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때, 프로테스탄트 루터 1517 대자보 이후 의 중심축이 작센과 헷세였걸랑. 이들 중심으로 슈말칼덴 전쟁을 하고, 1차 때 작센의 동생 쪽 알베르트의 모리스.가 카를5세와 연합해서 작센 선제후와 헷세가 전쟁에 지고 포로가 되고, 모리스가 저 둘을 그래도 보살피겠다고 약속하고, 그래도 카를5세가 죽이려는걸 모리스가 반기를 들고 다시 프로테스탄트와 손잡고 카를5세에 맞서는게 2차 슈말칼덴 전쟁이야. 이걸 모리스가 이겨. 그리고 나오는게 아우크스 부르크 1555년 조약이야. 여기서 중심인물은 작센 동생계열 알베르트 계열인 모리스 걸랑. 이 모리스.의 알베르트 계열이 이때부터 작센 선제후권을 갖는겨.
저이후로 60년이 흐른거야. 그리고 터진게 30년 전쟁인데, 이때 프로테스탄트의 중심이 없는겨 이게. 끽해야 라인팔츠그라프 의 저 흩어진 도시들의 선제후인 짐먼가문의 프리드리히5세 갓 22세 된 젊은 애걸랑. 장인 잉글랜드 제임스 후광의.
작센과 헷세.가 저 기간동안 자잘하게 분열이 된 상태에서 30년 전쟁이 벌어진거야. 여기서 작센의 핵심은 모리스 를 이은 알베르트계열의 선제후걸랑. 이사람이 중심을 못잡아. 프로테스탄트 를 주도하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제진영에 적극적으로 맞서는것도 아니고, 좋게는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고 하지만, 이사람은 한게 없는겨 이게.
선제후권 뺏긴 형쪽 계열 에른스트 작센들이 그나마 프로테스탄트쪽에 힘을 실어. 에른스트계열이 비텐베르크 땅을 모리스에 뺏기고 선제후 뺏기고 투링기아 산 골짜기로 쫓겨난거걸랑. 저긴 사방이 산줄기여 투링기아 란 곳은. 헌데 얘들이 이후 더 자잘자잘 쪼개진겨. 딱히 인물이 없어. 그중에 한명이 또한 걍 용병대장을 하면서 자기들이 뺏긴 땅 되찾아오려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할 정도야.
헷세.는 역시나, 슈말칼덴 때 유일하게 필리프 부터여. 작센은 요한 프리드리히 공작이. 큰삼촌과 아빠를 이은 루터파걸랑. 헷세의 필리프.는 아빠가 일찍죽고 얘부터 루터를 한거야. 요한 프리드리히.와 함께 패하고 포로되고 모리스 덕에 풀려나온거걸랑. 그리고 이 자식때부터 헷세가 쪼개진겨. 여긴 30년 전쟁때 큰놈쪽은 프로테스탄트에, 작은놈쪽은 황제 카톨릭쪽에 붙어.
저 작센과 헷세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귀족들도, 자기들이 병력을 만들어서 전쟁하는게 아냐. 걍 용병대장 역할이야. 이들은 덴마크 스위든 프랑스 애들 밑에서 사령관들 하면서 싸우는겨. 그만큼 돈도 없는겨 이게.
유럽전쟁은 저때까지, 중세천년에서 30년 전쟁 때도, 용병이여 용병. 스위든 만 유일한 징병제여. 모두들 돈을 펀딩해서 용병을 사서 전쟁을 하는거야. 가장 중요한게 용병대장 이야 그래서 또한. 저것도 생각하면 참 싕기한 건데, 즉 돈으로 모인 용병을 용병대장이 어떻게 지휘하느냐야. 이 리더쉽이 보통이 아니어야 해. 자기가 꾸린 군대가 아녀 저게. 생판 처음 만나는 용병애들을 지휘하는겨 또한 월급받고. 유럽애들의 저런 전쟁모습이 천년 이상이었던거야 이게. 이게 동양빠닥과 아주 전혀 다른거야.
우리가 중국사 볼때 수십만이니 수만이니 병력 동원하는게, 그게 거짓말이 아녀. 진짜여 그게. 백만대군은 과장인거고. 그건 약탈을 전제로 하는 전쟁들인겨 이 극동빠닥 전쟁이. 유럽은 이걸 이민족들 쳐들어올때 처음 겪는겨. 이민족들이 수십만이 자기들 땅 찾아 정착하러 오는거걸랑. 그리고 칭기스칸의 자식들의 그런 전쟁을 처음 겪는거고, 얘들은 끽해야 수천이야. 만 단위 넘으면 대전이야 그건. 수백명 수천명 용병 데리고 전쟁하는겨. 그러다 갑자기 스텝애들이 수십만을 델꼬 쳐들어오는거에 기겁을 하는겨. 이게 또한 오스만이야. 자기들 식민지 점령한 민들을 앞세우는겨. 인해전술은 오직 아시아 땅에서만 나오는 병법이여 이건.
작센 과 헷세. 가 자기들이 펀딩해서 용병 모아 직접 사령관 할 그럴 힘도 없는겨 60년이 지나서는. 남들 용병대장 하면서 공이 커서 뺏긴 땅 찾을텨, 이 신세로 전락을 한거야 작센과 헷세가. 특히나 작센. 헷세야 머 이게 애초부터 별거 없었으니까. 작센이 참 비참해진건데.
작센이란건, 바바리아 와 달라. 바바리아는 독일의 시작이야. 게르만 루이.가 꼬마때 받은 첫 타이틀이 바바리아 킹.이고 이후 게르만 킹들은 카롤린지언 끊길때까지 공식 타이틀이 바바리아 킹.이야.
작센은 게르만 루이 차남 영거 루이.가 작센의 킹.이었을 뿐이야. 아빠때 여긴 작센족 오토 조.의 시작 공작.이 먼저 등장해. 여긴 메로빈지언때는 독립적인 듀크. 부락 추장이었어.
Hadugato or Hathagat was an early Saxon leader, considered a founding father of Saxony by the tenth century. In 531, he led the Saxons to victory over the Thuringians at the battle of Burgscheidungen, "a legendary victory, and one so great that [Hadugato] appeared to [later] Saxons as an epiphany of divinity itself."[1] The Chronica ducum de Brunswick records that in the Duchy of Brunswick in the sixteenth century a memorial week was still observed following Michaelmas (September 29) to celebrate the Saxon victory over the Thuringians.[2]
클로비스1세.의 프랑크 이후에, 독일땅에 작센이 등장하는게, 하두가토. 9세기 책에 둑스.로 나오는겨. 작센 부락 추장인겨. 당시 투링기안과 프랑크의 뚜더릭 Theuderic I 의 전쟁 중에, 하두가토.가 브리튼 에서 엘베강 하류에 도착하고 투링기안을 물리치는겨. Burgsheidungen 부르크샤이둥엔 전투. 뚜더릭.이 투링기안을 이겨주면 니덜 작센들 정착해서 살아라 하는거걸랑. 여긴 지금 투링기아 동북이고, 하두가토 가 엘베강 따라 그 지류 잘레Saale 강 따라 저기산맥 넘어서 이긴겨.
뚜더릭1세.가 클로비스1세의 배스타드인 아들이야. 클로비스1세의 네아들.이라고 하는데 얜 따로 언급을 해. 배스타드라서. 메스 Metz 쪽 킹이야.
저때 등장하는 하두가토 의 작센이 서기 531년 인데. 결국 올드스템에서 투링기안 이 사라지걸랑. 투링기안이 프랑크에 하미지 하고, 작센이 여길 먹은겨. 투링기아는 영거스템에서 땅 이름만 남고 투링기안.은 사라져.
작센은 저 이후 둑스 의 땅이지만 프랑크의 더치가 아냐. 프랑크와 느슨한 연합체일 뿐이고.
Chlothar II (or Chlotar, Clothar, Clotaire, Chlotochar, or Hlothar; 584 – 18 October 629), called the Great or the Young, was king of Neustria and king of the Franks, and the son of Chilperic I and his third wife, Fredegund.
클로비스1세의 증손자. 콜타르2세 와 작센이 전쟁해서 작센이 패해. 그러면서도 작센은 안들어가다가 샤를마뉴때에나 들어가는건데. 그러면서, 게르만루이 때 처음 카롤린지언.이 하사한 듀크 가 등장하는거야. 이건 843년 베르됭 조약.직후로 보면 돼. 바바리아 는 오토 1세의 아빠가 게르만 킹 에 오르고서야 듀크가 처음 등장하는거고.
작센은 531년 등장할때 독립국이고, 바바리안 올드스템은 렉스 Rex 렉스 라는 킹 으로 메로빈지언에 하미지를 하다가 백년지나 독립하다가 샤를마뉴때 다시 잡혀 들어간거고. 그러면서 바바리아 킹.이 게르만의 킹 상징이 되고.
작센 하두가토.가 531년 이란 말이야. 이사람이 브리튼 에서 왔다고 기록이 된거야.
브리튼에 있던 로마군단이 대륙으로 떠나. 서로마가 난리가 났어. 곧 망해. 잉글랜드에서 벙 찐거야.
The end of Roman rule in Britain was the transition from Roman Britain to post-Roman Britain. Roman rule ended in different parts of Britain at different times, and under different circumstances.
In 383, the usurper Magnus Maximus withdrew troops from northern and western Britain, probably leaving local warlords in charge. Around 410, the Romano-British expelled the magistrates of the usurper Constantine III, ostensibly in response to his failures to use the Roman garrison he had stripped from Britain to protect the island
브리튼.의 로마.가 서기 388년에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황제 선언하고 대륙으로 가. 얜 테오도시우스 에게 패해서 죽어. 다음 콘스탄틴3세.가 또 대륙으로 가. 얜 테오도시우스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 때 갔다가 죽어. 브리튼에 얘들 잔여 병력이 있걸랑. 브리튼 사람들이 서기 410년 즈음에 다 쫓아낸거야. 이민족 들어오는걸 못 막아.
브리튼이 완전히 무주공산이 된겨 이게. 남아있는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은 아무것도 없는겨. 황제놀이하러 간 애들이 탈탈탈탈 털어갔겠지. 여길 스콧 조상 픽트족에. 바다 건너 온갖 게르만들이 이리로 오는겨.
작센 도 서기 410년 즈음에 오기 시작한걸로 보는거야. 저게 7왕국 체제의 시작이야.
헌데 하두가토 를 따라나선 작센들이 브리튼에서 오히려 엘베강으로 들어온거야. 백여년 지난겨 저건. 뚜데릭1세가 미리 연락을 해서 브리튼의 작센애들에게 니덜 저기 먹으면 가져라 했던가, 아니면 브리튼에 가보니 다른 작센에 데인에 고쓰에 게르만들이 다 점령해서 다시 들어왔는지는 알길이 없는거고.
서기 531년 하두가토.로 프랑크 시대에 시작한 작센.이 샤를마뉴때 프랑크로 들어오고. 게르만루이 때 첫 프랑크 공작.이 되는겨. 이 공작이 서기 843년 즈음 오토 조.의 시작이고, 서기 962년.에 오토 대제.의 뿌리야. 바바리아 의 첫 공작.을 하사한 사람도 오토 대제의 아빠 새잡이 하인리히.이고.
서기 천년 경의 작센 공작령.이 오른쪽은 엘베강 중하류 이고 덴마크 모가지 까지고. 왼쪽 경계는 라인강 하류야. 남쪽 경계는 브로켄 산.으로 보면 되고. 그 위 하양은 프리지안의 프리지아.이고. 왼쪽은 로타링기아.이고, 작센의 아래는 프랑코니안들의 프랑코니아야. 슈바벤이 왼쪽 아래 하양. 오른쪽은 바바리안의 바바리아고. 제네바 호수 지역 빗금은 아를킹덤으로 보면 되고, 아래 누렁은 이탈리아 킹덤이고.
804–1296
저 작센공국.을 서기 804년 부터 1296 으로 보는데. 804년 이란건. 843년 첫 공작 시작인 리우돌프 Liudolf 의 조상을 저때부터 봐. 샤를마뉴가 통일하고 부터 정도 추정하는겨.
저게 바바리아 공작 겔피 존심 하인리히.에게 가고 이걸 콘라트3세 게르만 킹이 이기고 아스카니아 가문의 곰 알베르트.에게 주고, 다시 호헨슈타우펜1세.가 겔피에 돌려줬다가 다시 뺏아 주걸랑. 곰 알베르트때 저걸 받다가 증손자 대에서 라우엔부르크.와 비텐베르크.로 나뉘고.요게 1296년 이야. 비텐베르크.가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황제일때 Wettin 베틴 가문에게 가는겨.
작센 땅안에 올덴부르크 공작령이 이전에 생기고. 브레멘 주교령 뮌스터 주교령 도 따로 생기면서 땅들이 나눠지고.
지도에 강이름을 내가 졸 친절하게 썼는데, 베저 강 Weser 하류에 브레멘.이 있어 이 바로 왼쪽에 올덴부르크.가 있고
Ems 엠스강.이 하류에서 지금 네덜란드와 독일을 나누는겨. 네덜란드 동쪽 끝 그로닝엔 Groningen 주.여 이 엠스강 왼쪽이. 엠스강 상류.가 토이토부르크 숲.이야. 여기에 독일 상징 헤르만 동상이 있는거고
토이토부르크 숲 지역이 북라인 베스트팔렌 주. 동쪽 끝에 있어. 여기가 동쪽 니더작센 주.와의 경계고. 아래가 헷센 주.와 경계야. 이 오른쪽으로 베저강이 흐르는거고. 이 숲 왼쪽아래 끝에서 Ems 엠스강이 발원해서 왼쪽으로 가서 네덜란드 그로닝엔을 왼쪽경계로 두고 빠져나가.
헷세.가 베저강 상류 니더작센과 경계이고, 헷세주 오른쪽에서 두 강이 흘러서 베저강 상류로 만나는거야.
헷세.는 북라인 베스트팔렌.과 로타르 Rothaar 산맥으로 경계지만 여기도 사방이 산이야. 자잘한 높이들의. 가운데아래에 타우누스 산맥이 있는거고. 투링기아 가 또한 사방이 산인 고원지대이고, 이 오른쪽에 Saale 잘레 강이, 아래 고지대 프랑코니아에서 발원해서 쭉 올라가서 엘베강에 만나는겨. 이 잘레 강이 엘베와 만나는 오른쪽 엘베강에 비텐베르크. 루터 도시가 있어. 여기가 선제후권있는 작센 비텐베르크.야. 이건 작센안할트 주.야. 이 주가 손가락 삐쭉 걸친겨.
작센안할트 남부에서 아스카니아 가문.과 이 바로 옆에 베틴 가문이 있는겨 조상들이. 베틴가문이 잘레강 타고 내려가서 오른쪽 비텐베르크 를 받은겨. 가까와.
베틴 가문이, 보헤미아와 접하는 독일땅 드레스덴 지역을 마크.로 먼저 받은거야. 투링기아 지역도 베틴이었고 여기에 비텐베르크 를 받은겨. 그러면서 곰 알베르트는 라우엔부르크 만 받고 짜진거야. 나중에 비텐베르크 를 달라고 징징대지만 못받아. 그래도 브란덴부르크.가 새로 있어 얘들은. 물론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만.
작센이 초기 엘베 중류에 저지대중심에서 비텐베르크까지 온거고. 투링기안의 투링기아를 다 먹은겨. 베틴가문이 엘베 상류까지 먹고 투링기아도 작센의 베틴가문이 먹고. 비텐베르크 를 지기스문트에 받고 이 부근의 중원을 다 차지한거야.
베틴이 비텐베르크.를 받고 선제후권을 이걸로 받고 여기가 작센의 중심이 돼. 이게 형 에른스트 동생 알베르트 로 나뉘어. 동생쪽이 마이센(드레스덴)을 갖고 형쪽 에른스트가 비텐베르크 중심의 작센과 투링기아 땅을 쥐는겨. 그러다 비텐베르크.를 알베르트쪽에 뺏기고 선제후권도 뺏기고 투링기아 지역만 에른스트 계열이 갖고가.
- Saxe-Weimar
- Saxe-Eisenach
- Saxe-Coburg
- Saxe-Gotha
- Saxe-Altenburg
에른스트 계열은 투링기아 지역에서 자잘자잘 쪼개져. 크게는 저리 다섯개인데, 동시대에 열개 정도 저쪽 공작이 있을 때도 있어 걍 저 산으로 고립된 곳에서 자잘자잘 마을별로 작센 공작들인겨 저게. 바이마르 아이제나흐 코부르크 고타 알텐부르크. 여기서 나중 빅토리아 퀸.에 장가가는 윈저가문의 시작이 여기 작센에서 나오는거고.
비텐베르크 작센에 마이센 후작 쥔 알베르트 계열도, 동시대 너댓개로 갈라지는겨 17세기 지나면서.
- Saxony
- Saxe-Weimar-Eisenach
- Saxe-Coburg (ruler became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1826)
- Saxe-Gotha (partitioned 1826)
- Saxe-Hildburghausen (ruler became Duke of Saxe-Altenburg, 1826)
나중에 나폴레옹이 300여개 지역들을 39개로 나눌때. 저놈의 작센은 작센 킹덤.하나에 나머지 네개.로 나누는거야. 저 네개가 모두 투링기아땅 에른스트 계열의 작센들이야. 차암 벨류없는 작센이 된건데.
작센 킹덤 조차, 베틴 가문 초기의 마이센 후작령 만 남은 작센이여 저게.
마이센 후작령이 15세기에 수도를 마이센에서 근처 드레스덴.으로 옮기면서 지금 드레스덴.이 된거고.
- Electorate of Hesse (also known as Hesse-Kassel)
- Grand Duchy of Hesse (also known as Hesse-Darmstadt)
- Hesse-Homburg (inherited by the grand-duke of Hesse-Darmstadt, 1866) (joined by treaty in 1820)
헷세. 란 곳도. 나폴레옹 때 세 지역으로 나누는거야. 형쪽 북쪽 캇셀.의 선제후권 헷세. 동생쪽 아래 다름슈타트.의 덧치. 그리고 홈부르크 헷세. 여기는 라인강 왼쪽 떨어진 헷세고.
작센이 다섯개 헷세가 세개 로 정리된것도 자잘자잘 쪼개진걸 그나마 저리 묶은겨.
이 독일이란 나라가, 프랑스 1789년 후 갓 총잡은 시민군한테 질 수 밖에 없는거고, 나폴레옹한테 먹힐 수 밖에 없는겨 이게. 이건 30년 전쟁 이후부터 주욱 이런겨 이놈의 신성로마제국이란게.
전쟁만 하면 필패야 필패. 브리튼의 시대 일 수 밖에 없는거야. 브리튼은 아주 걍 지독한 내전속에서 30년 전쟁 후반기에 그나마 수백년간의 내전을 마무리를 하면서 하나로 합쳐진겨 저 브리튼이. 그리고 조지 몽크. 브리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야. 찰스2세.를 다시 옹립하는게 이 조지 몽크여. 영국은 이 조지 몽크.와 찰스2세.가 만든겨 이게.
영국사의 용서 관대 함은, 이건 상상을 초월해. 저 리더 애들의. 극똥 빠닥의 중국과 조선 에서는 그야말로 상상을 못하는 수준의 용서와 관대 야. 이 조선은 여전히 지금도 복수 복수 오직 복수. 숙청의 역사. 유치 한 벌레들의 땅이 이놈의 조선반도야. 조선 오백년 이후의 이 조선들의 역사는 세상사에서 너무나 너무나 부끄럽고 쪽팔리고 창피한 역사야 이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저딴 것들이 이 땅에선 정의 와 민주 의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는겨 ㅋㅋㅋ. 이 영국사는 나중에 다시 정리해보겠지만 말야, 아 음청나 쟤들 저 용서 화해. 이건 서유럽 들의 공통이야. 조선같으면 구족을 멸하고 찢어죽이고 모든 가문은 노예 노비가 되는데 말이야.
John George I (German: Johann Georg I.) (5 March 1585 – 8 October 1656) was Elector of Saxony from 1611 to 1656.
저때 작센의 선제후.가 요한 게오르크1세.여. 마이센 후작을 겸하니까 여기가 Erzgebirge 에르츠 게비르거. 보헤미아와 이 원석 산맥과 맞닿은게 작센 드레스덴 마이센의 선제후 땅이걸랑. 황제입장에선 얘가 자기편이 되어야 해. 헌데 작센은 루터의 시작이었던 곳이야. 루터들이야. 이걸 외교로 푸는겨. 너 보헤미아 진압하면 경계 루사티아랑 수디티즈 넘어 실레시아 땅 주마.
At the beginning of his reign, however, the new elector took up a somewhat detached position. His personal allegiance to Lutheranism was sound, but he liked neither the growing strength of Brandenburg nor the increasing prestige of the Palatinate; the adherence of the other branches of the Saxon ruling house to Protestantism seemed to him to suggest that the head of the Electorate of Saxony should throw his weight into the other scale, and he was prepared to favour the advances of the Habsburgs and the Roman Catholic party.[1]
이사람은 루터지만, 정치적으로 위 브란덴부르크.가 커지는것도 싫고, 저 왼쪽의 라인팔라틴. 이게 어퍼 팔라틴.이라는 마인강 상류도 따로 있걸랑. 자기들 에른스트 계열 작센의 바로 아래여 어퍼팔라틴은. 여기가 커지는것도 싫어. 그래서 오히려 합스부르크.에 카톨릭을 편들어
Carrying out his share of the bargain by occupying Silesia and Lusatia, where he displayed much clemency, the Saxon elector had thus some part in driving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of the Rhine, from Bohemia and in crushing Protestantism in that country, the crown of which he himself had previously refused.[1]
합스부르크.도 이걸 알아. 실레시아 와 루사티아 를 주겠다. 여기에 혹해. 보헤미아에서 동시에 킹으로 오퍼를 넣은게 또한 여기 작센 선제후야. 이건 할 수가 없는겨. 저 보헤미안의 훗사이트.란건 이건 루터도 칼뱅도 아니야. 전혀 다른 색깔이야 과격해. 그래서 독일땅 프로테스탄트 유니온.도 보헤미안을 가입을 안시켜 자기들과는 다르다고. 저걸 어떻게 받니. 보헤미안이 자기들 킹 하라고 세력이 갈려서 프리드리히5세, 작센 선제후, 트랜실베니아의 베뜰렌. 막 여기저기 사발통문을 보내는겨. 이 서신들을 또 오스트리아에서 중간에서 인터셉트해서 그대로 알려. 당연히 서로들 기분나빠하고.
Gradually, however, he was made uneasy by the obvious trend of the imperial policy towards the annihilation of Protestantism, and by a dread lest the ecclesiastical lands should be taken from him; and the issue of the edict of restitution in March 1629 put the capstone to his fears. Still, although clamouring vainly for the exemption of the electorate from the area covered by the edict, John George took no decisive measures to break his alliance with the emperor. He did, indeed, in February 1631 call a meeting of Protestant princes at Leipzig, but in spite of the appeals of the preacher Matthias Hoe von Hohenegg (1580–1645) he contented himself with a formal protest.[1]
Meanwhile, Gustavus Adolphus had landed in Germany, aiming to relieve Magdeburg. Gustavus attempted to conclude an alliance with John George to allow him to cross the Elbe at Wittenberg, but John George remained hesitant to join the Protestant cause and the discussions went nowhere. Hoping that an alliance would be concluded eventually, Gustavus avoided any military action.[1]
이사람은 걍 방관자로 있던겨 저 시국에서. 이것 자체가 합스부르크애들에겐 큰 힘이 된거고. 작센 선제후는 거의 합스부르크 편을 든거야 이건. 1631년에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모임에서 당신이 왜 이걸 소집하고 프로테스탄트 행세하는가? 아녀 나 프로테스탄트야. 스위든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작센 선제후와 연합하려해. 이거도 주저주저 하는겨. 황제 진영에서 이걸 눈치채고, 오히려 아예 기를 죽이려고 작센 진영을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이때서야 작센 선제후가 스위든 아돌푸스.랑 손을 잡고 프라하로 쳐들어가. 여기서 이길 수 가 있던걸 또 이걸 평화가 경제유 평화프로세스 해야쥬 하다가 반격 당하고, 다시 프로테스탄트에서 빠질라는걸 스위든 킹 아돌푸스가 못가게 하고, 그러다 스위든 킹이 죽으면서 작센 선제후는 완전히 빠지는겨.
그리고 끝나기 13년전 1635년 프라하 조약.을 합스부르크와 작센 선제후가 몰래하고 루사티아.를 받기로 해. 그러면서 작센 선제후는 합스부르크와 손을 잡아. 스위든이 적이 되고 패하고, 작센 땅은 합스부르크와 스위든 애들이 같이 약탈하기도 해. 이 작센 선제후 땅이 이지경이 된겨 이게.
Although not without political acumen, John George was not a great ruler; his character appears to have been harsh and unlovely, and he was addicted to drink and other diversions such as hunting.[1] Wallenstein held him in contempt saying on more than one occasion "have you seen how he lives ".[2]
캐릭 자체도, 거칠고 정없고, 술중독에, 사냥 좋아하고. 발렌슈타인 보헤미아 군수 짱.이 경멸조로 이사람에 대해 말하다. 당신은 그가 살아있는 걸 보아 왔는가. 즉 저 사람을 걍 무생물 취급한겨.
The House of Hesse is a European dynasty, directly descended from the House of Brabant. It ruled the region of Hesse, with one branch as prince-electors until 1866, and another branch as grand dukes until 1918.[1]
헷세 는 브라반트 에서 나온 가문인데.
Originally the western part of the Landgraviate of Thuringia, in the mid 13th century, it was inherited by the younger son of Henry II, Duke of Brabant, and became a distinct political entity. From the late 16th century, it was generally divided into several branches, the most important of which were those of Hesse-Kassel (or Hesse-Cassel) and Hesse-Darmstadt.
13세기 중반 1264년.에 브라반트 공작.의 아들이 헷세 란트그라프.가 된겨. 이게 마르틴 루터 시대에
Philip I, Landgrave of Hesse (13 November 1504 – 31 March 1567), nicknamed der Großmütige ("the magnanimous"), was a champion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of the early Protestant rulers in Germany.
필립 1세 까지 250년을 온건데, 이사람은 아빠가 다섯살때 죽고, 엄마 섭정에 일찍 라그프.가 된거야.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1521년 17세 때 만난겨. 그라프 백작 자격으로. 이 헷세의 필립.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다음 요한.과 같이 한거야 저당시. 프리드리히 1463년생 동생 요한 1468년생. 완전히 할배들이랑 같 스물때 같이 한겨. 그다음 요한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요한의 아들인데. 1503년생.이야. 이사람이 1532년 29세에 작센 선제후가 되지만, 한살 어린 헷세 필립.은 이미 십년이상을 마르틴 루터.에 저 할배 두 작센 선제후 공작을 함께 겪은 인간인겨. 이 헷세 필립이 슈말칼덴 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거야. 이사람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유카리스트 논쟁 Marburg Colloquy 마르부르크 회담도 주선한겨.
헷세 필립.이 슈말칼덴에서 패하고, 돌아와서 이때부터 헷세는 끝난거야. 캇셀 마르부르크 다름슈타트.로 분열되고 마르부르크.를 캇셀과 다름슈타트.로 다시 나눠갖은 상태에서 30년 전쟁이 터지걸랑. 동생쪽은 합스부르크와 손잡고, 형 캇셀쪽은 프로테스탄트와 손잡고.
저기도 별볼일이 없어지는겨 헷세도.
30년 전쟁.이 작센 과 헷세 의 시대가 끝났음을 확인사살 시켜주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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