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jmir I, Moimir I or Moymir I[1] (820s/830s–846)
모라비아 창립자. 모이미르 조.가 조카에 그 자식까지 3대 70년 인건데. 모이미르.는 게르만 루이 킹.이 베르됭 조약 843년 하고, 이 루이.가 모이미르1세를 죽이는겨. 모이미르가 아빠 경건루이 에 하미지 했다가, 아들 게르만 루이.에 반기를 든거걸랑.
Rostislav (datum narození neznámé – po 870, Bavorsko)
조카가 로스티스와프.야 이사람이 70이 다 된 게르만 루이.를 물리치고. 키릴 형제 불러서 예배 글자좀 알려달라고 초빙하고. 이때 슬라브 교회의 올드 슬라빅의 말을 소리나는 데로, 그리스 로마 알파벳으로 표기해 주다가, 비잔틴 코트로 와서 저들에 맞는 알파벳으로 창조한게 Glagolitic 글래골리틱 글자야. 슬라브 글자의 조상님이야. 이걸 뒤의 학파.가 키릴 문자를 만드는겨.
Svatopluk I or Svätopluk I, also known as Svatopluk the Great (was a ruler of Great Moravia, which attained its maximum territorial expansion during his reign (870–871, 871–894)
로스티스와프 다음이 스바토플루크.야. 이사람때 동프랑키아 게르만은, 게르만 루이가 죽고, 아들 삼형제 카를로맨, 루이 영거, 가 880, 882 에 죽어. 막내 뚱땡이 샤를.이 888까지 해. 이 샤를이 무능해서, 큰형 카를로맨의 아들 카린티아의 아눌프.가 저 뚱땡이 삼촌을 쫓아내고 게르만 킹을 하고, 황제를 해. 이사람이 쎄. 헌데 나이 50 즈음에 병으로 죽어. 이게 서기 899년.이야.
The Battle of Pressburg[4] (German: Schlacht von Pressburg) or Battle of Pozsony (Hungarian: Pozsonyi csata), or Battle of Bratislava (Slovak: Bitka pri Bratislave) was a three-day-long battle, fought between 4–6 July 907,
헝가리 마갸르족이. 결정적으로 자리잡는게 프레스부르크 전투. 브라티슬라바.의 서기 907년 전투야. 마갸르가 서기 811년에 다뉴브 하류에 처음 등장하고. 백년만에 자리를 잡는겨.
저때 게르만 킹.은 아눌프의 어린 자식 루이 차일드.야. 7세에 킹 오르고 14세에 프레스부르크 전투 당하고, 이 마갸르가 아우크스 부르크로 와 서기 910년. 이것도 헝가리가 이겨. 얜 바로 다음해 죽어. 그리고 프랑코니안.의 콘라트.가 게르만의 킹.이 돼. 이때 바바리아 공작.이 독립하려하고, 둘의 싸움에 콘라트가 죽고, 오토의 새잡이 하인리히.가 게르만의 킹 919년.에 바바리아를 다시 복속시키고, 아들 오토가 킹에 황제가 돼.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가 게루만 루이 말년에 뚱땡이 샤를때까지 삼형제.에 카린티아 아눌프까지의 사람이야.
Bořivoj I (Czech pronunciation: [ˈbor̝ɪvoj], Latin: Borzivogius, c. 852 – c. 889) was the first historically documented Duke of Bohemia and progenitor of the Přemyslid dynasty.[1] His reign over the Duchy of Bohemia is believed to have started about the year 870, but in this era Bohemia was subordinated to Great Moravia. One of the most important clues to the approximate time of his accession is the contemporary Frankish chronicle Annales Fuldenses, which mentions several West Slavic princes in the year 872, among them one Goriwei, who may be identical with Bořivoj.
보헤미아.의 창립자.가 프레미슬리드 조.의 보지보이 1세.야. 저걸 드보르작 처럼 보르지보이.로 쓰는데, 전혀 아냐 보지보이1세.여. 이사람이 오른쪽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에게 세입자 인듯 한 동맹을 맺는겨. 이게 서기 872년.이야. 이미 왼쪽 게르만 루이는, 할배 되서 이전에 로스티스와프.에게 패했고, 세 아들 빌빌대고, 보헤미아,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는게 서기 872년 인겨. 모라비아가 보헤미아 보다 높은 군주행세하고, 스바토플루크.가 키릴형제의 형,에 부탁해서 보지보이1세.를 세례를 하는겨. 보헤미아는 역사에 등장하자 마자 그리스도가 되고, 더치.란 타이틀이 붙지만.
보지보이.는 서기 867년 에 권력을 쥔걸로 봐. 이때 자기를 크냐즈. 라고 한거야. 이걸 둑스 dux. 라는 듀크.로 번역한거고. 이 더치.가 모라비아 스바토플루크.랑 만나면서 모라비아의 더치.로 보는 이도 있고, 그냥 독립국 둑스 추장이다 라는겨 주류는. 이전 작센 킹 시작 하두가토.도 둑스 지만 킹이걸랑. 이사람이 쫓겨났다가 스바토플루크.의 힘으로 다시 둑스가 되고, 두 아들이 잇는거야. 엄마도 그리스도, 걍 시작부터 그리스도야. 보지보이.는 시작이 프라하 서북쪽 근처고, 당대 또는 다음아들때 프라하 로 코트를 정한걸로 보여.
Spytihněv I (c. 875 – 915), a member of the Přemyslid dynasty, was Duke of Bohemia from 894 or 895 until his death.
보지보이 다음이 큰아들 스피티흐녜프. 이사람때가, 마갸르가 본격적으로 헝가리 평원에 자리잡을 때야.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고,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도 죽은겨. 스바토플루크가 생전에 동프랑키아 아눌프 게르만 킹이랑 동맹을 맺어 마갸르때문에. 헌데 다 이미 죽었어. 요때 마갸르가 쳐들어온거야. 모라비아는 지워지는거고. 보헤미아는 확실하게 게르만에 기대는거야.
Vratislaus (or Wratislaus) I (Czech: Vratislav I.; c. 888 – 13 February 921), a member of the Přemyslid dynasty, was Duke of Bohemia from 915 until his death.
브라티스와프.가 동생인데.
Vratislaus is credited with the establishment of St. George's Basilica at Prague Castle and also with the foundation of the Silesian city of Wrocław (Vratislavia). He died in battle against the Hungarians, possibly in 919, although 921 is more often conjectured.
이미 이사람때인. 서기 919년.에 수디티즈 넘어, 폴란드 남부인 브로츠와프.를 갖고온겨. 실레시아 라는 폴란드 남부가 이미 이때부터 체코땅이었던거야 이게.
Mieszko I; c. 930 – 25 May 992)
폴란드의 진짜 시작인 미에스코1세.가 훨 이후걸랑. 역사가 보헤미아가 백년이 빠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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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란 나라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합이야. 역사는 사모제국. 사모 samo 가 당대 서기 631-658 에서 끝나. 왼쪽 투링기아의 라둘프.에 패하고 사라졌어. 투링기아는 이전 메로빈지언의 프랑크에 들어온거고. 이게 7세기 프레데가르 연데기에 찍혔어. 그리고, 모라비아의 모이미르.가 서기 830년 전후야. 2백년 만에 다시 등장한겨. 보헤미아의 보지보이.가 서기 867년에 등장해서 5년후 872년에 오른쪽 모라비아, 모이미르의 조카의 아들 스바토플루크.에 의해 둑스.가 되면서 키릴의 형에게 그리스도 세례를 받아.
체코의 본격 시작은 사모 서기 631.이라고 하기 애매하고, 2백년 지나 모이미르 서기 830년.도 애매정도는 아니지만, 진짜는 서기 872년 모이미르 조카의 아들.에 둑스로 그리스도 되는걸로 보는겨. 2백년을 무시하기도 그렇고. 모이미르 직전에 레흐 Lech 라는 추장도 있었고. 아 샹 콕찝어 말하기 애매해. 일단 서기 872년 으로 봐.
폴란드는 진짜 역사는 미에스코1세여. 이전의 레흐 6세기 부터는 12세기 폴란드 연대기만의 이야기야. 미에스코 1세 이전엔 전혀 다른 곳에 언급이 없어. 레전드에 반 레전드로 봐. 폴란드 진짜 시작은 미에스코의 서기 960년 으로 보는겨. 이게 체코의 서기 872년 보다도 백년이 늦은겨 폴란드가. 사모 까지 보면 3백년이 늦은거고.
실레시아 땅을 보헤미아가 서기 920년 전후에 갖고오는겨. 미에스코 등장보다 40년 이전에. 보지보이 다음 장남 다음 차남때. 모라비아.는 스바토플루크 다음에, 마갸르들이 프레스부르크 전투 907년. 이기면서 모이미르 조.의 모라비아는 사라진겨. 그리고 보헤미아는 카롤린지언 게르만.의 듀크로 들어가고, 모라비아 지역은 보헤미아의 마크.로 들어오는거야. 그러다가 카롤린지언의 동프랑키아.는 프랑코니안 콘라트.가 독립하려는 바바리아 공작에 패하고, 이 바바리아를 오토 의 새잡이 하인리히.가 진압하고, 아들 오토가 게르만 킹에 황제가 되면서, 보헤미아는 완벽하게 게르만애들의 세입자 듀크.가 된거야. 그리고 모라비아는 왼쪽 보헤미아의 마크 보호령이 된거고.
듀크 란 작위는, 오토 황제 이전엔, 그냥 이민족의 킹.이고 크냐즈.고 추장이야. 중세 작위 개념은 오토황제 때부터 제대로 정착이 된겨 이게.
게르만어로, 둑스.라는 듀크.는 Herzog 헤르초크.여. 헤르.가 army 군대 란 뜻이고, 초크.가 리더.여 군대 리더.라는 사령관이야. 슬라브어로, 러시아는 크냐즈. 하는거고 폴란드는 크시아제. 하는겨. 이게 듀크 와 동격이고. 폴란드는 킹.을 게르만애들 보고 따로 만든 단어가 król 크롤.이야. 미에스코1세의 아들 볼레스와프1세.가 게르만애들 수준 맞는 말 킹을 따로 만든겨 크롤 이라고.
헤르만 헷세.할때 Hermann. 이 헤르만 이 군인.이란 뜻이야.
공작령 더치.가 독어로는 Herzogtum 헤르초크툼.이고
카운트 팔라틴.이라는 팔라틴 백작.이 독일어로 팔츠그라프.이고 이게 폴란드로 가서, 보이보드 voivod 가 되는거고. 지금 우리식 도지사.가 폴란드에서 보이보드.야. 폴란드 행정단위를 보이보드로 쓰는겨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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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가 프레미슬리트(드) 시작 보지보이1세 872년 이후 3백년 지나서 킹덤이 돼.
Ottokar I (Czech: Přemysl I. Otakar; c. 1155 – 1230) was Duke of Bohemia periodically beginning in 1192, then acquired the title King of Bohemia, first in 1198 from Philip of Swabia, later in 1203 from Otto IV of Brunswick and in 1212 from Frederick II. He was a member of the Přemyslid dynasty.
오토카르 1세.가 당시 게르만의 킹 슈바벤의 필립.에 의해 서기 1198년.에 캉덤으로 승격이 되고, 조카 프리드리히2세 황제.가 칙령으로 공식화 해주는겨. 그래서 보헤미아는 1198년에서 1918년 까지 킹덤이야. 720년 동안.
Henry VI (Heinrich VI) (November 1165 – 28 September 1197)
호헨슈타우펜 프리드리히1세.가 십자군 3차 가는길에 심장마비로 죽고 1190. 아들 하인리히 6세.가 황제에 올라. 그리고 이사람도 십자군 가려다가, 시칠리아섬에서 병으로 죽어. 니아 32세에.
Frederick II (26 December 1194 – 13 December 1250) was King of Sicily from 1198, King of Germany from 1212, King of Italy and Holy Roman Emperor from 1220 and King of Jerusalem from 1225.
아들 나중 황제 프리드리히2세.가 아빠 죽을때 다섯살.이야. 하인리히 6세황제의 동생이 슈바벤의 필립.이여. 12세 어려. 이사람이 게르만의 킹.이 되서 호헨슈타우펜을 지키는거야.
Philip of Swabia (February/March 1177 – 21 June 1208)
교황이 황제진영 서임권에서 승리한, 살리안조의 하인리히5세와의 보름스 협약.이 1122년.이야. 이때부터 황제는 완전히 교황의 밥이 된거야. 살리안조 끊기고, 호헨슈타우펜의 콘라트.가 게르만의 킹.하면서 바바리아와 작센의 겔피 존심 헨리에 아들 사자공 헨리를 이기고 저 땅을 뺏아오고 바벤베르크 와 아스카니아 에 나눠주고, 조카 프리드리히1세 황제가 다시 돌려주고, 다시 뺏아서 비텔스바흐 와 아스카니아 에 주고. 땅빼앗긴 겔피의 사자공 헨리.는 작센땅에서 반란하면서 이사람이 브라운슈바이크.에 자리를 잡는거야.
Braunschweig (German pronunciation: [ˈbʁaʊnʃvaɪk]
Low German: Brunswiek [ˈbrɔˑnsviːk]), also called Brunswick (/ˈbrʌnzwɪk)
브라운슈바이크. 영어로 브런즈위크 brunswick. 사자공 헨리가 여기서 죽어. 겔피 기벨리니.가 사자공의 아빠 존심헨리 vs, 프리드리히1세와 동생 슈바벤 필립.의 삼촌 콘라트부터의 2대 간의 분쟁이야. 겔피 헨리가 약한 입장인거고. 이게 이탈리아로 가서 겔피 기벨리니.로 프리드리히2세.와 그 아들까지로 가고, 이 여파가 단테 까지 가는거고, 호헨슈타우펜이란 기벨리니는 완전히 패하고, 겔피는 백겔피 흑겔피로 나뉘어. 반교황 친교황. 단테는 백겔피 반교황인거고 피해다니면서 신곡 쓴거고, 이 여진이, 보카치오 데카메론 1353년까지 오는겨. 데카메론에도 누군 겔피 누군 기벨리니 란 말이 나오고. 저 겔피 기벨리니.가 1494-1559. 이탈리안 전쟁에도 가. 겔피는 교황파였으니 친프랑스가 되는거고, 기벨리니는 황제파였어 친합스부르크가 되는겨 이게. 이 겔피 기벨리니가 이탈리아땅에선 아주 지긋지긋한거야 특히나 프리드리히2세 죽기 직전부터. 이게 250년 간 이탈리아를 분열시킨 바닥의 분파 줄기가 된거야.
저 이탈리아 겔피 기벨리니.는 프리드리히2세 죽고, 이 자식들이 앙주 샤를에 죽고 얘들이 나폴리 킹덤 세우면서 이름이 의미가 없어. 사자공 헨리의 자식들은 전혀 이 이탈리아 겔피 기벨리니와 전혀 전혀 상관이 없어. 걍 이름만 이탈리아에서 취하면서 파벌놀이를 한거걸랑.
사자공 헨리.는 브라운슈바이크(브런즈위크)에서 죽어. 한자동맹 도시들 다 개척하고. 이 브라운슈바이크.는 베저강 Weser 강 줄기의 지류여. 브레멘으로 흐르는. 같이 이름 붙는 뤼네부르크 Lüneburg 는 정북쪽 저짝 엘베강 하류여. 이 엘베강 끝에가 함부르크.이고. 브라운슈바이크 와 뤼네부르크.가 남북으로 백키로 떨어져 있어.
하노버.라는 도시는 브라운슈바이크 왼쪽에 있는 도시야. 역시나 베저강 지류에 있어. 베저강 본류가 주욱 헷세의 북부 캇셀에서 시작해. 이 위에 두개 지류 풀다 Fulda 베라 Werra 강이 만나 합쳐서 캇셀에서 베저강으로 브레멘까지 내려가는데, 하노버 나 브라운 슈바이크.는 이 베저강 오른쪽의 지류에 있는 도시들이야. 뤼네부르크.는 브라운슈바이크 정북쪽 백키로 떨어진 엘베강에 있는 도시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이 사자공 헨리의 손자.부터 시작해. 1235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준 공작령이야.
사자공 헨리.의 부인이, 잉글랜드의 마틸다.인데. 이여자는 헨리2세와 아키탄 엘레오노르.의 장녀여. 사자심왕 리차드의 누나야.
사자공 헨리.와 잉글랜드 마틸다.의 세 아들이, 각각 라인팔츠그라프. 로마황제 오토4세. 뤼네부르크 영주. 가 돼.
라인팔츠그라프.는 슈바벤의 필리프.가 준겨. 게르만의 킹일때. 이게 다음 자식으로 가고, 자식없어 마누라인 비텔스바흐.가 갖고 가는거고. 뤼네부르크.는 저 다음에 브라운슈바이크.와 함께 프리드리히2세가 공작령으로 줘.
즉 호헨슈타우펜.은 말야, 이미 게르만의 킹 슈바벤의 필리프.와 조카 프리드리히2세.는 저걸로 겔피랑 화해를 한거야 이건.
슈바벤의 필립.이 형 하인리히6세황제가 죽고, 게르만의 킹.으로 오르는데, 1122년 보름스협약 이후로 교황 세상이걸랑. 레반트십자군 초기이고. 완전히 교황이 황제의 세속권력을 갖고 노는겨. 교황이 대관식을 안해줘. 안티 게르만 킹.을 내세워. 이사람이 나중 황제되는 겔피의 오토4세여. 슈바벤의 필립.은 자기 조카딸 결혼식 갔다가, 비텔스바흐의 바바리아에 암살당하고 죽어.
Otto IV (1175 – 19 May 1218) was one of two rival kings of Germany from 1198 on, sole king from 1208 on, and Holy Roman Emperor from 1209 until he was forced to abdicate in 1215. The only German king of the Welf dynasty, he incurred the wrath of Pope Innocent III and was excommunicated in 1210.
다음의 사자공 헨리.의 아들 중 오토4세 황제야. 시칠리아 킹인 프리드리히2세.는 1194년 생이야. 삼촌 슈바벤의 필립이 1208년 죽을때 14세.고 이사람이 1212년, 18세에 게르만의 킹이 되는겨. 프리드리히가 대관식하는게 1220년 26세야. 아주 어릴때 교황이 해준겨. 쉽게 자기말 들을 줄 알고.
슈바벤의 필립.이 대관식을 못하고, 교황이 안티 게르만킹 내세운게, 역시나 보름스 협약 1122의 서임권 이행에 세속권 간섭이야. 고분고분 하지 않아. 요때 겔피 오토4세.가 교황한테 충성맹세를 하고 대관식 해준거야 교황이. 허나 오토4세가 황제가 되고보니, 이건 너무한거야 교황애들꼬라지를 보니까. 약속을 거부해 빈자리 서임권을 황제가 갖고오려 하는거고 여기저기 교회재산이 로마로 가는게 눈뜨고 못봐주는겨 오토가. 더하여 이탈리아에 프리드리히2세가 다 컸어 이십대로. 하미지 고개숙여라 를 안해 프리드리히2세 가.
오토4세 황제.는 리차드 사자심왕 누나의 자식이야. 이때 리차드는 이미 죽었어. 프랑스의 쪼잔탱이 필립2세.가 프랑스에선 아우구스투스 라 칭송하지만, 아 짜증 지대로걸랑 얘. 헌데 얘가 아키탄에 플랜태저넷의 프랑스땅을 다 갖고 왔걸랑, 리차드 사자심왕이랑 같이 십자군 갔다가 몰래 혼자와서리 리차드 동생 실지왕 존. 앉히고 대륙의 잉글랜드땅을 다 갖고왔어. 리차드는 부랴부랴 되돌아가다가 포로가 되고, 풀려나서 땅 회복하다가 죽고. 동생이 다 잃고 실지왕 되고.
이 프랑스 필립2세.가 신성로마의 일에도 개입하는겨. 오토4세는 잉글랜드 핏줄이걸랑. 교황편을 드는겨 프랑스 필립이. 당연히 프리드리히2세 젊은 애 편을 들면서 오토4세 반대에 서고. 교황은 저 갓 20넘은 프리드리히2세를 대관식해주고 너 말 잘들어라 하는거고.
프리드리히2세가 황제 되고, 역시나 교황 저거 머여, 맨날 살라딘의 조카가 술탄 된 쟤들 치러 십자군 가라고 들들 볶고. 억지로 가서리 걍 예루살렘 구경하고 와 보니 교황이 지가 이탈리아 킹행세 하고. 이걸 다 회복하고 롬바르디아까지 다 먹으려다가 죽은거걸랑 1250년.에 프리드리히2세가. 그러면서 겔피 기벨리니 절정을 가는건데.
슈바벤의 필리프.가 황제인 형 죽고, 게르만의 킹.을 하면서, 교황과의 대립때, 보헤미아와의 연합이 절실 해. 오토카르.가 저 분쟁중에 킹을 자처했다고 하고, 이걸 킹에 오른 슈바벤의 필립.이 승인하고,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해줘. 킹 이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영지인거고, 인사권에 개입을 못하는겨 황제는. 황제의 로마 대관식때 보헤미아킹은 별도의 가이드 친위대가 더 가는거고. 이게 의전이 달라. 그리고 오토4세가 즉위하고는 오토카르는 겔피에 충성하다가, 다시 프리드리히2세.가 황제가 되고는, 정식 칙령으로 보헤미아 킹.임을 서명해주는겨.
그리고 프리드리히2세.가 이전 오토4세의 동생네인 겔피땅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를 공작령.으로 지정하는거고. 이게 조선식 마인드로는 애매한거야 이해 안되는거고. 웬수의 땅을 공작을 주다니. 웬수의 애들에게 라인팔츠그라프를 주다니. 이게 조선애들에겐 이해가 어려운거야. 복수를 안하다니, 싄기한겨 저게.
관용에 더하여, 얽히고 섥인 정치관계를 저렇게 푸는겨. 자기편 만들려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가 백키로 떨어진 도시, 베저강 엘베강 전혀 다른 두강.의 도시를 묶어서 1235년. 사자공 헨리의 손자가 공작이 돼.
In 1636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ruler of the Brunswick-Lüneburg principality of Calenberg, moved his residence to Hanover.
4백년 후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조지.가 30년 전쟁 중인 서기 1636년.에 하노버.로 코트를 옮기는겨. 즉 이전에는 코트가 두 도시 왔다갔다 한거야. 칼렌베르크.도 하노버의 옆이고.
하노버로 옮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조지.가 아들이 넷.이야
- Christian Louis, Duke of Brunswick-Lüneburg (1622–1665), Prince of Calenberg from 1641-1648, and Prince of Lüneburg from 1648-1665.
- George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1624–1705), Prince of Calenberg from 1648-1665, and Prince of Lüneburg from 1665-1705. He was the father of Sophia Dorothea of Celle, wife of the future King George I of Great Britain.
- John Frederick, Duke of Brunswick-Lüneburg (1625–1679), Prince of Calenberg from 1665-1679.
-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1629–1698), Prince of Calenberg from 1679-1698, and father of King George I of Great Britain.
저기서 맨 막내 어니스트 아우구스트.에 시집간 여자가, 잉글랜드 제임스의 딸 라인팔츠그라프 프리드리히5세 에 시집간 엘리자벳.의 딸 소피아 인겨.
백산전투에서 패하고 브란덴부르크에 헤이그로 망명해 다니는 저 두 부부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벳.이 자식이 13명이야. 네번째자식은 프라하에서 낳은거야. 30년 전쟁동안 10명을 낳은겨. 금슬이 참 좋은 부부였어 진짜루. 나중 혼자된 엄마에 치근덕 거리는 인간을 자식이 죽이기도 해.
저중에 소피아가 1630년 에 낳은 12번째 자식이야. 이 소피아.가 1658년.에 저 하노버의 막내 에게 가는겨.
하노버 가문이라는게 하노버로 코트를 옮기는 조지 부터. 시작하는거지만, 4백년 전의 사자공 헨리인 겔피의 후예들이야. 이들은, 엄마가 리차드 누나여. 족보 자체가 잉글랜드여 엄마쪽으로.
저 위의 세 형들이, 자식이 없어. 둘째형은 뤼네부르크 위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라우엔부르크.가 핏줄이 끊겼어. 하노버를 동생 존 프레데릭에게 주고 라우엔부르크.로 간거야. 이 셋째형도 자식없이 죽어. 이걸 나이 이게 50 이 된 막내가 받는겨. 1679년에. 그리고 저짝 잉글랜드 오렌지 윌리엄의 명예혁명 1688에 처제 앤.이 퀸하고, 여기 하노버의 소피아 핏줄로 잉글랜드 조지들의 세상이 지금까지 엘리자벳2세 여왕인건데 말야.
50되서 하노버 공작이 된 소피아 부부가. 그리고 나서 하노버 선제후.가 되는겨. 이때부터 하노버 선제후고.
소피아 핏줄의 제임스 잉글랜드 스튜어트 지만, 이전 4백년 훨 이전의 시조 할머니.가 사자심왕 리차드의 누나였어. 여기 하노버에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족보가 반은 잉글랜드인겨 이게.
여하튼간에, 보헤미아가 1198년에 킹덤이 된건. 겔피와 호헨슈타우펜.의 틈에서, 겔피라는건 결국 교황의 대리인일 뿐이야 이건. 교황과 황제의 싸움이고, 교황과 호헨슈타우펜의 싸움이고, 겔피는 패하고 뺏기고 다 털어버리고 저 위 브라운슈바이크를 기점으로 새로 출발한겨. 겔피란 이름은 아랫동네에서 지들 간판으로만 쓰는거고 교황 대신에.
저 틈바구니에서, 한쪽은 보헤미아 킹덤을 만들고, 다른 한쪽은 참 우연찮게도 4백년 이상을 버티다가 영국을 잇고, 독일땅에선 라이프니츠.를 만들어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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