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칼뱅주의가 득세를 하게 되었나. 세력을 얻었나. 

 

저건 츠빙글리가 만들어준거고, 츠빙글리의 취리히가 만들어준겨. 이게 뜬굼포 칼뱅 이 역사를 취한거걸랑 황당한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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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는 Eisleben 아이슬레벤 태생이야. 여긴 지금 작센안할트 주 남부야. 이 아래가 투링기아 이고. 즉 여긴 하르츠 산맥 Harz 기슭인겨. 여긴 당시 만스펠트 백작령.이야 Mansfeld.

 

만스펠트 가문의 그라프.가 서기 1069년.이야. 만스펠트.란 도시가 아이슬레벤 왼쪽이야. 베틴가문도 시작은 이쪽에 있던거고. 곰 알베르트의 아스카니아 가문도 여기여. 이들이 죽 올라가서 브란덴부르크 를 만든거고. 

 

만스펠트가 위에는 비텐베르크 작센이고, 오른쪽에 아래는 같은 비텐 작센의 마이센 후작령 드레스텐이고 아래로는 투링기아에 작센애들이야. 만스펠트는 프로테스탄트 시기에 중간 입장 취하다가 프로테스탄트로 전형하는겨 주위 작센애들 때문에. 여긴 위에가 마그데부르크 Magdeburg 여. 이 마그데부르크.는 그 위 브란덴부르크 에 먹혀. 그리고 만스펠트 백작령은 아이슬레벤과 함께 작센 선제후와 마그데부르크 로 찢어지면서 사라져 이건. 

 

마르틴 루터.는 저 애매한 만스펠트. 백작령에서 태어난겨. 결국 만스펠트.란 백작령은 자기가 낳은 루터가 작센 선제후에 붙으면서 자기들도 결국 프로테스탄트에 엉겁결에 끼게 되다가 루터 이후에 사라진 땅이 된건데.

 

마르틴 루터.를 보면. 걍 얜 무식해. 마르틴 루터.가 캐터키즘 이란 초보용 교리응답서를 나중에 작업할때도 똑같은 말을 해. 아 어째 우리네 카톨릭은 왜 이리 무식하냐? 하면서 자기가 교리응답서를 게르만말로 쓰면서 한탄하기도 하는데. 무식한 애가 무식한 애한테 무식해요 하는거걸랑. 

 

이 독일땅이란 곳이 말야. 정말 개무식한 땅이야 이게. 라이프니츠 가 어떻게 이런 그야말로 깝깝한 라이프니츠.도 바로 이 동네야 다 도찐개찐이야. 라이프니츠도 파리와 런던의 인간들을 안만나고, 잉글랜드의 소피아 모녀를 안만났으면 라이프니츠 란건 없어. 지금 독일이란건 없어 이건. 라이프니츠 없는 독일이란 상상을 못해. 

 

정말  무식한거걸랑. 츠빙글리가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펑펑 우는겨. 저 비텐베르거 들 대갈을 붙이면 저런 말들이 이해는 되까? 

 

이 라인강 동쪽 지역이 로마를 배운 갈리안이 없는 그야말로 게르만들만의 땅이걸랑. 그래서 늦어진거고 교황한테 휘둘린거고 그야말로 갖고 놀기 좋은 무리들이 된건데 말야. 이게 단적으로 유니버시티 라는 대학으로도 볼수가 있는겨.

 

마르틴 루터.가 입학한 대학이 에르푸르트 대학이야. Erfurt. 에르푸르트 가 투링기아의 지금 수도야. 완전히 가운데 도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의 도시여 여기가.  깝깝한 겨. 이 에르푸르트 대학.이 라인강 동쪽 게르만애들땅에 

 

처음 세워진 대학이야 이게. 그것도 여기 투링기아 산골짜기 한 가운데. 

 

이게 서기 1379년.에 세워진겨. 중세 대학 중 35번째 세워진 대학이야. 알프스 넘어 신성로마제국 땅에 처음 세운겨 이걸. 볼로냐 대학 1088년. 파리대학 1150년. 옥스포드 대학이 직전후고 차터는 파리대학보다 늦게 받아. 얘들보다 2백년이 늦은겨 독일땅이. 

 

이전에 유럽에는 볼로냐를 시작으로 바로 스페인땅 잉글랜드땅 스콧땅 하물며 더블린에도 들어서고, 더 하물며 체코 프라하.에 폴란드 크라크푸 에도 대학이 들어서. 비엔나 대학이 33번째 1365년 이야. 다음에 헝가리 페츠대학이1367년 이야. 그리고 12년 지나서 에르푸르트 대학이 들어서는겨. 

 

저놈의 독일땅은  체코 폴란드 헝가리 보다도 늦은겨 이게. 오스트리아도 겨우 헝가리보다 빠를까.

 

 한심한겨 저건. 그만큼 저놈의 지쩍 수준이 저 게르만놈들의 지쩍 수준이 허섭에 허섭할 수 밖에 없는거야.

 

 

There is no official definition for the term studium generale. The term studium generale first appeared at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out of customary usage, and meant a place where students from everywhere were welcomed, not merely those of the local district or region.[1]  

 

유니버시티.라는것의 시작이 스투디움 게레랄레.인데. 이 단어는 13세기 초에나 보이는거고. 볼로냐 부터 이걸로 보는거야. 이건 영지인에 국한하지 않아.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개방된 대학이야.

 

영지인들이 자기들 코트 인재를 위한 교육기관이 칼리지.인겨. 과목은 대동소이해. 세상 모든 학문을 다 배워. 세상 모든 언어들을 다 배워. 

 

조선은 저걸 따라가려면 , 아 말을 말아야지. 

 

스쿨 이란 성인 이전의 학교는 잉글랜드 6세기여. 여전히 있어 캔터베리 킹스스쿨 서기 597년. 유럽애 저런 스쿨들이 넘쳐났던겨 중세에 이미. 유럽은 저 교육 으로 지금 문명을 만든겨 이게. 

 

 

The pope was not the only supplier of privileges. The Holy Roman Emperor also issued imperial charters granting much the same privileges, starting with the University of Naples in 1224.

 

종합대학이라는 1088 볼로냐 부터는 모든 영지인들에게 개방이 된건데. 이건 차터를 받는겨. 교황한테 받는거고, 또한 황제도 발급권이 있는거야. 즉 신성로마땅은 대게 황제가 인가를 하는거고, 이 외 지역은 교황이 인가를 하는겨. 잉글랜드 킹덤의 대학을 황제가 머라고 차터를 발행을 하겠니. 

 

마르틴 루터.가 번개 치는거 무서버서 법학에서 신학 전향한게 1505년 22세때여. 에르푸르트 대학 졸업할때 즈음이야. 

 

On 2 July 1505, while returning to university on horseback after a trip home, a lightning bolt struck near Luther during a thunderstorm.  

 

방학이라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 가는길에, 말타고 저 산골짜기 넘어 가는길에 번개한방 맞고 공포에 쩔어서 신을 찾기 시작한건데.

 

아 얜 이런것 부터 가 너무 후져 이건. 토마스 뮌처에 츠비카우 예언자놀이 세 친구도 저러지는 않걸랑. 걍 각성을 한거걸랑 저들은. 츠빙글리 장칼뱅도 시대의 인문학 흐름에 자기가 각성을 한겨. 헌데 우리 루터형은 번개 한방에 아잉 . 

 

미개한겨 저 게르만 애들이. 츠비카우 예언자 놀이도 마찬가지야. 걍 지저스 출현할때 온갖 예언자 라미 나서는거랑 또옥 같은겨. Montanism 몬타누스 가 2세기 후반에 뮈시아에서 예언자 놀이. 이걸 독일땅에서 저때 하는겨 뮌처가 만난 츠비카우 세명이. 비텐베르크 가서 내가 예언자요 해대는거고. 왜냐면, 얘들이 천년 만에 어느정도 레반트 흉내를 낼 정도가 된겨 이게. 

 

대학이 그만큼 늦게 세워진거걸랑. 정말 게르만들은  무식한겨. 오른쪽 슬라브 애들보다 더 무식한겨 이게. 마갸르 애들과 비슷한거야. 너무한거야 이건. 마갸르들은 9세기에나 들어온 애들이걸랑. 아 슬포 이놈의 게르만 무시기들.

 

마르틴 루터.가 끽해야 저런 분위기에서 생산된 인간이야. 얼마나 무식하겄냐 말이지. 그래서 농민전쟁 진압도  지가 농민들 사탄이여 사라져라~ 하니까 사라진거고, 얜 완전히 총칼 갖은 작센 애들 밑에서 지저스 놀이 한거야 이게. 그리곤  지가 탈출 도망시킨 수녀 랑 결혼을 하고. 결혼을 왜 안합니까요 여러분 해댐시 결혼합세 하고. 

 

세상이 루터를 버리고, 츠빙글리를 더한 칼뱅으로 갈아탈 수 밖에 없어. 얜 피카르디 애걸랑. 오른쪽 플랑드르에 왼쪽 파리가 섞인 인간이야. 한 세대 아래야. 이전 의 숱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이야기들을 앤 다 겪었어. 갓 25세에 쓴 교리서도 수정 보완하면서, 남들이 보기엔 훨 나아보일 수 밖에 없어. 

 

우리가 교리가 다르다 라고 서로의 이야기들을 비교할 때 말이야.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관점은.

 

후대에 나온 것의 이야기는, 앞선 것에서, 살이 막 더 붙을 수 밖에 없어. 그 매듭 이야기들 꼭지들 별로, 이전 의 세대가 말하지 않은 것에 덧붙여서 살을  더 붙이고 덕지덕지 해지는겨 이게. 이런 표현과 내용들은 그 앞의 세대들이 했던 이야기에선 나오지 않은 것들이걸랑. 매듭 논제들에 덧대기가 심해지는거야. 

 

이미 앞선 세대는 죽었어. 저기에 대고 머라 할 수 없어. 그 후예들이 그걸 이어받아서 되받아친다고 해서 이 후예들이 앞의 선배들꺼를 대표한다고도 볼수가 없걸랑. 

 

저걸 제 삼자 입장에서, 그래서 이게 다르다 저게 다르다. 하기가 어려운겨. 왜? 뒤에 시작한 놈은 앞의 놈의 이야기에 덧대기를  해댄거걸랑. 그 덧대기 한 것에 대해 반론 반박한 앞의 애는 이미 죽었어. 그걸 어떻게 비교를 해?

 

그래서 제삼자가 저 덧대기 한 애의 말들을 구구절절히 좇아가서 익혀보려 하는거걸랑. 저건 걍 시대가 지나면서 더해진 단어들과 더 주작된 복잡어들의 표현일 뿐이걸랑 저게. 그게 옳다 그르다 싫다 좋다 는 또 그에 반박하면서 새로운 논조 만들고 또 그는 걍 자기나름대로 그 시대에 다시 등장한 말과 단어들로 말글질 할 뿐이고. 

 

비교한다는게 의미가 없어 그래서. 쟤는 그런 얘기 했는데 앞의 놈은 그런얘기 안했어. 그래서 달라. 그게 말이 안되지 뒤의놈이 덕지덕지 자기만의 관점으로 자기만의 단어들로 조합해서 막 말을 해. 가만 보면, 앞의 애가 했던 말들의 단어와 조합을 이해못함이고 똑같은 의미에 대한 걸 서로 다른 단어로 썼을 뿐이고 하는 사례들이 태반이걸랑. 걍 찔끔 쪼끔 달라보이는거 같고 서로 이름들 내세우는거고. 

 

사조를 비교할땐 저런걸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종교의 교리이든, 철학 사조든, 예술 사조든, 모든건 그 바닥이 정치사회적인 역사에 뿌리를 두는거야 이건. 당시 시대상황 을 배제한 책 글자 읽기는 무의미한겨. 우리네의 철학 예술 문학 론들이 다 허공에 뜬 뜬구름 주작 이야기인 이유야 이게. 정말 우리네는 쟤들 이야기를 전혀 모른체 예술이 어쩌고 문학이 저쩌고 철학이 그쩌고 하는거걸랑. 너무나 너무나 무지한 수준인건데 이건.

 

마르틴 루터.이야긴 이전 썰했으니 중복 넘어가고, 이사람은 다시 말하지만, 마음 바닥이, 로마 카톨릭 이 싫은거야. 얜 이게 가장 커. 로마 카톨릭의 저 교회.가 싫은거고, 저 교회의 인간들이 싫은거야. 로마라는건 부정부패 일뿐이야 얘 눈깔엔. 그래서 1517년 대자보의 95개 논제 라는건. 오직 하나야 인덜전스. 인덜전스 를 95개로 나눠서 조목조목 비판한거걸랑.

 

이놈의 인덜전스.란게 말이  어려운겨. 인덜지. indulge 란 걸 하고싶은데로 하고 사치에 탐닉 어쩌고에 뜬굼포 면죄부여 이게.

 

From Middle French indulgence, or its source, Latin indulgentia

 

indulgeo. 라틴어 인둘겐티아.에서 온건데. 인둘게오. 나는 인덜지 한다는 거걸랑. 

 

이건 나를 확 풀어버린 상태야. 내 몸을 대상에 그냥 맡기는겨 이건. 아잉  맘대로 해 나는 너꺼야 라는 감정이야. 그래서 그 대상이 좋은 거면, 내가 친절과 관용이 되는거고. 대상이 나쁜거면 나는 탐닉에 사치가 되는겨. 

 

이걸 로마 카톨릭.에서 인둘겐티아 로 만든거야. 미들프렌치.이고 이 라틴어도 이때 등장하는거야 이건. 

 

(Roman Catholicism) A pardon or release from the expectation of punishment in purgatory, after the sinner has been granted absolution.  

 

연옥에서 죄받을걸 미리 용서를 받은거고, 지인이 연옥에서 구출이 된거야. 파르동 이란건 용서를 한겨. 인덜지 란건 여기서 좋은 말이야. 케이터링 음식을 주는겨 남에게. 남을 위해 나를 다 던져버리는 행위야. 친절이야 이건. 로마 카톨릭이 이건 자기들이 친절을 쎄게 배푼다는겨. 

 

연옥이란건 11세에나 창조된 세계야. 

 

저건 로마 카톨릭이 창조한 세계야. 갓 교황령 사기질로 얻고, 1054년 동서교회분리 되고, 서임권을 빌미로 알프스넘어 세속권을 뺏아올때 등장한겨 이건. 그러면서 로마 교황이 소설 하나 쓴게 연옥이란 세계야. 

 

자 연옥이란게 이쓰요, 지옥은 한번 드가면 못나오지만 연옥은 죄를 다 사하면 나올수 이쓰요. 그 권한은 하늘 땅 지옥 삼중관의 열쇠를 갖은 나 교황이 할수 이쓰요. 여러분~~ 내가 인덜전스 를 배풀거쓰요~~ 돈내세요 돈 돈 내랑께.

 

이 로마교황이 아젠다를 잡고 쥐고 흔드는건, 탁월해 지금 보믄.

 

저런게  특히나 알프스 넘어 게르만애들한테 먹히는겨. 

 

저게, 이탈리아 애들에게 먹히겠니? 동쪽교회 진영에 저따위 말이 먹히겠니? 오직 샹 저 알프스넘어 게르만 동쪽애들이 주 고객대상이 되는겨 이게. 

 

아 증말 너무나 탁월한 안목인데 나만의. 

 

저게 마르틴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크 포함 저놈의 산골짜기 동네에서 특히나 유별난겨 저게. 고객이 들끓는거고. 

 

얜 요거 하나 95개 사례를 나열하면서 조진거걸랑. 그러다 이게 커진거야. 그러면서 자기만의 교리를 그제서야 만들기 시작한게 루터리즘.이야. 그러면서, 고민을 해대는거고, 그래! 에반젤리칼. 성서로 돌아가자. 복음으로 돌아가자. 

 

이 에반젤리칼.이란 말은 마르틴 루터.의 특허품 이야. 루터이전에 없던 말이 아니라, 지금 에반젤리칼 이란 말을 흔하게 인지하게끔 한건 저당시 루터.야. 

 

프로테스탄트 란 말은 슈파이어 회의에서 모인 영주들.이 쓰던 말이야. 이 프로테스탄트.는 영주들에게 저작권이 있어 이건. 이게 서로 다른겨. 

 

저런 아주 근본적인 것 조차 아마 한글로 말하는 인간 단 하나 없을텐데 말이야.

 

The 6 Princes[edit]

The 14 Imperial Free Cities[edit]

1529년 슈파이어 다이어트 제국회의때 프로테스탄트가 나오는겨. 농민전쟁 진압을 이들 영주들이 했어. 당당하게 요구하는겨 카를5세에게. 저들이 프로테스탄트 20명이야. 저때 영주들이 작센선제후 동생 끈질공.이고 어린 헷세의 필립.이고. 호헨졸레른 이 저기서 등장해 브란덴부르크로. 겔피의 브룬스위크 뤼네부르크 가 두명이고. 곰알베르트의 아스카니아.가 6명중 하나고. 여기에 도시들 14개의 시장들이여.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 아우크스부르크 울렘 콘스탄츠 린다우 콘스탄츠 호수 도시들에 바로 다뉴브 줄기의 도시들이야. 라인강 상류 도시들에. 세인트 갈렌 이라는 스위스 캔톤도 있고. 스위스 접경도시들이 저게 보믄 대부분이여 저게. 스위스가 핵이여 저 자잘한 도시들에선.

 

저들 6명의 작위를 갖은 듀크 란트그라프 프린스 영주들과, 14개의 자유도시들의 땅이 이게 성격이 완전히 다른거야. 

 

저 위 여섯.은 마르틴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와  가까운 루터애들의 땅이야. 여기서 헷세의 필립만 완전히 동떨어진 라인강이야. 얘도 나중에 캇셀의 장남은 칼뱅이 되는겨.  당연하게도.

 

14개의 자유도시들은, 저게 모두 칼뱅이 되는겨 나중엔. 대부분. 헌데 이들은, 칼뱅 이전엔 취리히의 츠빙글리와 성격이 똑같아. 칼뱅 되기 이전엔 다들 츠빙글리여 이게. 

 

스트라스부르 아우크스부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엔 켐프텐 뇌르틀링엔 하일브론 로이틀링엔 이즈니 세인트갈렌 바이센부르크 빈트샤임. 모두 슈바벤리그 지역이여 여기가.  여기가. 반 이상은 스위스와 맞붙은 접경지역이고. 

 

저긴 모두 독일 농민전쟁 땅이었고, 이전 분트슈흐 운동의 땅이여. 이들은 저 공작 백작의 여섯과 이게 성격이 전혀 달라. 헷세 빼고. 헷세도 결국 저 14개 도시들과 같이 갈수 밖에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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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전쟁.이 1522-23 이고, 독일농민전쟁이 1524-25. 

 

저들은 모두 패해. 저 패배자들의 땅은 이후 츠빙글리가 만든겨. 츠빙글리의 취리히가 슈바벤 지역의 도피처가 또한 된거고. 

 

츠빙글리는  억울한겨 역사적으로. 저걸 말야 장 칼뱅이란 이름으로 얘가 다 처먹은겨 츠빙글리의 피의 역사를. 이건 부당한거야 진짜. 

 

츠빙글리.는 죽을 줄 뻔히 알고. 자기가 총칼들고 싸운겨. 

 

츠빙글리.가 번역해서 내 논 성경.이 최초야 지도를 그린건. 구약이든 신약이든, 지도 없는 이야기는  의미없는겨 그건. 어떤 이야기든 간에, 지명 지리 이해 없는 이야긴 그야말로 무의미해. 지명 지리 이해 없이 책읽기는 그건 읽으나 마나야. 아무런 이해가 되지 않아. 

 

아 생각할수록 열받네 츠빙글리. 

 

The Knights' Revolt (autumn 1522 – 7 May 1523) was a revolt by a number of Protestant and religious humanist German knights led by Franz von Sickingen, against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Holy Roman Emperor. It has also been called the "Poor Barons' Rebellion." The revolt was short-lived but would inspire the bloody German Peasants' War of 1524–1526.  

 

지킹엔과 후텐의 기사들의 반란이 1522-23. 이들이 가는곳은 트리어.야. 교황의 로마는 너무 멀어. 트리어 대주교 조지러 가는겨. 이들이 싫어하는 과녁은 로마 카톨릭이야. 

 

In addition, the Count palatine and the Landgrave of Hesse came to Richard’s aid. After seven days siege, including five assault attempts, Von Sickingen ran out of gunpowder, and retreated to Ebernberg. Meanwhile, the Imperial Regency Council laid on him the Ban of the Empire.  

 

저 기사들을 진압하는건 라인팔츠그라프.와 헷세의 란트그라프.야. 헷세의 필립이 1504년생이고 저때 갓 18세인겨. 다섯살때 백작이 되고 엄마섭정하고 갓 혼자 할때야. 얘가 제일 어려. 가장 어릴때 작센 할배 형제 선제후들이랑 놀은겨 이인간이. 기사들의 반란.과 농민전쟁때 이 스물직전후에 얘가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선거야. 

 

그리고, 라인팔라틴백작.이 저때 비텔스바흐 가문이야. 이 가문이 바바리아 공작.을 1180년 부터 해. 호헨슈타우펜 할배 프리드리히1세 부터. 그리고 라인팔라틴백작이 되는게 1214년 이야. 34년 지나서 라인팔라틴을 받아. 이때는 겔피 사자공 헨리가 죽고, 라인팔라틴백작은 사자공 헨리.의 브룬스위크 아들과 그 아들에게 준거야. 프리드리히1세의 아들 하인리히6세.가 미안한겨. 겔피 가문과 이 호헨슈타우펜 가문의 애증이  깊어. 이걸 하인리히6세가 저 사자공 헨리 죽고, 그 아들에게 라인팔츠그라프.를 준거야.

 

사자공 헨리의 아들.이 라인팔츠그라프.를 받고. 다음 아들이 결혼하는 여자가 비텔스바흐 가문 바바리아의 아그네스.인데. 자식없이 죽어 바로. 이 라인팔츠그라프.를 이때 1214년부터 그래서 비텔스바흐.가 또 갖고 가는겨. 이게 선제후권이 되고, 바바리아와 함께 비텔스바흐가 20세기까지 여기도 잇는거야. 

 

라인팔츠그라프.가 비텔스바흐가 갖고 가면서, 이게 나뉘는겨, 프랑코니아지역 아래의 어퍼팔리틴.과 라인강의 로우팔라틴. 고지대 저지대로. 라인팔라틴 선제후권은 이 두지역을 다 대표하는거고. 라인팔츠그라프는 나뉜 상태에서 타이틀은 동시에 다들 취하고, 선제후권은 하나만 갖는겨. 이 선제후권을 대게 라인강에 있는 저지대 라인팔라틴.에서 갖았다가, 30년 전쟁 터지면서, 이걸 고지대 라인팔라틴 비텔스바흐가 추가로 갖고가는겨. 어차피 같은 비텔스바흐지만. 그리고 짐먼가문의 라인팔츠그라프.는 선제후권을 쥐면서 저지대 팔라틴인 라인강중상류만 대표하게 돼. 

 

이게  얽혀있어서 저런거 하나 제대로 구분 설명해주는 한글이 없을텐데.

 

저 기사들의 반란에, 곧이어 농민전쟁.을 진압하는게 비텔스바흐가 1214년 부터 받은 라인팔츠그라프.야. 1356년부터 선제후권을 받은. 이땐 하이델베르크.가 코트여. 겔피 헨리 의 라인팔츠일때는 아헨.이 코트였어. 여기와 위 헷세 필립.이 저걸 진압하는데 주도를 한거야 이게.

 

당시 카를5세는 말야, 이탈리아 전쟁으로  바빠. 이 독일땅에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서 신경을 못써요. 단지 칙령으로만 막막 날려, 니덜 그러지 마라, 트리어 가지마라. 진정해라. 카를이 딱히 취할게 없어. 프랑스랑 이탈리아에서 전쟁하느라고. 이걸 헷세, 라인팔츠그라프, 작센.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전쟁을 한거야 저당시. 

 

Philip I, Landgrave of Hesse (13 November 1504 – 31 March 1567)

Louis V, Count Palatine of the Rhine (GermanLudwig V. von der Pfalz) (2 July 1478, in Heidelberg – 16 March 1544, in Heidelberg), also Louis the Pacific, was a member of the Wittelsbach dynasty was prince elector of the Palatinate. His parents were Philip, Elector Palatine, and Margaret, a daughter of Louis IX, Duke of Bavaria-Landshut

George the Bearded, Duke of Saxony (Meissen, 27 August 1471 – Dresden, 17 April 1539),

 

라인팔츠그라프 선제후.가 루트비히5세 인데. 필립은 자식중에 막내아들뻘이걸랑. 이사람 죽고, 동생에 선제후권 가고, 이다음이, 프리드리히5세 그 30년 전쟁 대표하는 칼뱅 가문 짐먼에게 가는겨 고손자 할배. 물론 같은 비텔스바흐.이고. 

 

헷세가  어린겨. 뒤에 농민전쟁때도 이 헷세의 필립.이 나서서, 토마스뮌처.를 잡는 병력이 이 필립의 병력이야. 그리고, 농민전쟁때, 작센에서 같이 진압하는 공작이, 마에센 공작 턱수염 게오르크.여. 마이센 이걸랑. 여긴 비텐가문 동생계열 알베르트.여. 공작 타이틀만 취하고 땅은 마이센 후작령이걸랑. 형쪽계열 에른스트.는 잘나가는 선제후권의 비텐베르크에 투링기아 까지 갖고 있어. 이 알베르트계열이 항상 부글부글한거야. 이름만 작센공작이지 별볼일 없걸랑. 당연히 이들은 로마카톨릭.을 쥐고, 형쪽계열 에른스트와 원수가 돼.

 

에른스트계열 알베르트계열.로 나뉜게. 저 종교전쟁 루터.때의 작센선제후 현명공 프리드리히와 동생 꾸준공 끈질공 프리드리히.에 저 동생계열 마이센 게오르크.가, 이들 아빠가 에른스트 와 알베르트.여. 비텐 작센이 나뉘어지고 나서 그 첫째 자식대 일때, 마르틴루터 가 티나오고, 기사반란에 농민전쟁이 터진거야 이게. 

 

턱수염 게오르크.가 농민전쟁을 하고, 요때 헷세의 필립 어린애를 꼬시는겨. 너 로마카톨릭 나랑 같이 열심히 하자. 

 

당시 필립이 말야, 마르틴 루터.를 만나. 이땐 쟤 머여, 늙음 냄새  나네 하민서 프로테스탄트에 관심이 없었어.

 

The first meeting of Philip of Hesse with Martin Luther took place in 1521, at the age of 17, at the Diet of Worms. There he was attracted by Luther's personality, though he had at first little interest in the religious elements of the gathering. Philip embraced Protestantism in 1524 after a personal meeting with the theologian Philipp Melanchthon.  

 

17세에 루터를 만난겨. 1521년.에. 보름스 회의에 루터가 4년전 벽보에 대한 자기변론하면서 등장할때 처음 본겨. 필립은 이때 루터가 관심이 없어. 그러다가, 3년후 루터 딱갈이 멜란히톤.을 개인적으로 보고서야 프로테스탄트가 돼. 농민전쟁은 이 직후에 터진거야. 그리고 회유를 하는겨 동생계열 마이센 작센 턱수염 할배가. 

 

마이센 턱수염 작센은 그래서 에른스트 작센  미워하고, 아들한테도 니덜 절대루다가 루터파 하지말랑께 하고, 이게 핏줄끊겨서 같은 알베르트쪽이지만, 모리스 가 마이센을 갖고 가는데, 이 모리스는 루터파여. 헌데 에른스트 작센이 싫어. 루터임에도 카를편들어서 슈말칼덴을 이기고 비텐베르크 땅을 빼앗고 선제후권도 빼앗고 에른스트는 투링기아로만 쫓겨난거걸랑 저게. 

 

기사들의 반란을 진압할 때 같이 한, 라인팔츠그라프의 루트비히 할배.가 말야. 이후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해. 로마카톨릭을 버리고. 그러면서 라인강변의 라인팔츠그라프는 프로테스탄트가 되는겨 이게. 농민전쟁후에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가 된겨 여기가. 동생이 똑같이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해서 형을 이어받은거야. 루터로. 

 

The German Peasants' WarGreat Peasants' War or Great Peasants' Revolt (GermanDeutscher Bauernkrieg) was a widespread popular revolt in some German-speaking areas in Central Europe from 1524 to 1525. It failed because of the intense opposition by the aristocracy, who slaughtered up to 100,000 of the 300,000 poorly armed peasants and farmers.[1]  

 

독일농민전쟁.이 바로 터지고, 10만에서 30만의 농민들과 자작농들을 학살했걸랑. 이건 엄청난겨. 대부분 뷰바벤 지역이야. 

 

마르틴 루터 1517년 티나오고, 기사들의 반란.에 농민전쟁 1522-25 년은 말이지, 이탈리아전쟁.이 최고조 일때야

 

Italian War of 1521–1526 War of the League of Cognac 1526–1530

 

이탈리아전쟁이, 선수가 완전히 바뀌어서, 프랑수아1세.와 카를5세.가 20대 성인이 되서 본격적으로 치르는겨. 프랑수아1세.는 이탈리아전쟁 시작 1494년에 태어난거고, 카를5세는 1500년생이야. 이전에 샤를8세가 나폴리까지 먹은걸 다뺏기고, 루이12세가 교황의 캉브해동맹으로 베네치아 몰아내자며 올커니 왔다가 이태리 북쪽 다 먹으려다 밀라노만 취하고 걍 그대로 된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는거걸랑 이게. 가장 피튀길때야 저때가. 

 

Battle of Marignano 마리냐노 전투 1515.로 프랑수아1세.가 대관하고 밀라노 근처 마리냐노.에서 스위스를 쳐부수고 쉰 후에,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걸랑. 이때는 국제전인겨, 카를5세는 나바라 로 쳐들어가고, 프랑스는 독일 저지대로 쳐들어가고, 이들이 이탈리아에서 다시 붙는겨. 

 

Battle of Pavia 파비아 전투 1525. 여기서 프랑수아1세.가 대패하고 카를5세의 포로가 돼. 프랑스 코트는 이때 오스만 술레이만을 부르는거고 이때부터. 프랑스와 교황이 다시 코냑동맹 맺고, 열받은 카를5세의 애들이 로마약탈 1527년 하는거야. 

 

종교전쟁 독일땅은 저때 터진겨. 슈바벤 리그 영주들이 용병 불러서 농민반란 진압하는거고, 이전 기사반란은 라인팔츠그라프와 헷세가 진압하는거고. 이들이 또한 농민전쟁에도 진압하는거고, 마이센 작센 도 합세를 하는거고. 

 

저때 저들이 다 참혹하게 진압이 되걸랑. 농민들도 전쟁을 해본 사람들이 아냐. 용병들을 부를뿐이야. 이게 통솔이 안되는겨. 농민들 용병 대장을 철갑손 괴츠.가 하다가 아예 포기하는거고. 걍 약탈이야 농민들이 끽해야 하는게. 그동안의 분노질 화살질을 영주들로 타겟을 잡고, 걍  죽이는겨. 괴츠가 아예 한발 물러나서 니덜 맘대로 해 나 안할래 하는거고. 나중 괴츠가 잡히고선 그거 내가 말렸는데 안듣더라, 난 반란군 괴수 아녀. 괴츠는 풀려나. 

 

안되는거야 이놈의 인민놀이라는건. 

 

농민전쟁 12개 조항.을 저기서 누가 썼을 수가 없어. 아 저거 토마스 뮌처.가 썼을거야 추정하는거고. 이 토마스 뮌처.가 취리히의 츠빙글리도 만난겨 저때. 12개 조항은 츠빙글리 쪽이 안썼으면 뮌처가 쓴겨 저건. 저기서 저들의 이념을 주도해줄 세력이 없는겨 농민전쟁의 농민쪽이. 그냥 반란에 폭동이야. 처음엔 좋지, 준비안된 영주들은 그냥 도망다닐수밖에. 카를5세는 이탈리아전쟁으로 저기에 신경을 못써. 영주들이 다시 재정비하고 진압 하는겨 저걸. 헷세 작센 라인팔츠그라프.가 합세를 하는거고. 

 

그리고 나온게 슈아이어 다이어트 1529년.이야. 여기서 프로테스탄트.가 처음 나오는겨. 저 영주들의 이름으로. 6개 듀크 그라프 프린스 들과 14개 자유도시 시장들. 우리가 프로테스탄트 입니다. 저때 등장하는말이야.

 

Mit dem seit 1529 verwendeten und ursprünglich politischen Begriff Protestanten werden im engeren Sinne die Angehörigen der christlichen Konfessionen bezeichnet, die, ausgehend von Deutschland (eigentlich vom Kurfürstentum Sachsen, ab 1517) und der Schweiz (eigentlich vom Kanton Zürich, ab 1519), vor allem in Mittel- und Nordeuropa durch die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entstanden sind und sich seitdem in verschiedene Gruppen weltweit weiterentwickelt haben.  

 

독어를 갖고오면. 프로테스탄트.란건 서기 1529년.에 등장하는 말이야. 이게 슈파이어 제국회의야. 프로테스탄트 라는게. 

 

protestor. 라틴어 프로테스토르.야. 로마 법정에서 증언하는겨. 나는 증언한다. 영주들이 자기들을 프로세스탄티쉬.

 

Jedoch bezeichnen sich die deutschen in der Tradition der Reformation stehenden Kirchen selbst als „evangelisch“ und nicht als „protestantisch“

 

지금 프로테스탄트와 에반젤리칼.이 같이 쓰이지만. 전통적으로 독일 교회진영에서는, 리포메이션 이름 붙은 칼뱅주의 개혁교회들은, 자기들을 프로테스탄티쉬.라고 하지, 에반겔리쉬.라고 하지 않는다. 

 

왜겠어? 에반젤리칼.은 마르틴 루터.가 퍼뜨린 말이걸랑 ㅋㅋㅋ. 자기들은 마르틴 루터와 상관없는겨. 프로테스탄트일 뿐이야.

 

저기서, 6개 영주진영들이 에반젤리칼.이야. 이들은 마르틴 루터파야. 14개 지역은 말야. 여긴 프로테스탄트 일 뿐이야. 

 

저걸, 지금말로 강하게 반대 하다 라는게 프로테스트.지만, 자기들이 진찌 증인 이란거야. 지저스의 뜻과 행동을 진짜로 증인하는건 자기들이란겨 저건. 그리고, 이 아우성은, 로마카톨릭은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가 아니란거야. 로마 카톨릭은 부정부패의 상징이고, 쟤들은 이미 썩고 썩은 애들이고, 쟤들이 지저스를 증언할 자격 조차 없는겨. 이들 입장은.

 

저게 6개 작위령과 14개 슈바벤 지역 라인강 다뉴브강 상류 지역의 자유도시들이 말야, 기사들의 반란과 농민전쟁으로 황폐화된 상태에서 나온거야. 저들이 승자 진영이지만, 14개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된 농민전쟁 땅빠닥이야. 민심은 다 돌아섰어. 시장과 위원회 지도부가 이겼다고 해서 자기들이 멀 어쩔수가 없는 지경인겨. 저기 슈바벤 땅들은 시장과 위원회가 만들어 가는 각각의 땅이야 그게. 농민전쟁 초기 협상하는게 그런 모습이걸랑. 저긴 지금 시대의 완벽한 민주적 정부체제야 영주들의 정치체제가. 

 

저 20개 들이 모였지만 6개와 14개가 저게 서로 입장이 다른겨. 한편은 이겼어. 나머니 14개 한편은 폐허가 된 지역들의 지도부야. 저들이, 카를 5세를 상대로, 프로테스탄트 인정해줘! 하는겨. 웃긴겨 저게. 이긴쪽의 여섯 영주들이 오히려 프로테스탄트라고 자처를 하는겨. 

 

마르틴 루터.는 농민전쟁의 농민들을 사탄들로 규정했어. 농민전쟁 진압되고는 자기가 그리 사탄들아 죽어라 해서 진압되었다며 역시 나 마르틴 루터  예언자 비슷?  해댄거걸랑  저거. 저건 또라이야 또라이.

 

농민전쟁 12개 조항은 정확히 로마카톨릭.을 그냥 엎어버리는 말이야. 로마카톨릭의 체제를 부정하는겨 12개 조항은. 헌데 그런 농민들을 6개 영주들도 마르틴루터파 지만, 앞장서서 진압을 한거야. 이 감정선이 애매한겨 이게. 착잡한거야 이긴 쪽도. 폐허간 된 진영의 반농민 지도부 들도. 

 

저 슈아이어 1529 회의라는게 진짜 요상한거야 저건. 프로테스탄트 가 처음 정치적 종교적으로 등장하는 저때가 말이지.

 

대부분은 말야. 하르츠산맥 부근과 넘어의 영주들이야. 6개 영주들은. 헷세 빼고. 여긴 슈바벤 농민전쟁과 그리 상관이 없는겨. 입장이 달라 이게. 대부분 부글부글은 14개 도시의 지도부들이야. 이겼다지만,  착잡한 상태야 이게. 

 

저들이 찾아간 안식처 피난처가 말야. 

 

취리히여 취리히. 기사들의 반란 후텐.도 취리히로 도피해서 죽은겨.

 

With his death, knighthood as a significant force in Germany died too. Hutten only outlived Sickingen by a few months, first meeting the reformer Huldrych Zwingli in Zürich, before dying alone of syphilis in a Swiss monastery.[8]

 

지킹엔.은 전장에서 죽고, 후텐.은 취리히로 가서리 츠빙글리를 만나기도 했어. 스위스 수도원 가서 죽었어. 후텐은 훌륭한 인문학자야 이사람은. 이 후텐.도 역사에 이름 약하게 남아잇지만, 위대한 인간이야 기사들의 반란.의 후텐.은. 이들이 루터따위보다 천만배 나아. 

 

농민전쟁도, 저기서 사상을 담을 지도부가 없어. 누가 저걸 대신 해줄까? 저것도 취리히의 츠빙글리네가 해주는겨. 농민전쟁의 도피처들은 여기 취리히 인거야. 토마스 뮌처도 여기 왔다 간거고. 저 14개 도시들의 중심은 말야. 취리히고 츠빙글리야. 여긴 루터와 상관이 없어. 루터는  저짝 하르츠산맥 넘어있는 애야. 영주의 보호하에 있는 놈이고. 쟤와 슈바벤 농민들과 뭔 컨택이 있을수가 있겄어. 여긴 달라. 여긴 진짜 프로테스탄트야. 루터는 에반젤리칼 이야. 프로테스탄트와 에반젤리칼.은 이게 전혀 다른거야 이게. 

 

슈바벤의 프로테스탄트를 품은건, 취리히고 츠빙글리야. 

 

Zürich ministry begins (1519–1521) 

 

츠빙글리가 1519년 부터 자기의 설교를 시작해. 1484년 생이야. 

 

Zwingli was ordained in Constance, the seat of the local diocese, and he celebrated his first Mass in his hometown, Wildhaus, on 29 September 1506. As a young priest he had studied little theology, but this was not considered unusual at the time. His first ecclesiastical post was the pastorate of the town of Glarus, where he stayed for ten years.  

 

츠빙글리.가 1506년. 22세에 바젤대학에서 마스터 학위를 받고. 이전 비엔나 대학도 거치고. 이때 서임을 받아서 사제가 되서 첫 미사를 하는겨. 콘스탄츠.는 호수 수욱 들어가있는 땅 도시고. 그리고 글라루스 로 가서 10년을 머물러. 글라루스.가 아이트게놋센샤프트의 셋,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오른쪽 이걸랑. 1506-16. 10년을 머문겨. 저때가 역시나 이탈리아 전쟁이고, 스위스는 용병으로 저기 내려가 참전하는거고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 스위스 하이랜더 용병이 프랑스에 대패했걸랑. 츠빙글리가 저기 10년 있으면서 왜 우리가 용병으로 처먹고 사는거냐며 정치적으로 들어가는겨. 

 

츠빙글리는 반 프랑스, 반 용병.이야. 글라루스에 친프랑스가 득세하고 마리냐노 이후에. 슈비츠.로 옮기고, 바젤에 가서 에라스무스.도 만나고. 저 10여년 동안에 정치적 고민과, 더하여 그리스어 히브리어 의 리터러쳐를 다 보고 인문학이 깊게 스미고. 이때 먼가 자기생각을 갖게 된거야. 그리고 취리히.에서 정치적 의견이 같은 츠빙글리.를 자기들 사제로 불러 앉힌거야. 이게 서기 1518년 이여. 츠빙글리는 루터와 전혀 상관이 없어. 

 

그리고 설교를 하는겨 자기만의 설교를. 성경 그대로 읽기. 아무런 주석 달지 않고. 이때 취리히에 전염병이 돌아. 다들 비워 마을을. 츠빙글리는 혼자 남아 사역을 해. 자기도 병에 걸려서 곧 죽어. 시를 남겨.

 

Thy purpose fulfil:
nothing can be too severe for me.
I am thy vessel,
for you to make whole or break to pieces.
Since, if you take hence
my spirit from this earth,
you do it so that it will not grow evil,
and will not mar
the pious lives of others.

 

그대의 목적은 이루어지다:

아무것도 더 가옥할 수는 없다 나에겐.

나는 그대의 그릇이다

당신이 온전하게 만들수도 또는 산산조각 낼수도 있는.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가져간다면

나의 영혼을 이 땅에서,

당신이 그리 한다고 악이 기승을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해하지도 않을것이다

다른 이들의 경건한 삶들을. 

 

 

First rifts (1522–1524) 

 

저때 살아남고, 렌트. 사순절날 금식기간에 쏘세지를 나눠먹는겨. 여러분, 그딴 금기 성경에 없쓰요. 먹으이소.

 

Reformation progresses in Zürich (1524–1525)

Conflict with the Anabaptists (1525–1527)  

 

그러면서 취리히에서 논쟁이 생기고, 츠빙글리.가 취리히의 중심이 되는겨 프로테스탄트의. 이사람은 정치적 힘도 잇는 사람이야. 아나뱁티스트는 아직 빨라 그런건.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다시 캐터키즘 만들고 성경 만들고 예배를 다시 세팅하는 처지야. 아나뱁티스트들보고 그런거 하지마라 다시는. 그래도 해. 사형시켜. 

 

그리고 마르부르크.가서 루터 만나고, 말 안통해서 울고, 1531년 카펠 전투로 죽는건데. 십년 십이년 아주 짧고 굵게 살아.

 

츠빙글리의 저 시절. 1519-1531, 나이 35세-47세. 이 말이지. 이전에 글라우스에서 이십대를 다 보내면서 스위스의 문제를 느끼고, 인문학자가 저때 된거야 그리스 히브리어 보면서. 비엔나 바젤 대학 정통을 다 배운 소양으로. 그리고나서 자기 이야기 할때, 기사들의 반란, 농민전쟁 이 터진겨. 완전히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자리 잡는 순간에 터진겨. 

 

츠빙글리가 사순절때 먹는 짓하는 때부터 기사들의 반란에, 농민전쟁때 프로테스탄트가 직접 들어온거야. 농민전쟁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해 저게. 취리히가 슈바벤의 분위기 중심이 되었던거야 여기가. 후텐도 여기와서 죽어. 토마스뮌처도 마침 저때 취리히에 온거야 아마도. 아주 동시에 일어난거야.

 

마르틴 루터.는 저 짝 하르츠산맥의 작센 선제후 보호하에 있는거고. 얜  저짝 하늘 위에 있는겨 루터님은.

 

츠빙글리가 아래에서 취리히에서 저들 프로테스탄트들 중심이 된겨 이건. 

 

14개 자유도시들이 프로테스탄트 라는건. 정확하게 저 취리히이고 츠빙글리야 이건. 헌데 이들은 너무 자잘하고 너무 약해. 농민전쟁으로 이미 다들 폐허가 된 상태야. 

 

다음 또 카톨릭이 쳐들어와 재정비해서. 

 

취리히가 츠빙글리가 혼자 막는거야 저걸. 누가 도와줄 수 가 없는겨. 저 지역은 세력이 안돼 이게. 저 무게를 떠 안고 카펠전투에서 카톨릭 의 캔톤들 아이트게놋센샤프트 세 캔톤에 걍 죽은겨.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이 1555년 이야. 이건 마이센 작센의 모리스.가 슈말칼덴 2차.로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면서 만들어 준거야. 

 

저때는 칼뱅이 제네바에 다시 초빙되어서 자리 다 잡고 있을때고 아래에선. 

 

츠빙글리가 죽고서 아래지역은 중심이 사라진체 산산이 흩어진겨 이게. 츠빙글리의 정신이 말과 글로 전해질 뿐인거고. 

 

이게 말이지, 걍 그대로 장 칼뱅에게 간거야. 칼뱅이란 이름으로. 

 

칼뱅은 츠빙글리를 기본적으로 다 갖고간겨. 성인놀이 하지 맙시다. 이미지 놀이 하지 맙시다. 음악놀이 자제합시다. 성경에 있는 말씀만 주목합시다. 제대로 된 에반젤리칼 도 이 츠빙글리여. 에반젤리칼의 정통은 츠빙글리야. 교회에서 사제가 할 일은, 성경만 그대로 소리내서 읽는겨. 먼 가타 부타 먼 설명을 해대고 자빠진거냐며. 

 

우리네 교회에선 한글 성경 읽는것도 의미가 없는거지만.

 

칼뱅은 츠빙글리에 자기 살만 덧붙인겨 저게. 물론 다음 세대라서. 덧대면서 할 말은 더 많걸랑. 그래도 그 중심은 츠빙글리야. 이들은 전혀 루터와 달라. 프로테스탄트야. 루터가 퍼뜨린 에반젤리칼 이란 말 조차 쓰고싶지 않다며.

 

이들에겐 말야, 츠빙글리를 이은 칼뱅은, 이 칼뱅은 츠빙글리를 빼놓고는 절대 말할 수 없어. 칼뱅을 데려오고 키운건 제네바고 이 제네바는 츠빙글리에서 온 이들이야. 츠빙글리는 기사들의 반란, 농민전쟁 에서 의 사람들이 낳은 인간이야. 칼뱅은 츠빙글리가 12년간 만든 터전에서 열매만 취한겨 얜. 이야기가 츠빙글리를 이을 수 밖에 없어. 츠빙글리와 별개일수도 없고. 츠빙글리를 벗어날 수가 없어. 그 현장의 사람들 속에서 자란 인간들이 데려 온 칼뱅일 뿐이야. 그 사유의 터에서 자기 이야기를 녹음기로 대신 틀어줄 뿐이고. 

 

루터가 싫을 수 밖에 없어. 자기들을 진압한건 루터여. 프로테스탄트는 독일농민전쟁 을 떠나선 말할 수 없어. 프로테스탄트는 라인강 중상류와 슈바벤 이야. 루터 말고. 이들은 독일농민전쟁 속의 사람이야. 교리가 머던간에. 자기들 진압한건  루터를 보호하는 영주들 이었고. 슈말칼덴 전쟁이란것도 루터믿는 놈이 교황의 황제편들고 다음엔 제대로 루터편들고 했다만. 저게 머여. 루터 나 영주들이나 카톨릭이나 저건 한통속인겨 저게. 그리고 그야말로 어 정말 루터 가 자기 교회 만들고 교황 하려는거냐 저거 해대는거고. 

 

루터는 저게 밖에서 보면, 로마 카톨릭이랑  다를게 없는겨 저들 아래 슈바벤 과 스위스 알자스 라인강상류에서 보기엔. 이쪽은 다들 츠빙글리를 이은 칼뱅이 되는겨. 라인팔츠그라프도. 헷세의 캇셀도. 더하여, 저짝 폴란드 얀 자모이스키.도. 폴란드 헝가리 트랜실베니아 걍 모두 칼뱅이여 저게. 

 

저건, 기사들의 반란과 농민전쟁 이란 정치적 사건이 바닥에 깔려있는거야. 여기에 동시에 출현한게 피난처가 되어준 취리히의 츠빙글리이고. 츠빙글리와 취리히.는 자기들의 역사를, 칼뱅과 제네바.로 그냥  순순히 준거야 저게. 

 

저건  부당한거야. 취리히 애들이, 걍  멍청한거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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