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레이만.이 1520-1566 재임하고. 죽고. 셀림2세. 무라드3세. 메메드3세.에 아메드1세.까지 와 자식들이야 계속. 

 

아메드1세.가 1603-1617. 이고. 슐레이만 이후 3대가 십여년씩 한건데. 

 

슐레이만.이 1566년 시게트바 Szigetvár 전투에서 막사에서 죽걸랑. 다음날에 오스만이 시게트바 성을 처들어가는거고.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즈링스키.가 마지막연설 하면서 장렬하게 죽는거고. 즈링스키.는 크로아티아.의 상징이되고. 

 

슐레이만.이 저 직전해 1565년.이 몰타해전.이야. 오스만 사파비 전쟁.이 1532-55.야 슐레이만때. 23년을 한겨. 슐레이만이 사파비.를 이기면서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하류의 바스라.까지 간거야 걸프만 입구까지. 

 

오스만이 사파비.랑 저 전쟁으로 가르는 땅이. 타브리즈.라는 사파비의 고향은 사파비에 주는겨. 그리고 자그로스 산백 안쪽까지 지배한겨 오스만이. 자그로스 위의 반호수 지역은 중립지역이 돼. 코카서스 산맥 아래의 서쪽은 오스만이 갖고 가고. 이때부터 오스만이 페르시아만으로 나가면서 포르투갈.이랑 부딪히는거야. 오스만은 유럽에서 여기서 또한 싸워.

 

슐레이만.의 아빠 셀림1세.때에서야 지중해 동부해변을 먹고 아라비아반도 헤자즈 지역과 이집트.를 지배하는겨. 셀림1세의 아빠 바예지드2세.가 바다에 눈을 뜨고, 케말 리스.가 오스만 해군의 조상님이여 이때 등장해. 케말 리스 시켜서 이사벨라가 쫓아낸 스페인 유대인들을 데려오고. 아들 셀림1세.가 압바스.의 칼리프.를 갖고오면서 지중해 해적들이 오스만 셀림1세.에 들어오면서 북아프리카 해변이 오스만 것이 돼. 셀림1세때 지중해변.에 홍해의 헤자즈.까지 갖고오고. 아들 슐레이만.은 동쪽으로 더 가서 사파비.와 23년간 전쟁하면서 바그다드.에 바스라.까지 갖고오면서 페르시아만으로 인도양으로 진출하면서 포르투갈.과 부딪혀. 그러면서 다시 유럽 대륙으로 가고. 바다에선 몰타해전. 다음해 슐레이만은 다뉴브 왼쪽으로 확장하다가 시게트바.까지 가서 저기 막사에서 죽어. 비엔나.는 1529년.에 이미 다녀오면서 다뉴브 오른쪽은 오스만께 된겨. 

 

이 슐레이만이. 46년 재임하면서 엄청난겨 이게. 고조부 메메드2세.는 콘스탄티노플 점령해서 이름 알리지만. 얜 터키땅도 아직 못가져왔어. 이전 티무르.와의 전쟁과 아나키 내전으로 분열된걸 다시 통일한건 메메드2세.의 아들 바예지드2세.야. 아들 셀림1세.에 다음 슐레이만.때 걍 최고점을 찍은겨 얘가. 페르시아만 까지. 엄청난 인간이야. 동과 서와 북과 남에 바다와 육지에서. 

 

세계 전쟁사.에서 바다와 육지로 사방을 저리 쳐간건 얘가 유일해. 나폴레옹도 바다를 몰라. 알렉산드로스도 몰라 바다는. 아 이 슐레이만은 엄청난 인간이야 어쨌든간에. 슐레이만의 부인이. 루떼니아.여자여. 폴란드 킹덤의 루떼니아. 크림타타르.가 여길 쳐가면서 이 여자를 납치하걸랑. 코트에 바치고, 엄마가 슐레이만에 선물로 준 여자걸랑. 이여자가 정식 부인이 돼. 오스만의 실세여 또한. 

 

저 오스만 술탄애들이 유럽의 여자들이 부인들이 있어. 베네치아 여자가 술탄의 부인도 되고. 이 줄로 베네치아 스파이들이 들어오고. 

 

아메드1세.때에도 사파비랑 전쟁해. 사파비랑은 사파비 1500년 서기.에 서고 망하는 2백년간 대립이야. 호타키.에 아프샤리드 서기전까지. 대게 오스만에 조공 바치면서 아래서 기는거고. 아메드때도 사파비.가 조공안바치고 게겨서 또 쳐들어가서 깨갱하고. 또한 저때가 와이나푸티나 화산 1600 터진 직후걸랑. 여름이 사라지고 기근이 올때야. 반란도 일어나고. 그래서 13년간의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인 롱 투르크전쟁.을 협정으로 마무리를 해. 트랜실베니아 왈라키아 몰도바.에서의 전쟁들을. 헝가리 평원에 트렌실베니아지역은 여전히 오스만 관할인겨. 

 

 

Ahmed I renewed trade treaties with England, France and Venice. In July 1612, the first ever trade treaty with the Dutch Republic was signed. He expanded the capitulations given to France, specifying that merchants from SpainRagusaGenoaAncona and Florence could trade under the French flag  

 

아메드1세.에 무역협정을 갱신하다. 잉글랜드. 프랑스. 베네치아.와. 이 무역협정서.를 캐피튤레이션.이라고 해. capitulum 카피툴룸.이, 로마 일곱언덕의 카피톨리노.에 이게 캐피털리즘.해서 자본주의 로 번역이 된거지만. 저건 근본적으로. 대가리. 머리. 짱. 인겨 이건. 헤드라인.이고 제목.이야. 이걸 무역할때 협정서.가 돼. 항복이란 의미보단 이게 맞고. 

 

그래도, 상인들과는 계속 무역하게끔 한거야. 스페인과는 전쟁이걸랑. 스페인의 앙숙이 프랑스.고, 잉글랜드.는 반카톨릭이고. 베네치아.는 장사만 하는 애들이고, 스페인 라구사 제노바 안코아 피렌체 상인들도 프랑스 깃발.아래 상업을 허가를 했다는거지. 

 

저건 술레이만.이 프랑스 프랑수아.가 카를이랑 전쟁하고 포로가 되서리. 이때 프랑스에서 술레이만을 불러들이면서 오스만과 프랑스는  친해져. 나폴레옹까지 가는겨 이 사이가. 나폴레옹.는 오스만 군대가서 애들 가르치려 했걸랑 군사 자문으로. 

 

라구사. 라는게 ragusa. 라구사 리퍼블릭.이 Dubrovnik 1358–1808 . 450년 된. 리퍼블릭이여. 나폴레옹때야 지워져. 라구사 보다는 두브로니크.로 알려졌고. 두브로니크.가 지금 크로아티아 해변 국경 맨 아래야. 보스니아 남쪽 끝.을 막는 해변도시야. 이 두브로니크 라구사 는 상업의 나라야. 베네치아.의 영향력에 잇던 나라야. 저 해변지역.은 이들 관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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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Mohács 모하츠 전투.가 1526년.이야. モハーチ 이걸 일본어로 모하치.하걸랑. 해서 한글로도 여전히 저걸 모하치.로 읽는데. 모하츠.여. . The Siege of Vienna in 1529 비엔타 포위.가 3년 후야. 슐레이만이 바로 다뉴브따라 헝가리 먹고 비엔나로 쳐 올라갔다 내려온겨. 이때 헝가리는 먹힌겨 오스만에. 모하츠 전투로. 

 

 It was not until 1541 that the Ottomans finally captured and occupied Buda following the 1541 Siege of Buda. However, for all intents and purposes, the Battle of Mohács meant the end of the independent Kingdom of Hungary as a unified entity. Amid political chaos, the divided Hungarian nobility elected two kings simultaneously, John Zápolya in 1526 and Ferdinand of Austria in 1527.  

 

1529년에 비엔나 갔다 와서 부다를 함락한건 1541년.이야. 허나 이미 1526 모하츠 전투.로 께임은 끝난겨. 그리고 헝가리는 다뉴브를 경계로 동과 서로 나뉘고. 동쪽은 사보야이 야노스.가 동헝가리 킹덤.의 킹.으로 1526년.에 서면서 오스만에 하미지 하는거고, 당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나중 황제.는 자기가 헝가리 킹.이라 자칭하면서 갈리는겨 서쪽에서. 이게 로얄 헝가리. 라는겨. royal hungary.

 

동헝가리.는 사포야이 야노스.가 자기 죽으면 페르디난트.에게 주기로 했다가. 아들이 태어나면서 얘가 이어받고. 죽고 끝나. 동헝가리.라는건 사라져. 사포야이 야노스.는 트랜실베니아.의 보이보드 voivode . 영주였어. 얘가 모하츠 전투 에서 헝가리 킹 루이가 죽고 킹을 자처한거걸랑.

 

Stephen VIII Báthory (HungarianBáthory István, pronounced [ˈbaːtori ˈiʃtvaːn]) (1477–1534) was a Hungarian noble.

He was a son of Nicholas Báthory (1462–1500) of the Somlyó branch of the Báthory family.

He was appointed in In 1521 adjoint of the Voivode of Transylvania, and served under the Voivode John Zápolya.  

 

그러면서 트랜실베니아.의 보이보드.자리를 스티븐 8세 바토리.에게 주는겨. 이사람이 얀 자모이스키.의 후원으로 안나 야기에워.와 결혼하면서 폴란드 카먼웰스.의 킹이 되는 스티븐 바토리.의 아버지야. 

 

트랜실베니아.는 오스만에 하미지 하는겨. 스티븐 바토리.가 트랜실베니아.의 보이보드.였다가 프린스.로 독립선언하고 지위를 올려. 그래도 아버지대부터 오스만에 하미지하는겨. 그러면서 자긴 폴란드 킹.하고 이 트랜실베니아.는 자기 형 크리스토퍼 바토리.에게 보이보드 자리를 준겨. 트랜실베니아 는 오스만꺼야. 이게 졸 애매해진겨.

 

스티븐 바토리.는 자식이 없어. 죽어서 폴란드 카먼웰스.는 다시 앙리4세 추천했다가 지기스문트 바싸.에게 가는거고.

 

트랜실베니아.는 형 크리스토퍼 바토리.의 아들 Sigismund Báthory (HungarianBáthory Zsigmond; 1573 – 27 March 1613) 지기스문트 바토리.가 프린스.를 이어 하는겨. 얘가  재임이  1586–1598  12년간 인데. 13세에 즉위해서. 얜 카톨릭 편을 드는겨. 즉 합스부르크.여.

 

트랜실베니아.는 모하츠전투 1526년 이후 사포야이 야노스.때부터 오스만꺼야. 동헝가리와 함께. 다뉴브 오른쪽은. 헝가리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코트에서 등장하는겨. 헌데 얘가 크리스토퍼.가 카톨릭이걸랑. 엄마는 칼뱅이고. 헌데 시안하게 카톨릭 꼴통이 돼. 엄마하고도 척이 지고. 그러면서 얘가 정교분리가 안되고, 합스부르크.와 손을 잡는겨. 코트.는 반 합스부르크.에 친 오스만이걸랑. 어리고 힘이 없어서 하야놀이를 하는겨. 이때 군대가 다시 얘 편을 들고, 돌아와서는 반 카톨릭 친 오스만애들을 숙청을 해. 이때 등장하는게 왈라키아.의 용감 미하이.여. 이 용감 미하이.가 몰도바에 세우는게 스티븐 라즈반.이란 인간이고. 이들이 트랜실베니아.의 지기스문트 바토리.와 연합하면서 반오스만 전쟁을 하는겨.

 

이게 롱 투르크 전쟁.이라는 13년간의 전쟁이야. 

 

The Long Turkish War or Thirteen Years' War was an indecisive land war between the Habsburg Monarchy and the Ottoman Empire, primarily over the Principalities of WallachiaTransylvania and Moldavia.[7] It was waged from 1593 to 1606 but in Europe it is sometimes called the Fifteen Years War, reckoning from the 1591–92 Turkish campaign that captured Bihać.  

 

지기스문트 바토리.가 재임하고 7년후인 1593년.에 벌어지는겨. 저기서 중심인물이 왈라키아의 용감미하이.이고. 몰도바의 스티븐 라즈반.이고 트랜실베니아 프린스 지기스문트 바토리.야. 그리고 이 배후에 합스부르크.가 있는겨. 

 

헌데 저기서, 오스만이 계속 승리를 해. 지기스문트 바토리.가 힘을 못써. 얘가 자리를 Andrew Báthory 앤드류 에게 넘겨. 앤드류.는 먼저죽은 큰삼촌.의 자식이야 이름같은. 사촌인겨. 얜 추기경이야. 그리곤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프라하로 가서 죽어. 트랜실베니아.가 전쟁동원한 용병 월급을 못줘. 프린스로 옹립된 앤드류.는 농노들에게 죽어. 그러면서 트랜실베니아 프린스 자리가 허공에 뜬거야. 이 자리를 넘보는게 또한 폴라드 지기스문트 바싸.가 되는거고.

 

여길 꿰찬게.

 

Stephen Bocskai or Bocskay (HungarianBocskai István; 1 January 1557 – 29 December 1606) was Prince of Transylvania and Hungary from 1605 to 1606.  

 

스티븐 보츠카이.여. 지기스문트 바토리.의 외삼촌이야. 헝가리 귀족이여. 칼뱅이여 이인간은. 

 

지기스문트 바토리.의 엄마도 칼뱅이고. 보츠카이.도 칼뱅이고. 이게 말야. 헝가리가 지금 바로 위가 슬로바키아.지만. 여기가 upper 어퍼 헝가리.라는 헝가리 고지대여. 저게 헝가리꺼야 원래. 어퍼 헝가리의 서북쪽이 보헤미아.이고 이 위가 폴란드여. 보헤미아.는 14세기 얀 후스.가 나온 후사이트 hussite 들의 나라여. 이들이 폴란드로 스미고. 이들이 프로테스탄트가 되는겨. 헝가리가 저 보헤미아와 폴란드 영향권 아래여. 저들이 그래서 또 루터보다는 칼뱅이야. 칼뱅이 더 급진적이걸랑. 칼뱅은 조직을 싫어하는 파야. 그래서 또한 헝가리도 합스부르크 가 싫은겨 이게. 카톨릭이 싫은게 바탕이 있는겨. 

 

스티븐 보츠카이.가 프라하.에 있었지만, 신성로마애들이 보기엔 쟨 칼뱅이야. 반 합스부르크고. 감시를 해. 이사람이 결국 합스부르크.에 반기를 들면서 오스만의 지원을 받는겨. 그리고 저 빈 자리를 이사람이 취해.

 

 

Bocskai hired Hajdús (irregular soldiers) and defeated Rudolph's military commanders. He expanded his authority over the Partium, Transylvania proper, and nearby counties with the support of the local noblemen and burghers who had also been stirred up by Rudolph's tyrannical acts. Bocskai was elected prince of Transylvania on 21 February 1605, and prince of Hungary on 20 April. The Ottomans supported him, but his partisans thought that the Ottomans' intervention threatened the independence of Royal Hungary. To put an end to the civil war, Bocskai and Rudolph's representatives signed the Treaty of Vienna on 23 June 1606. Rudolph acknowledged Bocskai's hereditary right to rule the Principality of Transylvania and four counties in Royal Hungary. The treaty also confirmed the Protestant noblemen and burghers' right to freely practise their religion. In his last will, Bocskai emphasized that only the existence of the Principality of Transylvania could secure the special status of Royal Hungary within the Habsburg Monarchy.   

 

헝가리땅은 모하츠전투 1526년 이후. 킹덤이 사라진겨 이건. 사포야이 야노스.와 페르디난트.가 서로 킹킹 하지만, 먼 개소리여 닝기리 오스만이 거의 다 먹었는걸. 오스만이 당시 헝가리땅을 70퍼를 다 먹은겨. 남은곳은 어퍼 헝거리.라는 지금 슬로베키아, 카르파티아 산맥지역이랑 다뉴브 서쪽 저 끝자락 만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있던거걸랑. 헝가리 킹덤은 사라진겨. 이걸 사포야이 야노스.의 부자.시절 동헝가리 킹덤. 해주기도 하지만. 의미가 없어요 이게. 그래서 저시절을 Royal hungary 로얄 헝가리.라고 불러 후대에 와서. 이름 뿐인겨. 

 

보츠카이.가 이상황에서 고민을 한겨. 오스만과 합스부르크의 사이에서. 보츠카이.가 트랜실베니아.의 프린스.로 선출이 돼. 1605년 2월에. 그리고 헝가리 의 프린스.로 4월에. 이사람이 어퍼헝가리의 군주로 뽑힌겨. 헝가리의 킹.할때 헝가리.는 어퍼 헝가리.라는 북쪽 고지대와 서쪽 끝으머리 짝은 헝가리여. 이게 로얄 헝가리고 이 킹은 합스부르크가 겸한다는거지. 트랜실베니아와 로얄헝가리.외 어퍼헝가리 프린스 라는겨 보츠카이가.

 

당시 헝가리에선 합스부르크.가 민심을 다 잃은겨. 보츠카이가 합스부르크를 상대로 이겼어. 합스부르크.한테 정식으로 트랜실베니아.의 프린스.를 인정을 받아. 그래서 트랜실베니아 프린스.를 이사람을 first 제일로 치는겨. 이전은 오스만의 속지일 뿐이란거걸랑. 헝가리.의 4개 카운티.도 위임을 받아 이건 어퍼 헝가리여. 그리곤 프로테스탄트.를 인정을 받는겨 합스부르크로 부터. 독일땅은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정리했지만 딱히 이 외엔 이런게 없어. 헝가리가 이게 최초여. 프로테스탄트 들을 자유로이 예배를 할 수 있다며. 그러면서 보츠카이.는 트랜실베니아.의 위치.를 확고히 한겨. 이건 오스만에 하미지 하고. 나머지 로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것임을 인정하자며. 그래서 이사람이 두개 지영의 영주 지만, 하미지 하는 관할을 나눈거야. 아주 독특한거야 이건. 보츠카이가 머릴 잘 쓴거야. 이사람은 헝가리의 정체성을 트랜실베니아.에 둔거야. 

 

The Treaty of Vienna (also known as the Peace of Vienna) was signed on 23 June 1606 between Stephen Bocskay, a Hungarian noble, and Archduke Rudolph.  

 

이게 비엔타 조약. 1606년.이야.  오스트리아 대공작.이자 신성로마황제 루돌프2세.와 스티븐 보츠카이. 이 다음에 바로,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이 조약을 맺는겨. 이 중심은 스티븐 보츠카이.인거야.

 

The Peace of Zsitvatorok (or Treaty of Sitvatorok) was a peace treaty which ended the Fifteen Years' War between the Ottoman Empire and the Habsburg Monarchy on 11 November 1606. The treaty was part of a system of peace treaties which put an end to the anti-Habsburg uprising of Stephen Bocskay (1604–1606).

 

시트바토로크 조약. 비엔나 조약 6월에 하고. 11월에 이걸 한겨. 이걸로 롱 투르크 전쟁. 13년 혹은 15년 전쟁.을 마무리를 해. 이건 오스만이 이긴거야. 헌데 오스만이 국내 반란에 사파비 전쟁에 이걸 마무릴 해야했어. 전쟁하면서 세금  걷걸랑. 더하여 와이나푸티나.로 계속 흉작이고. 

 

즉 로얄 헝가리.와의 관계야 이건. 트랜실베니아는 여전히 오스만꺼고. 다뉴브 서쪽에 어퍼 헝가리아래 도 오스만꺼고. 여기에 오히려 로얄 헝가리쪽이 전쟁 보상슴을 바치는겨 오스만에게. 저건 아메드1세.와 황제 루돌프2세.와의 조약이야.

 

그리고나서 둘은 더이상 전쟁 하지 않기로 한겨 이지역에선.

 

Sigismund Rákóczi (HungarianRákóczi Zsigmond; 1544 – 5 December 1608) was Prince of Transylvania from 1607 to 1608. He was the son of János Rákóczi, a lesser nobleman with estates in Upper Hungary.

 

보츠카이.가 죽고. 다음 잇는게 지기스문드 라코치. 어퍼 헝가리의 귀족이야. 십여세가 많아. 보츠카이.가 부종이 있걸랑. 병으로 죽어. 

 

 

코트 다이어트에서 세운 사람이. 라코치.여. 60이 넘어서 프린스.가 된겨. 보츠카이.와 생각이 같아. 보츠카이와 친했고. 

 

The Vizsoly Bible, also called Károli Bible was the first Bible printed in the Hungarian language.[2][3] It was translated in the 16th century by pastor Gáspár Károli and fellow Calvinists and was printed in 1590 by Bálint Mantskovit. A copy is kept on permanent display in the Hungarian village of Vizsoly.  

 

비조이 성경. 카롤리 성경. 헝가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야. 서기 1590년. Gáspár Károli  가스파르 카롤리.라는 헝가리 사람이 번역한겨. 스웨덴 애들은 구스타브 바싸때 루터 애들불러서 번역해달라한겨. 헝가리애들은 지들이 직접 한겨 이걸. 지기스문드 라코치.때 한거야. 헝가린  안타까운 나라야. 얘들도 결국 나중에 민족주의.로 망하는겨 이게. 체코 도 똑같이 민족주의 로 망하는거고. 가짜 고대 서류들을 들이밀면서 자기 민족의 작품이라며 민들 선동해대고. 이 민족주의 들의 공통점은 전세계적으로 같아. 사기. 거짓말. 거짓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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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 Báthory (HungarianBáthory Gábor; 15 August 1589 – 27 October 1613) 

 

가브리엘 바토리. 바토리 가문.의 이 인간이. 내전을 하려는겨. 저건 자기들 바토리 가문 꺼라며. 그 스티븐 바토리의.

 

 

The hajdúk (singular hajdú) were irregular or mercenary soldiers of the Kingdom of Hungary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하이두크.가 당시 헝가리 용병집단이야. 원래 바토리.가 보츠카이 죽고서 권력 잡으려다가 이 하이두크 때문에 못잡았걸랑. 이들을 꼬시고 연합해서 내전하려는 걸 지기스문트 라코치.가 알고, 자리를 내려와. 그리고 억지로 다이어트 소집해서 저 애가 트랜실베니아.를 쥐는거야.

 

그러면서 보츠카이.의 스킴이 깨져. 얘가 주제넘게 왈라키아에 몰도바를 넘보는겨. 오스만을 먹으려는겨. 아무 힘도 없으면서. 

 

 Gabriel planned to reunite Royal Hungary and Transylvania under his rule with Ottoman support.[86] Although he ordered the princes of Moldavia and Wallachia to send reinforcements and the Saxons to pay a tax of 100,000 florins, the prince of Moldavia did not send troops and the Saxons paid only 10,000 florins.[86] Imreffy again went to Royal Hungary to negotiate with Thurzó in Kassa.[86] By 15 August, they reached a compromise which resolved most of the contentious issues.[87] However, Matthias II did not ratify the agreement because it stated that Transylvania was not required to provide military assistance to Royal Hungary against the Ottomans.[88]  

 

가브리엘.을 1610년.에 암살범이 침대에서 암살시도하려다 그냥 자백을 해. 문제는 저 하이두크.라는 용병집단이야. 얘들이 근위대에 권력 실세가 된겨. 하이두크 도움으로 얜 권력을 잡은거고. 하이두크.가 걍 헝가리 마을들에서 약탈을 하는겨. 이것때메 가브리엘이 웬수가 된거고. 가브리엘.이 로얄헝가리.랑 왈라키아 몰도바.를 다 지배를 하려는겨. 걍 미친 애야 이건. 몰도바.와 왈라키아.는 트랜실베니아.의 영향력에 있는거고 이 트랜실베니아가 오스만에 하미지를 하는거고. 합스부르크.는 그게 인정이 안되는거지만 조약을 맺은 상태고.

 

트랜실베니아 작센.들이 12세기.에 들어온 게르만들이야. 마크 경계병들로. 그러다 정착을 한겨. 몰도바와 여기 작센에 세금을 더 바치란거고, 이걸 거절하는거고.

 

가브리엘이 암살 모면하고 얘가 막 전역을 약탈하는겨 이게. 당시 황제 마티아스2세.도 저건 용납이 안돼. 몰도바 왈라키아.는 헝가리 킹.인 자기꺼야. 함부로 저애가 쳐들어가는거고. 오스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 대체 혼자 저게 먼 짓인겨. 특히나 오스만이 반감 갖으니 얘가 합스부르크 마티아스2세에게 손을 내밀어 오스만을 치자고. 

 

The Diet authorized Gabriel to begin negotiations with Matthias II, and their envoys signed an alliance in Pressburg (now Bratislava in Slovakia) on 24 December 1612.[131] Matthias sent his delegates to Transylvania to urge the Saxons to surrender to Gabriel.[131] The treaty outraged Ahmed I, who decided to replace Gabriel with Bethlen in March.[127][132] Matthias and Gabriel's envoys concluded a new treaty on 12 April, and Matthias acknowledged Gabriel's hereditary right to rule Transylvania.[133] In a secret agreement, Gabriel promised to support Matthias even against the Ottomans.[134] He granted a royal pardon to the Saxons and their allies, including Géczi (who was made commander of Gabriel's guard). 

 

가브리엘 바토리.가 마티아스2세.와 협상하고 손을 잡아. 오스만 아메드1세.가 열받아. 그리고. 가브리엘 대신 Bethlen 베뜰렌.으로 교체하기로 마음 먹고. 베뜰렌 에게 오스만 군대를 주고 가브리엘을 치러 가는겨.

 

1610–1614 Spanish-Turkish War – 15,000 killed in action

 

이게 서기 1610-14.의 스페인 투르크 전쟁.이야. 지난번에 이게 없다고 했었는데. 이걸 말하는 거야 보니까. 헌데 저게 딱히 스페인 투르크 전쟁은 아녀. 걍 저 가브리엘 바토리.라는 미친 애의 날뛰기 일뿐이야.

 

오스만의 군대에 하이두크.들이 안되는겨. 가브리엘이 도망가다가 궤짝속에서 티나오고 죽어. 서기 1609년. 그리곤 베뜰렌.이 프린스.를 하는겨. 저때부터 트랜실베니아.는 완전한 오스만의 속국이 된거야. 보츠카이.와 라코치.가  아까운 입장인거고. 

 

가브리엘 바토리.는 가장 최악의 인간이야 헝가리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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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드1세.가 형제살해.를 멈춘 인간이야. 그래서 장성한 아들들도 있고. 형제들도 있고. 술탄될 인간들이 많은겨. 이걸 코트에서 세운게 동생 무스타파 1세.야. 당연히 아메드1세.의 장남을 선두로 반발하는거고. 

 

Mustafa I (/ˈmʊstəfə/Ottoman Turkish: مصطفى اول‎‎;24 June 1591 – 20 January 1639), called Mustafa the Saint (Veli Mustafa) during his second reign and often called Mustafa the Mad (Deli Mustafa) by modern historians, was the son of Mehmed III and was the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from 1617 to 1618 and from 1622 to 1623.

 

오스만이 1299년에 세우고.  3백년 만에 형제가 술탄이 된겨 이게. 바예지드1세가 티무르랑 전투하다 포로되 죽고 내전하면서 메메드1세부턴 걍 형제살해걸랑. 2백년 된겨 형제살해가. 오스만이후로도 형제가 술탄이 된적이 없어 여긴. 걍 죽어야해 2백년 전부터는. 헌데 아메드1세.가 이걸 안한겨. 그러면서 무스트파1세.가 술탄이 돼. 얜 죽다가 살아나서 술탄이 된거걸랑. 

 

정신이 미쳐버린겨.ㅋㅋㅋ.

 

It was hoped that regular social contact would improve Mustafa's mental health, but his behavior remained eccentric. He pulled off the turbans of his viziers and yanked their beards. Others observed him throwing coins to birds and fish. The Ottoman historian İbrahim Peçevi wrote "this situation was seen by all men of state and the people, and they understood that he was psychologically disturbed."[7]  

 

26세에 술탄이 되었는데. 비지어들. 장관들 터번을 벗기고. 턱수염을 당기고. 동전들을 새와 물고기에 던지고. 애가 정신이 이상한겨.

 

Osman II (Ottoman Turkish: عثمان ثانى‎ ‘Osmān-i sānī; 3 November 1604 – 20 May 1622), commonly known in Turkey as Genç Osman ("Osman the Young" in English), was the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from 1618 until his regicide on 20 May 1622. 

 

아메드1세.의 장남. 오스만2세.가 삼촌을 내리고 유폐시키고 자기가 술탄을 해. 그리고 이때 또 코사크 들이 몰도바를 수시로 약탈하는거고. 오스만2세가 즉위하자 마자. 몰도바로 가는겨.

 

 

1618–1619 Spanish-Turkish War – 6,000 killed in action[1]  

 

이게 전쟁사에서 분류한 스페인 투르크 전쟁인데. 이건 폴란드.오 오스만이 몰도바에서 싸우는겨.

 

In the meantime, the Thirty Years' War raged across Europe. The Commonwealth was relatively uninvolved in this war but the Polish King Sigismund III Vasa sent an elite and ruthless mercenary unit, the Lisowczycy, to aid his Habsburg allies in Vienna, since his brother-in-law was the Emperor. They defeated George Rákóczi of Transylvania at the Battle of Humenné in 1619.  

 

저건 어이없게도 시작이 다음에 나오는 독일땅 30년 전쟁이야. 보헤미아에서 터진. 이때. 트랜실베니아.는 칼뱅이걸랑. 베뜰렌.이 프린스인데 보헤미아의 반카톨릭을 돕는겨. 폴란드 지기스문트 바싸.가 완전 카톨릭의 합스부르크로 돌아서서 합스부르크.를 돕는거고. 후메네 전투. 1619. 어퍼 헝가리여. 슬로베키아. 여기서 저 폴란드 애들때문에 지는겨 베뜰렌.이. 그리곤 오스만에 지원요청을 해. 요때 오스만의 술탄.은 오스만2세.가 갖 즉위한거야. 

 

저때 딱히 없어. 저게 다야. 저 목록에서 저건 후메네 전투.1619 인데. 저건 폴란드와 트랜실베니아 의 전투야. 

 

자기가 술탄이 되고, 먼가 해야 해.. 삼촌 유폐시키고. 몰도바로 가는겨. 

 

The Battle of Cecora (also known as the Battle of Ţuţora/Tsetsora Fields) was a battle betwee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ided by rebel Moldavian troops) and Ottoman forces (backed by Nogais),[3]:344 fought from 17 September to 7 October 1620 in Moldavia, near the Prut River  

 

체초라 전투. 여긴 프룻.강이야 Prut 이 프룻 강이 지금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경계 강이야. 다뉴브 지류여. 오스만이 완승을 해. 그리고 올라가면서 오른쪽 이동

 

The Battle of Khotyn or Battle of Chocim or Hotin War[7] (in Turkish: Hotin Muharebesi) was a combined siege and series of battles which took place between 2 September and 9 October 1621 between a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rmy and an invading Ottoman Imperial army.  

 

이게 코틴 전투.야. 1621년. 여기서 오스만이 완패를 해. 이때 9월인데. 눈이 내려. 오스만애들은 눈을 싫어해.

 

얘가 삼촌 쫓아내고 술탄이 되었는데. 여기도 웃긴게. 하렘.이 단순한 창녀촌이 아니걸랑. 저기가 또 권력이여. 오스만2세.의 엄마는 일찍 죽었어. 하렘 여자들 입김이 없어 얘가. 헌데 삼촌 무스타파.의 엄마.는 살아있는겨. 얘가 불안불안한겨 이게. 다시 쳐들어갈라고 해. 예니체리.라는 근위대는 눈맞고 패하고 고생 졸해서 말을 안들어

 

The Sekban were mercenaries of peasant background in the Ottoman Empire.[1] The term sekban initially referred to irregular military units, particularly those without guns, but ultimately it came to refer to any army outside the regular military.[2] The sekbans were not only loyal to the Ottoman state, but they could become loyal to anyone who paid them a sufficient salary.[3]  

 

세크반. 이 오스만의 농민용병집단.이야. 예니체리.는 최고의 근위대이고. 오스만2세.가 세크반을 데리고 출정을 하려는겨 자기들 쌩까고. 당연히 예니체리.가 불안하걸랑. 오스만을 죽여.

 

그리고 다시 무스타파1세.가 재즉위.해. 

 

얜 그동안. 더 미쳐버린겨.

 

He believed that Osman II was still alive and was seen searching for him throughout the palace, knocking on doors and crying out to his nephew to relieve him from the burden of sovereignty.[14] "The present emperor being a fool" (according to English Ambassador Sir Thomas Roe), he was compared unfavorably with his predecessor.[7] In fact, it was his mother Halime Sultan the de facto-co-ruler as Valide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조카 오스만2세.가 살아있다며 궁궐 구석구석 찾아다니는겨. 온방을 두드리고. 자기가 술탄의 책임이 너무 버거운겨. 제발 니가 살아 돌아와서 대신 술탄 하라고. 

 

엄마와 외척이 권력쥐고, 반란하고. 오스만2세의 동생.이 술탄이 돼. 무라드4세. 

 

형제살해.를 피한 정신병이 시안하게 씌인겨 무스타파1세에게.

 

Bocskai's statue on the  Reformation Wall  ( Geneva ,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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