 이복형의 딸 안나 도 쿠를란트 공작과 결혼시키고. 표트르 는 힘없을때 결혼을 이미 했어. 그런데 처가가 보수적인 보야르집안에 권력놀이하걸랑. 이 처가 를 치면서 이혼을 하고 마누라를 수도원에 처 넣어. 재혼 자리를 분명히 초울투라 강력하고 신선한 외국집안 여자랑 하고 싶어할거거든. 그런데, 그야말로 듣보잡인, 아니 듣보잡도 아니고, 완전히 써번트 에 최하층 집안의 여자 와
결혼 을 한겨 이게. 그것도 똑같은 슬라브여자야.
저게 정말 웃긴거야. 여자가 이쁘면 애인 으로 만 두면 되거든. 그런데, 차리나 를 시켜준겨 정식 결혼을 하고. 저건 충격적인겨.
생각해보면, 저런 귀천상혼은 가장 독보적인겨. 이전 하노버 조지윌리엄 과 엘레노어 의 모거내틱 morganatic 이야긴 양반이야. hypergamy hypogamy .예카테리나 입장에선 역사상 최고의 하이퍼가미 이고 벨리키 표트르 에겐 가장 독보적 하이포가미 야.
그만큼, 예카테리나1세, 캐서린1세 가 뛰어난 여자야.
The life of Catherine I was said by Voltaire to be nearly as extraordinary as that of Peter the Great himself. Said to have been born on 15 April 1684 (o.s. 5 April),[1] she was originally named Marta Helena Skowrońska which is Polish spelling. Marta was the daughter of Samuel Skowroński (later spelt Samuil Skavronsky), a Roman Catholic farmer from the eastern parts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born to Minsker parents.
볼테르 의 기록과 표트르대제의 말에 이여자의 말을 종합하는데. 원래 이름이 마라트 헬레나 스코브로인스카. 폴란드 발음이야. 아빠가 민스크 사람이고, 로마 카톨릭 이고, 엄마 는 발틱 게르만. 발트해에 이주해온 게르만 이야. 리보니안 십자군에 튜튼십자군때 부터 들어온 게르만인거고. 부모가 결혼한 곳이 Jēkabpils 예카비스, 지금 라트비아 고 Daugava 다우가바 강이 흐르는 곳이고. 아주 하치리 집안이여. 아빠는 무덤파는사람 이나 수리공, 또는 도망온 농노 인듯.
그러다 캐서린이 다섯살때 역병이 돌아서 부모가 다 죽어.
Johann Ernst Glück (Latvian: Johans Ernsts Gliks; 10 November 1652 – 5 May 1705)[1] was a German translator and Lutheran theologian active in Livonia, which is now in Latvia.
Glück is known for being the first one to translate the Bible into Latvian, a project which he finished in 1694.[2] It was carried out in its entirety in Marienburg (Alūksne) in Livonia,
캐서린 이 고아가 되서, 요한 에른스트 글뤽 의 집에 들어가서, 허드랫일 시녀 일을 하는겨. 글뤽 의 집이, 알룩스네, 다우가바 강 위 고 리보니아 접한곳이고. 이사람이 작센 시작 베틴가문의 베틴 출생 게르만인데, 목사 아들이고 라트비안 을 배워서 성경을 라트비안 언어로 최초 로 번역한 거야. 서기 1694년 에.
라트비안 언어족 이란게, 저 다우가바 강 윗쪽지역의 에뜨닉 그룹 이야. 이 강 아래 에서 왼쪽 하구까지가 젬갈리아 쿠를란트 공작령이야. 이건 리투아니아 에 하미지 하는 땅이고. 프로이센 언어족은 이 아래 여. 프로이센 라트비안 모두 발틱언어족이고 프로이센 언어족은 사라진겨 게르만애들이 나라 이름으로만 쓰고.
알룩스네 가 위 리보니아 에 접한거고. 여긴 당시 스위든 의 리보니아 여. 이때 터진게 대북방전쟁 1700-21 이야. 이 대북방전쟁 때 러시아 가 잉그리아 리보니아를 갖고 오는겨 스위든을 내쫓고, 건너 핀란드 남부도 갖고 오는거고. 스위든 칼12세 가 폴타바 전투 1709 를 진건 엄청난 결과야 저건.
Marta was considered a very beautiful young girl, and there are accounts that Frau Glück became fearful that she would become involved with her son. At the age of seventeen, she was married off to a Swedish dragoon, Johan Cruse or Johann Rabbe, with whom she remained for eight days in 1702, at which point the Swedish troops were withdrawn from Marienburg. When Russian forces captured the town, Pastor Glück offered to work as a translator, and Field Marshal Boris Sheremetev agreed to his proposal and took him to Moscow
캐서린 이 허드렛일 하면서 저집에서 글을 배워. 그런데, 아주 이뻤나봐. 글뤽 이 자기아들과 캐서린이 엮일까봐 불안해 하다. 17세 때 결혼을 스위든 드라군 기병대와 해. 1702년. 스위든 리보니아 여 저 지역은. 그러다가, 막 대북방전쟁이 터지고, 러시아 가 들어오고, 스위든 은 나가고, 글뤽 이 라트비안 성경 번역한 사람에 게르만인간이야. 모스크바 코트 로 데려 오는겨. 그러면서 캐서린 도 같이 와.
It is possible that Menshikov, who was quite jealous of Peter's attentions and knew his tastes, wanted to procure a mistress on whom he could rely. In any case, in 1703, while visiting Menshikov at his home, Peter met Marta.[citation needed] In 1704, she was well established in the Tsar's household as his mistress, and gave birth to a son, Peter.[4] In 1705,[citation needed] she converted to Orthodoxy and took the new name of Catherine Alexeyevna (Yekaterina Alexeyevna).[3] She and Darya Menshikova accompanied Peter and Menshikov on their military excursions.
멘시코프 가 표트르 대제 의 최측근이야. 동년배의. 캐서린이 너무 이뻐. 그런데 무수리여. 누구누구 애인이란 설. 멘시코프 가 샀는지 데려와. 그리고 표트르 와 만나서 표트르 집안에 들어가 1703년 19세. 애인 으로. 애를 낳아. 1705년 오소독시 로 개종을 해. 캐서린은 부모가 로마카톨릭 이고, 글뤽 때 저긴 아마 루터 고. 모스크바 와서 오소독시 해. 이때 이름을 바꾸는겨, 예카테리나 알렉세이브나. 표트르 의 아빠가 알렉세이 거든.
Though no record exists, Catherine and Peter are described as having married secretly between 23 October and 1 December 1707 in Saint Petersburg.[5] They had twelve children, two of whom survived into adulthood, Anna (born 1708) and Yelizaveta (born 1709).
1703년 에 만나서, 1707년에 비밀결혼 을 했다고 하는데, 의미없어 비밀결혼은.
. In any case Peter credited Catherine and proceeded to marry her again (this time officially) at Saint Isaac's Cathedral in St. Petersburg on 9 February 1712
서기 1712년 에, 정식으로 결혼을 한겨. 공개적으로 차리나 가 된겨 이게. 이거 골때리는겨.
The Russo-Ottoman War of 1710–11, also known as the Pruth River Campaign after the main event of the war, was a brief military conflict between the Russian Empire and the Ottoman Empire.
폴타바 전투 1709 에서, 표트르 가 칼12세 를 이겨. 스위든 칼12세 가 아래로 도망가서 오스만의 크림타타르 로 피신을 해. 표트르가 이걸 쫓아가는겨. 프루뜨 강 캠페인 이야. 1710-11. 이때 캐서린1세 도 같이 가. 러시아 가 4만여명 병력을 잘 갖춰가는데 오스만은 병력이 그 두배여. 이 두 부대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러시아가 완벽히 포위가 되고, 표트르 는 죽을 지경에, 협상을 들어가서, 러시아 가 물러나는겨. 칼12세 는 분노 를 해대고.
이때 저 협상을 뇌물주면서 주도한 여자가 캐서린 이야. 저때가 26세여 여자가. 어릴때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여. 표트르 가 저때 감사해 하면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는겨 서기 1712년 에. 저게 썰 이 아니라, 맞을거야. 아니면 결혼을 할 수가 없어.
외국물 먹은 표트르 가 , 말이 안되는겨 저 무수리 생 그지 , 아무것도 없는 여자, 부모 족보도 모르는여자, 이쁘기만 한 여자 를 차리나 로 정식 올린건. 저때 프루뜨 강 캠페인 때의 저 캐서린의 능력에 감화 된거야 표트르 가.
자식을 12명을 낳았는데, 성인 이 된 자식은 딸 둘 이야. 안나 와 엘리자베타. 모두 정식결혼 전에 낳은거고. 안나 가 고토르프 한테 시집가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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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early January 1725, Peter was struck once again with uremia. Legend has it that before lapsing into unconsciousness Peter asked for a paper and pen and scrawled an unfinished note that read: "Leave all to ..." and then, exhausted by the effort, asked for his daughter Anna to be summoned.[c]
Peter died between four and five in the morning 8 February 1725. An autopsy revealed his bladder to be infected with gangrene.[10] He was fifty-two years, seven months old when he died, having reigned forty-two years. He is interred in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Sain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가, 1725년, 53세에 죽어, 유리미아, 요독으로 쇼크 가 와. 배수관이 막힌겨. 레전드 로 전해지는건, 표트르 가 안간힘으로, "모든 것을 ..."하면서 간목을 못쓰고 죽은겨. 1725년 2월 8일 아침 네시 다섯시 에 죽었다. 그의 방광은 갱그린, 썩은겨 피가 안통해서. 러시아 생트페테르부르크 의 베드로바울성당에 묻히다. 이 성당도 표트르 때 지은거고 도시와 함께.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쌍크-피쩨르부르크 야. 티 가 드랍티 여 발음을 안해. 스트레스 가 뒤 터 에 있어서 앞이 슈와 발음이 되는겨. 부르크 는 게르만 부르크 를 갖고 온거고. Пётр Вели́кий, tr. Pyotr Velikiy 같은 피터 베드로 에서 왔지만, 이름 쓸땐 표뜨르 한겨. 슬라브화 된 소리를 쓴거고. 피쩨르 는 좀 쟤들 소리에 맞게 쓴거고.
솔직히 저런걸, 걍 발음소리대로 한글로 쓰면 되는데, 별 시안한 이유로, 맞춤법을 어거지로 만들어서, 전혀 말도 안되는 소리 를 번역 해서 이름에 지명을 써대. 대부분 일본이 만든 발음 을 갖고. 왜냐면 초창기는 영어 든 러시안 이든 프랜치 든 번역 할 능력도, 듣는 귀도 없어서 일본 애들 걸 그대로 베낀겨. 여전히 이 지랄을 해대는거고 이 학계는. 참 드러운 땅이야 이 들. 그리곤 친일적폐 해대면서 위대한 학자 인 척. 허섭것들. 허연 도포자락 만 쳐입으면, 위인이 돼 이 땅에선 ㅋㅋㅋ.
도포자락 쳐입는 애는 걍 거시기 로 보면 돼. 위험해. 분노만 쳐 해댈 줄, 온 몸 자체가 열등함 으로 뭉친 거시기.
Catherine I (Russian: 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Миха́йлова, tr. Yekaterína I Alekséevna Mikháylova; born Polish: Marta Helena Skowrońska, Russian: Ма́рта Самуи́ловна Скавро́нская, tr. Márta Samuílovna Skavrónskaya; 15 April [O.S. 5 April] 1684 – 17 May [O.S. 6 May] 1727) was the second wife and Empress consort of Peter the Great, and Empress regnant of Russia from 1725 until her death in 1727.
캐서린 이, 41세 에, 권력쥔 차리나 를 하는겨. 2년 밖에 못해. 폐결핵 으로 죽어. 43세. 이 여자 를 표트르 에게 들인 사람이 멘시코프 고, 아마 멘시코프 의 애인이 된 상태에서 들어갔다 고 머 소설 쓰는겨. 여하튼 멘시코프 가 2인자 인 상태에서 표트르 죽고, 캐서린과 서로 맞는겨 의지가.
캐서린 은 평이 좋아. 세금 경감하고, 표트르 때 상비군을 쎄게 두고 이 상비군 이란건 결국 세금이 많이 들고, 민란의 원인이야.
표트르 가 1672년생인데, 이복형 이반5세 와 공동 차르,때 권력은 이복누나 소피아 였고, 이 소피아 를 벗어난게 1689년 17세 야. 엄마가 귀족집안을 며느리로 들인겨. 그리고 소피아 를 내치지만, 여전히 엄마 의 휘하 에 있는겨. 이 엄마 가 죽는게 1694년, 22세고, 이반5세가 2년 후에 죽어서 이때 서유럽을 다녀오는거거든. 1696년 24세에. 엄마가 결혼시킨 부인을 이때 수도원으로 보내고 이혼하는거야. 이 전부인과 낳은 자식이, 또한 알렉세이 고, 차리비치 로 불러, 차르의 자식. 이사람은 고고학에 문학이 관심있는겨. 표트르 는 서유럽꺼 익히기 가 모토여 새로운 러시아. 수학 과 과학 을 해야해. 부자 지간이 웬수가 되고, 이 자식이 마누라 집안인 서유럽으로 도망을 가. 서유럽 황제에 킹들이 얘를 보살펴줘 저 표트르 가 자식 죽이네 저거 함시롱. 표트르 가, 쪽팔린겨. 표트르 는 자기나라를 미개하다고 생각하지만 존심은 하늘을 찌르거든. 쪽팔리게 쟤들한테 가서 저 자식이 애비 망신 다 시키는겨 이사람 입장에선. 저거 애비한테 반기 드는겨? 함시롱, 자식과 측근들을 고문 열라 하고, 이 차리비치 가 바로 죽어.
예카테리나1세 가 죽고, 다음 후계 가, 첫부인의 자식으로 가는겨. 왜냐면, 예카테리나 의 자식은 두딸인데, 정식결혼 전에 낳은거야 일단. 이건 일리짓 합법이 아냐. 잉글랜드 도 스페인 도 살리크 법은 안따지지만, 결혼전에 낳은 자식은 불법이야. 헨리7세 가 이것때문에 카스티야 의 이사벨라 에 항상 께름직한거걸랑. 러시아도 이걸 배운겨.
첫부인 의 자식으로 승계가 가는거야.
Peter II Alexeyevich (Russian: Пётр II,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Pyotr Vtoroy, Pyotr Alekseyevich, 23 October [O.S. 12 October] 1715 – 30 January [O.S. 19 January] 1730) reigned as Emperor of Russia from 1727 until his untimely death. He was the only son of Tsarevich Alexei Petrovich (son of Peter the Great by his first wife, Eudoxia Lopukhina) and of Charlotte Christine of Brunswick-Lüneburg. He was the last agnatic member of the House of Romanov.
Under the influence of Ostermann and the Dolgorukovs, Peter – long sick of Menshikov's wardship – stripped him of his rank (September 1727) and exiled him to Siberia. The Emperor also announced the dissolution of his engagement with Menshikov's daughter.
표트르2세 야. 표트르대제 의 손자고, 표트르 한테 반란이라며 고문당하고 죽은 차리비치 의 아들이야. 햇수로 12세 에 오르는겨. 예카테리나 가 5월에 죽어. 멘시코프 가 군부를 쥐고있었고, 이 꼬마 를 네바강 하류 섬에 가두고 윽박을 지르는겨 가스라이팅하는겨. 그리고 자기딸과 결혼을 시키리고 하고. 이 꼬마는 완전히 쫄았어.
그러다가, 오스터만 과 돌고루코프 의 힘으로, 표트르 가 멘시코프 를 시베리아 로 내쫓아. 9월, 네달 후야. 얜 아빠도 엄마도 죽고, 혼자 큰 애고, 오직 로마노프 핏줄이야.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 조차 얘 교육을 안 시켜. 얘를 키운게 집안 하녀들이야. 네덜란드 여자들인데 신랑이 포도상인 등 이 사람들이 꼬마 글 공부시킨겨. 꼬마 가 완전히 후견인도 없이 자기 세상이 된거야 이게.
Emperor Peter II died as dawn broke on 30 January 1730 – the day scheduled for his marriage to Ekaterina Dolgorukova
얘가 3년도 안되서, 15세 에 죽어. 천연두 로.
With Peter's death, the direct male line of the Romanov dynasty ended. He was succeeded on the Russian throne by Anna Ivanovna, daughter of Peter the Great's half-brother and co-ruler, Ivan V.
로마노프 의 남자 핏줄은 얘로 끊긴겨. 예카테리나 1세 의 여자들은 배스타드 야. 이반5세 의 자식 딸 들이 당시 세명이야. 이중 둘째 를 선택하는겨 러시아 가.
Anna Ioannovna (Russian: Анна Иоанновна; 7 February [O.S. 28 January] 1693 – 28 October [O.S. 17 October] 1740), also russified as Anna Ivanovna[1] and sometimes anglicized as Anne, served as regent of the duchy of Courland from 1711 until 1730 and then ruled as Empress regnant of Russia from 1730 to 1740
안나 이오안노브나. 또는 이바노브나. 걍 안나 라고 해. 표트르 가 쿠를란트(영어 쿠어랜드) 공작 에게 시집보냈거든. 신랑이 죽고 여기서 공작부인으로 재직하는겨. 다스려본 경험이 있는거야. 그래서 이여자를 캐스팅 한겨 러시아 가. 37세.
Tsarevna Catherine Ivanovna of Russia (20 October 1691 – 14 June 1733) was a daughter of Tsar Ivan V and Praskovia Saltykova, eldest sister of Empress Anna of Russia and niece of Peter the Great. By her marriage, she was a Duchess of Mecklenburg-Schwerin.
원래, 안나 보다 언니 가 있어. 차르의 딸 캐서린. 캐서린 이 두살 많은 장녀 인데, 이여자 는 멜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으로 시집을 간 상태인데, 신랑이 때려서 딸 데리고 러시아로 와 있어, 이혼은 안한상태로. 러시아 귀족들이 첫째 를 버리고 둘째 안나 를 선택한겨. 신랑없이 정치 를 해본 경험도 있고.
안나, 쪽 집안은, 이반5세 의 딸들이고, 아빠때부터 표트르 집안에 눌려 온겨. 아빠 죽고는 더 죽어지낸겨 30여년을. 표트르2세 때는 귀족들 세상이 된거고. 귀족들이 차르 차리나 를 고르는 세상이 된거고
The document of "Conditions" was presented to Anna in January, and she signed the same on 18 January 1730, which was just around the time of his death. The ceremony of endorsement was held at her capital, Mitau in Courland (now known as Jelgava), and she then proceeded to the Russian capital. On 20 February 1730, shortly after her arrival, Empress Anna exercised her prerogative to do away with her predecessor's Privy Council and dissolved that body.
이때 러시아 는 카운슬 이 권력이고, 얘들이 컨디션즈. 조건문들을 만들어서, 1월에 안나 를 찾아가. 표트르2세 가 누워있을때. 안나 는 얠가바, 쿠를란트 코트 에 있던거고. 우리말 잘 듣고, 차리나 혼자 권력놀이 하면 안돼 라는 조항들이고, 이거 싸인하면 너가 차리나 해. 머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싸인 하고, 2월20일날 오자마자, 추밀원 이라는 카운슬 을 바로 해산해 버리고, 싸인한건 찢어버리는거지.
이 여자는 정치를 십년 해본 여자야. 역사에서는 머 크루얼이니 나쁜년 어쩌고 그러지만, 다 개소리고. 귀족 은 조져야돼. 귀족들에게 권력 주면, 폴란드 되는겨. 하물며 민주 라니 ㅋㅋㅋ. 민들이 주인 되는 세상은, 지옥인겨 그거.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 (RAS; Russian: Росси́йская акаде́мия нау́к (РАН) Rossíiskaya akadémiya naúk) consists of the national academy of Russia; a network of scientific research institutes from across the Russian Federation; and additional scientific and social units such as libraries, publishing units, and hospitals.
이 아카데미 라는게, 유럽애들의 핵심이야. 아 이런 이야기 하는 애들 이 없는게 참 신기한데. 뉴튼 과 라이프니츠 이야기도 결국 이 아카데미고. 라이프니츠 는 자기 배후에 정치세력이 너무나 없는겨 이게. 출생은 뉴튼이 훨 후지지만, 나이들어서 뉴튼 뒤에는 아카데미 가 있는거거든. 이 아카데미 가 잉글랜드 가 앞서는겨. 프랑스 도 바로 만들고. 이걸 모두 만드는겨. 러시아 표트르 가 똑똑한거야. 이게 중요한걸 알아. 표트르 가 죽기 1년전에 만든겨. 이걸 안나 가 확 키운겨. 라씨스카 아카데미아 나우크. 나우크 가 네이쳐 여. 과학 아카데미.
이 여자 가 쿠를란트 에 있으면서, 여기가 위는 스위든 리보니아 고 아래 는 게르만화된 프러시아 여. 러시안 이 후진걸 알아. 게르만들을 중용 하는겨 러시아 코트 로 와서. 그래서, 러시아 사가 들은 이 여자를 낮게 평가하는겨.
During Anna's reign Russia became involved in two major conflicts, the War of the Polish Succession (1733–1735) and another Turkish war.[23] In the former, Russia worked with Austria to support Augustus II's son Augustus against the candidacy of Stanisław Leszczyński who was dependent on the French and amiable with Sweden and Ottoman. Russia's involvement with the conflict was quickly over, however, and the Russo-Turkish War (1735–1739) was much more important
안나 때, 폴란드 후계전쟁 1733-35, 아우구스투스2세 는 표트르 때 손잡고 대북방전쟁 1700-21 한거고, 아들 3세 가 스타인스와프 할배 랑 다시 전쟁 에 끼지만, 프랑스 와 스위든 과 오스만 은 친해. 러시아 는 스위든 을 싫어해. 오스만 은 더 싫어. 러시아 와 오스만 전쟁은 20세기 까지 오는겨. 러시아-투르크 전쟁 1735-39 때 아조프 를 러시아 가 다시 갖고 오지만, 계속 전쟁터고 사십년 지나서야 제대로 갖고와 러시아는 이 아조프 를. 이때 오스트리아 가 들어와서, 세르비아 와 바나트 일부를 오스만에 뺏기는거고.
할때, 러시아 가 다음에 오스만 후계 전쟁 1740-48 에 7년전쟁 1756-63 때도 그렇고, 러시아 는 항상 아래 오스만 을 신경 써야해. 더하여, 파사비 로 등장한 페르시안 도.
안나 가 죽어 10년 차리나 를 하고, 1740년 47세. 신장 에 얼서, 궤양 이라 번역되는건데 이 얼서 라는게 답이 없어. 걍 썩는겨 염증생기믄서. 궤 가 걍 무너지는겨. 표트르 도 방광이고. 안나 도 신장에.
Ivan VI Antonovich (Iván VI; Ioánn Antónovich; Russian: Ива́н VI; Иоа́нн Анто́нович; 23 August [O.S. 12 August] 1740 – 16 July [O.S. 5 July] 1764) was Emperor of Russia in 1740–41.
이 다음이 이반6세 여. 안나 의 언니 캐서린이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 시집갔다가 신랑한테 쳐맞고 딸데리고 왔거든. 그 딸이 낳은 자식 이야. 아 이 모자 불쌍해.
태어나서 두달만에 차르 에 오르고, 만1년 지나서 쫓겨나서, 나이 24세 에 죽은겨. 항상 갇힌채로.
Anna Leopoldovna (Russian: А́нна Леопо́льдовна; 18 December 1718 – 19 March 1746), born Elisabeth Katharina Christine von Mecklenburg-Schwerin and also known as Anna Carlovna[1] (А́нна Ка́рловна), was regent of Russia for just over a year (1740–1741) during the minority of her infant son Emperor Ivan VI.
안나 레오폴도브나. 엄마 랑 손잡고 러시아 올때 가 1722년 네살 때거든. 그리고 작은이모 안나 가 차리나 하는거고. 잘나간겨 집안이. 이 여자가 시집간 곳이, 브라운슈바이크 집안이야. 여긴 그 하노버 영국과 친척이여. Wolfenbüttel 볼펜뷔텔 로 대표되는. 이건 따로 논하고. 이런게 설명이 안되면 쟤들이 안풀려 제대로.
여하튼 러시아 는 영국 과 친한겨. 러시아는 스위든 이 너무 싫고, 대신 합스부르크 와 친하고 합스부르크 는 영국이고 하노버여. 러시아가 이렇게 같이 인맥이 돼.
In 1739, Anna Leopoldovna (as she was now known) was given in marriage to Anthony Ulrich (1714–1774), the second son of Ferdinand Albert,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2] Anthony Ulrich had lived in Russia since 1733 so that he and his bride could get to know each other better.
안나 레오폴도브나 가 1739년 21세 에, 안톤 울리히 와 결혼을 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의 차남 이야. 표트르 대제 의 첫부인 아들 반란해서 대든, 얘도 부인이 이 볼펜뷔텔 가문이야. 이사람은 1733년 이후로 러시아에서 살아서 서로 더 잘 알았다. 그리고 이반6세 낳자마자, 차리나 인 이모 안나 가 죽고, 조카 가 낳은 아들 을 후계로 지명한겨. 안나 레오폴도브나 도 저때 22세 여 애엄마가. 신랑은 26세고. 볼펜뷔텔 집안이, 여기 와선 힘이 없는겨 하노버 직계도 아니고.
Biron, however, had made himself an object of detestation to the Russian people.[1] After Biron threatened to exile Anna and her spouse to Germany, she had little difficulty working with Field Marshal Burkhard Christoph von Münnich to overthrow him.[1] The coup succeeded and she assumed the regency on 8 November (O.S.), taking the title of Grand Duchess. Field Marshal Münnich personally arrested Biron in his apartment, where the formerly tyrannical Biron ingloriously begged for his life on his knees.
에른스트 비론.이 죽은 안나 의 애인 이란 설도 있고, 이사람이 쿠를란트 를 받고, 안나 가 죽으면서 이반6세 의 섭정을 시켜. 비론 이 알아, 자기가 러시아 에서 인기 없는걸. 이사람은 게르만이고, 이반6세 의 엄마 인 안나 레오폴도브나 에게, 신랑이랑 함께 도망을 가라고 해. 안나 레오폴도브나 가 먼 개소리냐 해대는거지. 군부 가 자기말을 따르걸랑. 필드 마샬 최고 군권이 비론 을 체포해. 비론이 러시아에서 떼부자가 되었걸랑. 무릎꿇고 빌어. 재산 몰수 당하고, 시베리아 로 유배형이 되고, 이사람이 나중에야 복권되서 구를란트 를 자식에게 물려주는겨.
저때 안나 레오폴도브나, 가, 감이 없는겨 이게. 정치감각이. 신랑도 마찬가지고.
Elizabeth Petrovna (Russian: Елизаве́та (Елисаве́та) Петро́вна) (29 December [O.S. 18 December] 1709 – 5 January 1762 [O.S. 25 December 1761]), also known as Yelisaveta or Elizaveta, reigned as the Empress of Russia from 1741 until her death in 1762. She remains one of the most popular Russian monarchs because of her decision not to execute a single person during her reign, her numerous construction projects, and her strong opposition to Prussian policies
드디어 나온,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표트르 와 예카테리나 사이에서 성인이 된 두 딸 중 하나여. 언니 인 안나 는 왜 거 고토르프 의 망나니 한테 시집갔다가, 고토르프 가서 표트르3세 를 낳고 죽었다 했잖니. 신랑 고토르프 는 모처럼 온 고향에서 놀러다니기 바쁘고. 유일하게 남은 여자가 엘리자베타 여. 쿠를란트 에서 온 차리나 안나 가 10년 있을때는 숨죽여 지내는겨. 1740년 에 31세 여. 엄마 예카테리나 의 감각을 이 딸이 익힌거지.
During the reign of her cousin Anna (1730–1740), Elizabeth was gathering support in the background. Being the daughter of Peter the Great, she enjoyed much support from the Russian guards regiments. She often visited the elite Guards regiments, marking special events with the officers and acting as godmother to their children.
엘리자베타 는, 죽은 차리나인 안나. 와는, 할아버지 가 같은 퍼스트 커즌 이야. 안나레오폴도브나 는 조카고 이반6세는 조카손자여. 저쪽은 이반5세 의 딸이고, 엘리자베타 는 표트르대제 의 딸이야. 안나 가 차리나 할때 인기 가 좋은겨 이여자가. 러시아 군부대가 특히 이여자를 좋아했고, 엘리트 근위대 를 종종 방문하고, 이벤트 있으면 가고, 근위대 아이들의 대모 도 한겨. 아 이여자 머리 좋아 진짜.
On the night of 25 November 1741 (O.S.), Elizabeth seized power with the help of the Preobrazhensky Regiment. Arriving at the regimental headquarters wearing a warrior's metal breastplate over her dress and grasping a silver cross, she challenged them: "Whom do you want to serve: me, your natural sovereign, or those who have stolen my inheritance?"
이반6세 애기가 오르고 1년 지나서, 황실근위대 지지를 받고서, 근위대 본부에 도착해서, 무사의 금속 가슴보호대 를 옷 위에 차고, 실버 십자가 를 쥔 상태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에게 써브 하고 픈가? 나, 당신들의 내추럴한 권력, 아니면, 나의 유산을 훔쳐간 그들? " 연설도 멋져. 일단 장식 을 잘 해야 하고, 쇼맨쉽에, 문장도 좋아야지.
Won over, the regiment marched to the Winter Palace and arrested the infant Emperor, his parents, and their own lieutenant-colonel, Count Burkhard Christoph von Munnich. It was a daring coup and, amazingly, succeeded without bloodshed. Elizabeth had vowed that if she became Empress, she would not sign a single death sentence, an extraordinary promise at the time but one that she kept throughout her life
부대가 윈터팰리스 로 진군해서, 아기 차르, 그의 부모, 그들의 군사령 미니크 를 체포하다. 무모한 쿠데타 였는데, 놀랍게도, 피한방울없이 성공하다. 엘리자베타 는 선서했다, 자기가 차리나 가 되면, 단 한명의 죽음판결 도 싸인하지 않겠다고, 당시엔 놀라운 약속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지켰다 ㅋㅋㅋ.
그래서, 저 가족들을, 감금은 했지, 사형시키진 않은겨 ㅋㅋㅋ.
죽은 사촌 차리나 인 안나 이오안노브나 완 달라. 이여잔 쿠를란트 에서 싸인하고는 상크피쩨르부르크 와서는 찢어버렸걸랑.
윈터팰리스 가 표트르 가 만든 레지던스, 황실집안이 사는 집 이야. 집무실 관청이 아니고. 이게 알렉센더 2세 가 암살당하고 이 집을 버리고 관청으로만 쓰는거고, 손자 니콜라스2세와 가족들이 총살당하는 집은, 우랄 산맥 아래의 집이야. 저기 윈터팰리스 가 아니고.
Despite the substantial changes made by Peter the Great, he hadn't exercised a really formative influence on the intellectual attitudes of the ruling classes as a whole. Although Elizabeth lacked the early education necessary to flourish as an intellectual (once finding the reading of secular literature to be "injurious to health"),[22] she was clever enough to know its benefits and made considerable groundwork for her eventual successor, Catherine the Great.[23] She made education freely available to all social classes (except for serfs), encouraged establishment of the very first university in Russia founded in Moscow by Mikhail Lomonosov, and helped to finance the establishment of the Imperial Academy of Fine Arts
엘리자베타 가 하는게, 사촌 안나 가 데려온 게르만들을 내쫓은겨. 인기가 없걸랑. 게르만들이 못해서 나쁜게 아니라. 러시아 자체가 원래 좋아질 수가 없어 환경이. 그 화살을 게르만에게 던지기 하는거고, 저 게르만 애들중에 재산 착취 해온 애들도 있을 테고 별놈의 인간들이 있을테니. 그런데 러시아는 저러면서 앞서나간거걸랑. 게르만 을 통한 서구화. 웨스터나이제이션 이야 러시아 이야기 할때 표트르 부터 붙는 단어는.
엘리자베타 가 한게, 교육 이야. 리터러쳐, 세속 문학 이 해가 되지만, 이게 넘쳐야해. 그녀는 똑똑했다, 충분히 알만큼, 문학의 이익들을. 그래서 굉장한 바닥작업을 했다 이걸 캐서린2세 가 이은거고. 그녀는 모든 계층들에게 자유롭게 교육 받도록 했다. 농노 는 제외하고. 그리고, 모스크바 대학 을 세우도록 했다. 이게 서기 1755년 이여자 일때야. 그리고, 파인아트 아카데미 를 세웠다. 쿠도제스트 가 아트 의 슬라브 말이야.
엘리자베타 가 from 1741 until her death in 1762. 32세 에 차리나 가 되서, 1741-62. 21년 하고, 53세 에 죽었는데, 딱히 병명은 없고, 곱게 죽은듯 한데.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1740-48, 7년전쟁 1756-63 을 포함하는 시기 걸랑. 이 여자는 쿠데타 로 권력을 잡아서, 가장 신경 쓰이는게, 이반6세 모자 야. 이게 성공한게, 일단 러시아 귀족들이, 모두 소외되었던게 결정적 이유야. 이 러시아 보야르 들이 모두 엘리자베타 를 편들면서 자기들 이익을 챙기고, 게르만애들꺼 뒤에서 계속 익힌겨 이제 지들이 웨스턴화 할거라며.
Ivan's reign, and his mother's regency, lasted thirteen months, for on December 6, 1741, a coup d'état placed Elizabeth of Russia on the throne, and Ivan and his family were imprisoned in the fortress of Dünamünde (13 December 1742) after a preliminary detention at Riga, from where the new Empress had at first intended to send the unhappy family home to Brunswick. In June 1744, following the Lopukhina Affair, the Empress transferred Ivan to Kholmogory on the White Sea where, isolated from his family and seeing no one other than his jailer, he remained for the next twelve years. When news of his confinement at Kholmogory circulated more widely, young Ivan was secretly transferred to the fortress of Shlisselburg (1756) where he was still more rigorously guarded, not even the commandant of the fortress knowing the true identity of "a certain prisoner". Throughout Elizabeth's reign her predecessor's name was subjected to a damnatio memoriae procedure; all coins, documents, and publications bearing Ivan's name and titles were systematically confiscated and destroyed, and now are of an extraordinary rarity.
이반6세 집안을 모두, 뒤나뮌데 요새, 쿠를란트 의 리가 여. 서쪽 끝에 가둬. 엘리자베타 는 브라운슈바이크 로 보내려 고 했어. 그런데 이게 그렇게 안되는겨 정세가.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1740-48 때, 러시아는 스위든과 전쟁이야 1741-43. 스위든이 이반6세 를 지원해서 쿠데타 를 하려고도 해. 못보내는거야. 1743년 에는 로푸키나 사건, 으로 역시나 저 이반6세 를 탈출시켜서 차르 만들려는겨. 저들을 콜모고리 로 옮겨. 백해 지역이야 오른쪽. 여기서는 이반6세 를 가족과 격리를 시켜. 12년간. 저때 너댓살이야. 이 콜모고리 에서, 엄마 가 병으로 죽어. 이 부부가 이반6세 포함 1남4녀 여. 감금상태에서 셋을 낳은겨. 아빠에 4녀 가 감금된거고, 이반6세 는 따로 감금된거고.
백해 콜모고리 에서, 이반6세 만 따로, 1756년 얘 16세에, 슬리실부르크 요새 로 옮겨. 라고다 호수 해변 섬에 있는겨. 더 엄중히 감시해. 교도소장도 쟤가 누군지 몰라. 완벽하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여.
이반6세 가 1764년, 24세 에 죽는데, 이땐 정상이 아니고 사람이. 엘리자베타 가 1762년 죽고, 캐서린2세 가 올라. 이 여자도 남편을 쿠데타 로 뒤엎고 차리나 가 된겨. 이반6세 를 못풀어주는겨 이게. 이 이반6세 를 탈출시켜서 차르로 올리려는 시도 가 있고 잡히고, 이때 걍 죽는겨 이반6세 가.
Anthony Ulrich (German: Anton Ulrich; 28 August 1714, Bevern – 4 May 1774 (O.S.), Kholmogory), Duke of Brunswick-Lüneburg,
In 1762, Elizabeth died, and the new Empress Catherine offered the Duke permission to leave Russia, with the condition he leave his children behind; but he declined. He lost his eyesight before he died. He was buried very discreetly, and the soldiers were forbidden to reveal the place of his burial, but his coffin was decorated with silver.
이반6세 의 아빠는,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공작 타이틀이야. 볼펜뷔텔 에 거점을 둔. 하노버 의 친척이고. 차남 이거든. 러시아 입장에선 가장 불편한겨. 예카테리나 2세 가 오르곤, 공작 은 러시아를 떠나도 되어요. 엘리자베타 21년 간 감옥생활 한거걸랑. 아들 은 슬리실부르크 로 간거고. 안톤 울리히 가, 거부를 해. 자식들 두고 혼자 가라는거거든. 아들이 1764년에 죽어. 10년 후에 죽은겨 1774년. 죽기전에 시력을 잃다. 그는 아주 따로 묻혔고, 병사들은 그의 무덤장소 를 밝히는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은 씰버 로 장식되었다.
In 1780, the surviving children were released from prison into the custody of their aunt, the Danish queen dowager Juliana Maria of Brunswick-Wolfenbüttel. They were taken to Novodvinsk fortress the night of 27 June and left Russia on 30 June. They settled in Jutland, where they lived in under a comfortable house arrest in Horsens for the rest of their lives, under the guardianship of Juliana and at the expense of Catherine. Having lived as prisoners, they were not used to social life, and kept a small "court" of 40/50 people, all Danish except for the priest. The pension granted them by Catherine was paid until the last of them died in 1807.
이사람 딸들이 네명이야. 서기 1780년 에야 풀려난겨. 첫째는 40인거고, 막내가 35되겄지. 숙모 가 덴마크 퀸 미망인이고, 저 볼펜뷔텔 가문이, 하노버 못지않게 인맥이 강력해. 땅은 하노버 밑에 허섭해도. 그들은 1780년 에 밤에 노보드빈스크 요새로 옮겨서, 러시아를 3일후에 떠나서 덴마크 에 정착하다. 거기서 편하게 남은 생을 살아. 돈은 숙모 와 러시아 캐서린 이 부담을 해. 감금 생활이지만 편하게 지내는겨. 사회생활은 못해. 사오십명 의 사람들을 부리다. 모두 덴마크인들 이고, 사제 제외하고는. 캐서린이 연금을 주다 그들 이 모두 죽는 1807년 까지. 캐서린2세 는 1796년 에 죽고. 이후에 자기 비용을 주게 한거지 자식 차르 폴 에 그 자식 알렉산더1세 까지 챙겨야 해.
The Russo-Swedish War of 1741–1743 was instigated by the Hats, a Swedish political party that aspired to regain the territories lost to Russia during the Great Northern War, and by French diplomacy, which sought to divert Russia's attention from supporting its long-standing ally the Habsburg monarchy in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1740-48 때, 러시아 스위든 전쟁 이야. 이걸 저기에 포함시키는데, 별개인거고, 프랑스가 저기 들어가는건 무식한 서술이고. 프랑스는 저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Malcolm Sinclair (1690 – 17 June 1739) 말콤 싱클레어 가 스위든 귀족에 외교관 이야. 스위든 이 대북방전쟁 때 러시아 에 땅을 다 뺏기고, 다시 회복 하려는겨. 칼12세 가 폴타바 패하고 오스만피신해서 둘이 친해졌거든 도망올때 죽을뻔도 했지만. 이인간이 오스만을 열라게 구찮게 했걸랑. 어쨌든 저 인연으로 오스만이랑 컨택이 생기고, 스위든이 오스만과 연합해서 위아래 에서 러시아를 치면 되는겨. 싱클레어 가 이스탄불로 밀사 파견되는거고, 이게 러시아 에 걸려서, 얘 서신도 뺏기고, 피살이 돼. 스위든이 이걸로 쳐들어가는겨 러시아를. 오스트리아 후계 시작되고. 이걸 결국 러시아 가 막는겨 엘리자베타 가 오르고 바로. 스위든 은 이반6세 도 거들먹 거리는거고.
저때 스위든 전쟁파 주전파 를 햇들, 평화파 를 캡들 이라고 해.
The Hats (Swedish: hattarna) The Caps (Swedish: mössorna) . 하타르나, 메소르나. 같은 모자 인데, 햇 은 저당시 유행한, tricorn 트라이콘. 모자 챙이 세개 가 올라간겨. 콘 이 유니콘 뿔이고. 삼각뿔 챙의 모자 가 햇 이고. 캡 은 나이트캡 이야 부드러운 모자고. 햇들이 기존 프랑스 와 연합해서 러시아 치자는거고, 캡들은 걍 나이트모자나 쓰고 좀 자자 하는거고.
Adolf Frederick, or Adolph Frederick (Swedish: Adolf Fredrik, German: Adolf Friedrich; 14 May 1710 – 12 February 1771) was King of Sweden from 1751 until his death. He was the son of Christian August of Holstein-Gottorp, Prince of Eutin, and Albertina Frederica of Baden-Durlach.[1][2]
저 전쟁 으로 조약을 맺고, 러시아 가 대북방전쟁 때 빼앗은, 핀란드 남부 땅에 키미 강 Kymi River 동쪽을 더 주고, 더 뺏긴겨. 그리곤, 스위든 의 다음 킹을, 아돌프 프레데릭 으로 하기로 협의를 봐. 스위든이 러시아 한테 진거야 전쟁이. 저때 스위든 의 퀸 인 울리카 가 죽어. 칼12세 의 여동생 이고, 고토르프 망나니 쫓아내고 퀸 하고, 이 신랑이 힘없는 킹을 하는 중이거든. 이 다음이 고토르프 의 오이틴 의 아돌프 프레데릭 이 결국 서기 1751년 부터 하는겨.
아돌프 프레데릭 은. 표트르 예카테리나 의 딸 안나 가 결혼한 고토르프 가 아냐. 이 고토르프 는 정통 장자 고, 작은 삼촌 핏줄이야. 고토르프 에서 나와서 오이틴 Eutin 에 프린스를 둔. 스위든 도 이 고토르프 가 킹을 이어 가다가, 나폴레옹 오고나서, 나폴레옹 의 휘하 애가 스위든 킹을 하는겨. 지금도. 저 본토 고토르프 공작 은 지금도, 러시아 죽은 짜르 니콜라스 2세 의 방계 핏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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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때 이반6세 집안이. 엘리자베타 가 권력 잡자마자, 러시아-스위든 전쟁 1741-43 때 언급되서, 못 풀어주는겨 이게. 그리고 또 바로 음모 사건이 터져 이반6세 탈출 옹립. 역시나 오스트리아 후계전쟁 중이고.
Natalia Fyodorovna Lopukhina (November 11 1699– March 11 1763) was a Russian noble, court official and alleged political conspirator. She was a daughter of Matryona Balk, who was sister of Anna Mons and Willem Mons. She is famous for the Lopukhina Affair, an alleged conspiracy engineered by the diplomacy of Holstein and France at the Russian court and centered on the person of Lopukhina.
나탈리아 로푸키나. 로푸키나 사건 이라고 해. 로푸킨 가문이, 또한 표트르 대제 의 첫부인 집안이야. 엘리자베타 는 둘째부인의 딸인거고. 웬수인겨 이게.
표트르 가 첫부인을 수도원에 보내고, 이때 애인이 네덜란드 여자여. 안나 몽스, 와 빌렘 은 남동생이고. 표트르가 이혼하고 안나몽스가 결혼할줄 알았는데, 표트르는 이때 눈 높을때야. 관심이 없어 결혼녀로는. 정말 기적이야 예카테리나 가 정식결혼한건. 이 나탈리아 로푸키나 의 엄마 가 몽스 집안이고, 결혼을 로푸킨 집안과 한거야.
엘리자베타 는 자기엄마의 연적의딸이고, 배 아픈겨 이여잔. 신랑집안도 로푸킨 집안에 표트르 첫부인집안이고.
In 1742, however, the French agents de la Chétardie and Lestocq arranged a complicated intrigue to slander both Lopukhina and Bestuzheva, thereby securing the downfall of the Austrophilic chancellor Aleksey Bestuzhev (Mikhail's brother). Lopukhina's affection for the exiled Count von Löwenwolde being well-known, her correspondence with this odious courtier was brought to light and presented to the Empress in the most unflattering light. Simultaneously, it was reported that her son Ivan Lopukhin, being drunk in a tavern, denounced Elizaveta's taste for English beer and mumbled several phrases which were interpreted calling for restoration of Ivan VI of Russia. The inquiry that followed established that the Lopukhin house used to be frequented by the Austrian agent Marquis Botta d'Adorno, who allegedly promised his support for restoration of Ivan VI on the Russian throne.
프랑스 가 오스트리아후계 전쟁 인데, 저때 대체 왜 러시아 를 건드린건지, 러시아 는 니덜 본토 노는데 쓸 여력이 없고 실제로도 거의 참전을 안해 저긴. 막판에 들어간겨 쟤들이 하도 들쑤셔서. 이 프랑스 가 음모 좋아하고 심심한겨 얘들이. 아마 뒤에 러시아 가 들어올걸 염려해서 사전 방지 차원에 작업이 들어간거일텐데.
드라 시타르디, 와 레스토크 가, 외교관으로 러시아를 와. 이때 러시아 의 친합스부르크 베스투제프-류민 이야. Alexey Bestuzhev-Ryumin 이 사람이 엘리자베타 군권의 실세야. 로푸키나 가 알렉세이 베스투제프-류민 의 형 미하일 의 부인과 친해. 이 로푸키나 의 편지 를 프랜치 들이 훔쳤다는겨. 그리고 동향을 써서, 이걸 러시아 코트에 터뜨린겨. 이 내용이.
로푸키나 의 아들 이 술취해서 술집에서, 엘리자베타 가 잉글랜드 맥주취향이 어떻다느니, 이반6세 를 다시 올려서 어쩌고 저쩌고 했다고. 더하여 로푸키나 집이, 오스트리아 스파이 보타 아도르노 가 종종 와서 이반6세 의 옹립을 보장한다느니.
Nevertheless, Lopukhina and Bestuzheva were publicly punished on September 11, 1743. They were brought onto a scaffold in front of the Twelve Collegia in Saint Petersburg, stripped naked, and flogged with birch rods and the knout on their buttocks.[1][2] Bestuzheva bribed the executioner to give her only a mock flogging.[3] The two women escaped execution, because before her accession in 1741, Elizaveta had vowed not to sign any death warrants as Empress. Lopukhina and Bestuzheva then had their tongues publicly torn out, and were exiled to Siberia.
로푸키나 와 베스투제바, 즉 미하일의 부인. 이 공개적으로 처벌 받아. 수갑채워져서, 옷 벗겨지고, 채찍질 받고, 엉덩이 곤장질. 베스투제바 는 뇌물을 줘서, 흉내 만 내게 해줘. 사형은 면해. 엘리자베타 가 사형에 싸인 안하기로 맹세 했거든. 혀를 찢어서, 시베리아 로 망명간겨.
엘리자베타 도 저 몽스 의 딸이 예쁜거에 엄마의 연적이야. 보복했다느니. 여하튼 엘리자베타 죽고 로푸키나 는 돌아와.
이반6세 와 그 가족들이, 풀려 날 수가 없는겨 저게. 정치적으로. 참 비참한 가족이야 저당시.
예카테리나2세 는 다음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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