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이땅은 역사가 없잖냐. 역사를 지웠걸랑 조선이. 유교의 病神들이. 유교가 인간의 혼, 인간의 신, 인간의 자유로움을 죽이는 종교걸랑. 

 

 

고구려. 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지금 몇일까?

 

 

고구려. 기원전 37년 ~ 668년. 가 있던 동안 중국애 나라가 몇 번 바뀐줄 아냐? 고구려가 이 한반도의 방패막이를 어드래 한지 아냐?

 

 

 

棕色為前87年西汉疆域. 기원전 87년 한나라 지도.

 

한. 前202年-220年.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   모본왕(慕本王)  >   二年 후한과 화해하다(0049년 (음))
후한과 화해하다 ( 49년 (음) )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註 048·어양(漁陽)·註 049상곡(上谷)註 050·태원(太原)註 051을 습격하였으나 요동태수註 052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냈다.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   태조대왕(太祖大王)  >   六十九年 후한이 침략해왔으나 수성이 이를 막다(0121년 (음))
후한이 침략해왔으나 수성이 이를 막다 ( 121년 (음) )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註 023자사註 024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 와서 예맥 거수(渠帥)를 공격해서 죽이고 병졸과 군마,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왕이 이에 아우註 025수성(遂成)註 026을 보내 병력 2천여 인註 027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의탁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인을 죽이고 사로잡았다.註 028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   태조대왕(太祖大王)  >   六十九年夏四月 고구려가 후한 요대현을 공격하다(0121년 04월 (음))
고구려가 후한 요대현을 공격하다 ( 121년 04월(음) )
여름 4월에 왕이 선비註 029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가서 공격하였다. 요동태수 채풍이 병력을 거느리고 신창(新昌)註 030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註 031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註 032공손포(公孫酺)註 033가 몸으로 채풍을 막아냈으나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었다.註 034

 

 

 

 

삼국시대(狹義협의 220年-280年,廣義광의184年、190年、208年-280年). 저 당시는 위.나라와 대치하다

 

 

 

 

 

그리고 진 晋朝(265年-420年). 서기 280년 지도. 황색은 진 왕조. 저때 고구려는 진과 대치하다 중국과는. 그리고 항상 중국 위로는 주로 선비족과 대치

 

 

 

 

 

 

5호16국. (304年-439年) 다섯 오랑캐가 16개 국가를 시간이 흐르면서 중원에 세우다. 진晋은 계속 땅을 잃으며 아래로 밀리다

 

다섯 오랑캐. 5호.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 저 16개국 외 자잘한 10여개국도 흥망하다

 

저때도 고구려가 저걸 버틴다.

 

 

특히 저 선비족의 모용부. 음청나다 쟤들. 

 

 

 

 

 

 

이어서 남북조 시대. 南北朝(420年—589年)

 

440年南北朝前期疆域圖:440년 지도. 위는 북위北魏. 아래는 송宋.
■ 淡藍色為北魏。
■ 紅色為南朝宋。

 

 

 

560年南北朝後期疆域圖:560년 지도. 옅은 파랑 북주北周, 짙은 파랑 북제北齊. 가운데 작은 분홍 서량西梁. 아래 홍색 진陳
 

 

 

 

 

 

이어서 수나라. 隋朝(581年—619年)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 598년 02월(음) )
9년(598)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니 영주(營州) 총관(摠管)위충(韋冲)이 이를 격퇴하였다. 수문제가 듣고 크게 화를 내고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에게 명하여 나란히 원수(元帥)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쳤다.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 612년 01월(음) )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註 036와 갈석(碣石)사이에 모여 요동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너무길어중략....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고 하였다.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남쪽 상건수(桑乾水)위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내고, 계성(薊城)註 050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지냈다. 황제가 친히 조절하여 군(軍)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 각 1인을 두고, 기병은 40대(隊)로 하였는데, 1대(隊)는 1백 인으로 구성되고, 10대를 1단(團)으로 편성하였으며, 보졸(步卒)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고,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인을 두었다. 그 갑옷과 투구, 영불(纓拂), 깃발은 단마다 다른 색으로 하였다. 매일 1군씩을 보내었는데,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도록 진영을 연이어 점차로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진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여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뒤이어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지금과 옛날을 막론하고 군대 출정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당. 唐朝(618年-907年)

 

고구려가 수나라의 삼백만 대군을 이기고 수나라 망하고 당이 서다. 그 후 50년 후에 고구려 망하다. 

 

 

망할 수 밖에 없다. 7백년 동안 저 중국애들이랑 그 위 야만족애들 막느라, 이미 힘이 다 한거라. 

 

 

 

 

고구려는 저 관점으로 보믄 아 증말 기가막히단다. 너무 애달파서 기가막히다 너무 대단해서 기가막히다. 고구려는 유럽의 게르만들 이상이다. 세계 최고다. 

 

 

 

 

광개토대왕릉비 아냐?

 

이땅의 病神 혼이 병든 이들.

 

이 病神들은, 관점이 시선이 오직 일본이다 일본. 

 

이 病神들은, 일본 이란 잣대만 들이대믄 사족을 못쓴다. 모든게 일본 때문이란다.

 

 

세상에 이따위 후진 이들이, 세상 인종사에 있을까?

 

광개토대왕비. 캬~ 그 글씨체 봤냐?

 

 

 

 

 

 

 

높이가 6.39미터란다. 어마어마한거다 비 자체가. 414년에 장수왕이 세우다. 이걸 1500년 가까이 지나서야 찾아 읽기 시작하다. 그것도 중국 관리가. 거기에 더해 일본애가.

 

중국애들은 중국에 불리한 글자 깨고, 일본애들은 일본에 유리한 글자를 덧칠했니 저쩌고

 

 

 

 

아 증말, 고구려. 아! 고구려! . 어드래 이따위 조선왕조라는 애들만 5백년동안 잇게 하고, 21세기에 복제판들이 유전자들을 고대로 이어받아서리, 어찌 이따위 땅에 저런 역사를 감히 남기시냐 그래?

 

 

태정태세문단세. 씨진언외우는것도 아니고, 의미없는 애들 역사는 달달 외우고. 

 

 

 

 

저게 당시 유행했던 예서체도 아니다. 그 이후의 해서체(명조체로 지금 쓰는)도 아니고. 예서체인데 저건 우리만의 예서체다. 문명은 저리 뻬끼는거다. 그대로 뻬끼는게 아니라 자기것이 담긴 복사질이 저런거다. 저 글자체 죽이는거다 저거. 모~든 예서체 중에 저런 예서체 있나 디비보거라덜.

 

 

 

저기에 써있는 글. 중에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6]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7]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

 

 

패려.가 내몽고의 강. 내몽고까지 가서리 tribes 야만족들을 진압하고, 바로 안 온다 고구려로.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저기가 요동지역들로 추정. 안보이는 글자 몇몇.. 18세 원문 二九. 이구십팔. 18살 고삼때 왕위에 올랐다. 영락대왕. 달력도 영락이다. 황제님이다 황제님. 고삼께서 즉위하시고 5년이믄 22살이니 23살이니. 먼 야만족 진압하시고 만주벌판과 요동지역 고구려땅 변경과 자기 영토를 시찰 하시고, 사냥도 하시고 돌아오다.

 

 

 

이따위 땅에 저따위 여유와 저따위 역사가 있었다더라.

.

 

 

 

 

 

저걸 이성계 가 위화도회군때 저걸 봤다. 쌩깠다.

 

저게 용비어천가에도 나온다. 지들꺼 아니란다. 쌩깠다.

 

지봉유설 쓴 이수광도 봤다. 쌩깠다.

 

조선시대에 다들 저걸 봤다. 다 쌩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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