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기전에, 이전에 쓴 그리스도 1~5. 루터와 칼뱅 1~4. 파렐과 칼뱅. 이단 1~5. 삼위일체와 교회분리 1~7. 을 필독하고 나서, 읽도록 해. 저 글들은 그야말로 명문이다. 머 여기 글들이 유럽사 들어오면서도 어느 하나 명문이 아닌 게 없지만도. 저런 글들은 영어로도 없다. 

 

아 특히나 말야. 지저스와 필라투스의 대화, 킹덤 이야긴 저건 정말 최고다 저건. 내 저건 타이핑질 하면서도 뭉클했는데 말야. 물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부분에겐 먼 개소리여 해대겠지만.

 

칼뱅이 특히나 많아지걸랑. 지금 칼뱅주의인 개혁교회가 1억에서 2억이고, 루터교회는 8천만이야. 펜테코스탈 이라는 오순절교파가 3억 가까이고, 침례교가 1억 메쏘디스트라는 감리교가 8천만. 재림교가 2천만이걸랑. 이들 얘긴 나중에 할까 모르겠는데.

 

오순절교회의 찰스 파렘은 시작이 메쏘디스트라는 감리교에서 자랐어. 이 감리교는 자기들을 침례교 타입이라고 해. 오순절교회가 침례교에 더하여, 재림교 성격이  강해. 지저스가 곧 온다는 강력한 확신이 있어. 

 

저들이 말야, 뿌리는 침례교여. 감리교 오순절교 가 침례교여 이게. 여기에 재림교가 섞인게 오순절교회여. 침례교 뱁티스트가 17세기초이고, 감리교가 18세기고 재림교가 19세기 초, 오순절교가 20세기 초야. 신도가 제일 많을 수 밖에 없는겨. 이들은 성령을 삶에 강력하게 써먹어. 세속에서 제일 활발하게 살 수 있는겨 이들이. 성령을 세속에 삶의 원동력으로 써먹으면서, 자기들 나름의 희망을 삶의 끝에 걸어놓는거야 또한 강력하게. 지저스의 재림. 프레임 잘 짠건데. 이들이 하는게 특히나 안수기도 하면서 앉은뱅이 일으키는거고 성령이 임합니다요 성령이 힘을 줍니다요 하는겨.

 

저게 유대인이야. 아니 저들이 유대인이란게 아니라, 유대교.가 세상에서 소수로 강력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이었던거 저 프레임이야. 유대교는 말이야, 내세를 기다리지 않아.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게 머냐 고 말해달라면, 유대교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아. 천국이니 지옥이니 이따위거 관심이 없어. 메시아가 내가 살 때 오는거야. 아니면 내 자식대에 오는거고. 그걸 기다리고 그 메시아를 영접하게 끔 자기를 만들어가는겨. 

 

삶은 내세에 기대는 이념은 활동력이 없어 이게. 이 대표적인게 불교고 힌두교야. 이런 곳의 세상은 그래서 세속적 관점에서는 실패 하는거야. 세속이 어떻게 돌아가던 관심이 없어 이 부류는. 인간의 문명이 그래서 여긴 죽는거야. 내세를 위해서 세속을 회피하게 돼 이쪽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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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분파흐름들을 보면 말야. 재림교에 오순절교로 가며 성령 하는게, 저 재림교나 오순절교나 미국에서 시작한거걸랑. 

 

미개해진겨 인간이. 인간의 이성 의 측면에서 보면. 영지주의적 관점으로는 영성이 깊어진거고. 나쁜말로는 원시적으로 돌아간거고. 아 중간자적 표현을 하려니 짜증은 나고.

 

인간이란게 가만보믄, 오히려 고대그리스 로마 인간들의 이성이 훨 이성적이고 훨 인간다움의 인간인듯도 해. 그리스도 초기 도 저따위 신앙은 아니었걸랑. 인간은 가면 갈수록 미개해지는건지 말야. 이조선빠닥도 보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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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침례교의 침례라는게, 저걸 나중에 논하겠지만, 내가 솔직히 저런걸 좀 정리를 해야하는데, 내가 저걸 정리하기 위해서 사전단계로 이 역사 이야기를 푸는거야  귀찮게. 역사 이야기가 안풀리면 저게 제대로 풀릴 수가 없어. 신에 대한 이야기, 철학 이야기, 자연과학 이야기는 말야 이 바탕에 인간의 역사야 이게. 이게 제대로 안풀리면 안풀려 모든게 제대로. 그래서 꾸역꾸역 내가 이짓을 하는건데. 

 

침례,라는 도구로, 지저스.가 생체육신에서 크라이스트 라는 메시아 가 된거야. 온니 비갓튼 썬 오브 갓.이 된거고. 사람의 아들 썬오브맨.에서 사람의 그아들 더썬오브맨.이 되고 썬오브 갓이 된겨. 이 기회를 단초를 제공한 인간은 세례자 요한이야. 허나 지저스의 깨달음은 침례를, 물에 빠지며 나오는 순간, 아주  강력하게 깨달은겨 이 순간. 

 

지저스는 저 순간에 말야, 정말 그야말로, 눈물을 펑펑펑펑 흘렸을꺼야. 갑자기 감격이 막 넘치는거야 오온 몸에. 

 

자기가 고민고민고민을 해온 모든 문제가 쌓이고 쌓이다가 저 한 순간의 침례 라는 의식으로 퍼뜩 깨인겨 이 지저스 라는 생체육신은. 그 기회를 제공한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했을꺼야 분명 지저스는. 그리고는 광야에서 40일의 단식을 한겨. 

 

그걸  지저스가 세례를 했다고 우리도 세례 하면 지저스가 된당께 해대민서 갓난애기에 아나뱁티스트 들 처럼 커서 제대로 깨인 인간만 합시다래 어쩌고 해보이 다 무의미한 짓일 뿐이야. 침례라는건 세례 라는건, 지저스 일 개인의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모든 문제를 사유하고 고민한 저 가능태의 한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뿐이야. 

 

난 왜 이리, 잘 보는 걸까. 하늘에 계신 지저스 께서 내말에  끄떡 하실텐데 말야.

 

난 지구상 가장 위대한 인간을 둘 거론하라면 말야, 하나는 지저스 이고 하나는 카이사르.라고 정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그렇다고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아이덴티티. 명찰 붙이고 싶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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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칼뱅만 보자고 일단. 칼뱅이 루터보다 지금도 많아. 30년 전쟁 당시도 칼뱅이여 라인강 동쪽은. 라인팔츠그라프 인 프리드리히5세 가 프로테스탄트 동맹의 수장인데 이 인간은 칼뱅이여. 칼뱅파가 신성로마제국의 프로테스탄트의 짱이야 이게. 하물며 헝가리 트랜실베니아 들도 모두 칼뱅이여 저기가. 루터 영주였던 헷세의 장남쪽 캇셀도 칼뱅이여. 루터는 스위든 덴마크 애들이나 루터여. 스위든은 자기들 언어로 된 예배식을 루터애들이 와서 번역해서 마련해준거고. 북유럽 영주는 정치적으로 카톨릭세력을 죽이기 위해 새로 만들면서 루터교회를 만들면서 교회를 영주의 세력권으로 넣은 거일 뿐이걸랑. 

 

네덜란드도 초기 80년 독립전쟁시 오히려 프랑스 위그노 애들이 와줬어. 칼뱅의 무리여. 그러다 지들 성바르텔레미 학살로 지들 땅에 다시 간거고. 성상파괴  해. 얘들은 칼뱅이야 성상파괴는. 루터는 성상 이미지 주의자야. 아 가만보니 칼뱅 세상이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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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al of the virgin birth of Jesus is found among various groups and individuals throughout the history of Christianity. These groups and individuals often took an approach to Christology which understands Jesus to be human, the literal son of human parents.[2][3]

During the 19th century this view was sometimes called Psilanthropism, a term which derives from the combination of the Greek ψιλός (psilós), "plain," "mere" or "bare," and ἄνθρωπος (ánthrōpos) "human." Psilanthropists then generally denied both the virgin birth of Jesus, and his divinity. Denial of the virgin birth is distinct from adoptionism, and may or may not be present in beliefs described as adoptionist.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은 말야, 삼위일체 란게 티나온 이유는, 지저스 라는 이름의 생체육신에 대한 정체성이야 이게. 대체 지저스 란게 머냐는거야. 이게 참 독특한거야.

 

싯달타의 정체성, 무함마드의 정체성 논쟁이란 없어. 싯달타는 카필라 라는 나라의 왕자일 뿐이고, 엄마 겨드랑이에서 나와쓰요 하면 걍 그런가부다 하는거걸랑. 무함마드는 자기가 마지막 예언자 라고 한거고, 이사람은 그래서 프라핏 phrophet 이야. 라스트 프라핏.이야. 

 

헌데 지저스는 말야, 온니 비갓튼 썬 오브 갓.이야 . 유일하게 낳아진 신의 아들이야. 크리에티트 된게 아니야. 비갓튼.이야. 이건 그냥 낳은거고, 나온거야. 신의 아들이야. 구약의 숱한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의 하이포스타시스 서브스턴스 그 바닥 실재를 같이 한 정체란거야. 

 

또한, 지저스의 입으로, 4대복음에서만 81번을 말해. "the son of man" is "ὁ υἱὸς τοὺ ἀνθρώπου" (ho huios tou anthropou) 오 우이오스 토우 안트로포우. 정관사 오. the 를 꼭 붙이는겨 지저스는. 자기가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할때는, 히브리의 구약에서는, 벤 아담. 사람의 아들.이지 사람의 그 아들.이란 말은 없걸랑. 하물며 그리스 다른 일반 리터러쳐들 조차 정관사를 안붙여.

 

the rose of batte. 예이츠.의 시 전투의 장미.도. 전투의 그 장미야. 이게 어감이 달라. 전투에 임하는 그 장미인겨. 장미의 이름.도 에코는 일 노메 델라 로자. 그 장미의 그 이름이야. 조셉 콘라드.의 하트 오브 다크니스. 는 전혀 관사가 없어. 저건 추상인겨. 어둠이란 것도 잡히지 않은 안개같은 어둠이고 하트 도 잡히 지 않는 모르겠는 하트여. 이 관사 가 있고 없고 가 달라 이게. 

 

지저스.는 사람의 흔한 아들이 아냐. 사람의 그 아들이야. 지저스의 어법이 아주 독특한거야.

 

삼위일체 란 건 저 지저스의 정체 에서 서로 부닥치는거야. 지저스가 신이냐 사람이냐 신과 사람이 섞여서 전혀 다른 어떤거냐. 아 가만 그러면 신은 지저스랑 어떻게 되는겨 이거. 어머 참 성령이란것이 구약에도 보여, 먼가 신 아부지는 형상으로 추상한 어떤거라 치고 세상은 기 가 스윽 바람처럼 스민 성령에 의함인거 같오 어머나 그럼 신아부지와 성령은 머고 가만 지저스는 머여.

 

시작은 지저스여. 지저스의 정체. 이게 천년간의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이야. 무함마드는 예언자 라서 논쟁할게 없어. 지저스는 사람의 그 아들에 신의 아들이야. 그럼 신아부지랑 신아들의 관계는 머까 막막 이런 생각들이 들게 하는겨

 

유례가 없는겨 이런게. 이게 삼위일체 란 이름으로 정리를 하는거지만. 모든 이단논쟁은 결국 저거야. 지저스의 정체.가 머냐는거야. 결론은 지저스의 완벽한 신과 완벽한 인간.이 합친거고. 섞여서 전혀 다른 성질인 정체도 아니고. 그래서 엄마도 버진이셔야 하고 엄마는 당연히 테오토코스. 신엄마 여야 해. 

 

지저스의 정체 의 저런 것 하나하나에 대한 반론. 지저스와 신아빠와의 위격, 누가 높냐 문제, 여기서 서로 논쟁이 붙으면서 하나하나 구성요소가 티나오면서 이에 대한 반발들이 생기면서 각각각각은 이단. 해대는거걸랑. 이게 천년 이단의 역사야. 그 절정이 프로테스탄트 인거야. 물론 카톨릭 입장에선. 

 

Psilanthropism. 19세기에 만든 말 씰렌뜨로피즘. 프실로스 안트로포스. 단지 인간일뿐. 버진 마리아에서 나온 신적 존재가 아니야 태생이. 그냥 생체육신일 뿐이야. 이사람이 자기가 깨달아서, 신적 존재가 된거고 메시아가 된겨. 초기 공회의들에서 이단으로 찍힌 이들의 전부는, 전부라 말하면 거시기 하고 대부분 이라 하자,  저 이야기를 직접하거나 돌려말하는것 뿐이야. 

 

Pelagianism 펠라기안이즘. 4세기 브리튼 몽크 수도사 펠라기우스. 원죄란거 없어. 인간이면 누구나 정진해서 자기 자유의지로 죄없이 살수 있고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어. 강력한겨 벌써 이당시에.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있어! 강력한 솔라 피데의 다른 어법야. 루터 도 상상 못하는 말이야 이건. 칼뱅도 이런 말 들으면 분노할껴. 칼뱅은 아주 철저한 운명론자야. 저런 말 듣는것 조차 역겨워 할 인간이야 칼뱅은.

 

Apollinaris of Laodicea, (died 382) 라타키아.의 아폴리나리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야. 인성의 바닥은 짐승과 다를게 없어. 신성을 갖아야 해. 고차원의 신앙을 배워 익혀야 하고.  멋진 말이야 4세기에. 이것도 거부당해. 삼위일체에서 그래서 명확히 규정하는겨 공회의에서, 우리 인간은 지저스의 인성.과 다를 게 없다고. 단지 지저스는 우리와 다른게 죄가 없을 뿐이고. 이건 루터 와 들어가면 상통해. 루터도 인간에 자유의지는 없걸랑. 죄로 덕지덕지 휩쌓인 생체육신일 뿐이걸랑. 헌데 얜 솔라 피데 하라 했걸랑 그러면 신성.을 갖을 수 있어서 신의 은총을 받을 껀덕지가 된다는겨. 그리고는 굿워크를 할수 있담시 이제 내교회 루터교회로 오셔 솔라피데, 오직 믿음은 내교회와서 하랑께.

 

삼위일체.가 지저스의 정체 에 대한 여러 의문에서 시작해서 성부성자성령.이란 세 개의 단어가 1세기 서신.부터 등장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가서 전하거라 하는 마태.에서만 나오는 저 세 단어의 묶음은 마태의 마지막 말이고, 이건 덧붙여진거야. 초기 코덱스엔 이게 없어. 지저스의 부활 이야기 마가복음도 초기에 없어. 덧붙여진겨 후대에 필사하면서. 

 

저게 1차 니카이아 공회의 때 250년 지나서야 일차로 정리를 해. 325년. 이전 250년 간 숱한 반박들에 대한 그 반격 논리로 만든거야. 삼위일체 라는게 연역적으로 쎗팅이 되서 떨어진게 아니라, 250년간의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면서 정리를 한겨 저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의제기가 또 숱하게 나오고. 이걸 4차 공회의 칼케돈.에서 서기 451년.에 다시 정리해. 130년 간의 논쟁을 거친거야. 즉 니카이아 공회의 크리드 의 헛점을 130년간 보완해서 이단 규정하면서 반박논리로 다 메꾼거야 헛점을. 이건 정확하게 말야. 귀납적인 방법으로 인한 결론이야. 그래서 이상하게 말도 안되는 애매한 연결인거야 저게. 저 상태에서 1054년 필리오케 까지 와서 동서교회 분리가 된겨.

 

가장 핵심은 지저스의 정체.여. 

 

뒤의 프로테스탄트 들 교리 논쟁하는것도, 지저스의 정체.여 이게. 얘들이 떨어져 나가는 교리 부분에서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헷세 필립.의 주선으로 만나는 1529년 마르부르크 Marburg 회담도 유카리스트 이야기걸랑. 이건 지저스의 정체문제야. 

 

 

이 칼뱅의 전신은 말야, 츠빙글리여 스위스 취리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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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1517년 대자보 이후. 두 세력이 루터.와 츠빙글리.야. 

 

가장 시안한게, 츠빙글리.가 버려진거야. 본토 스위스에서 조차. 내가 인정하는 초기 프로테스탄트.는 츠빙글리.와 토마스 뮌처 인데 말야. 토마스 뮌처.는 하르츠 산맥에서 태어난 족보없는 사람이고 이사람 일생은 좀 애틋하걸랑 내가 볼땐. 이사람은 걍 농민전쟁때 스스로 발기해서 잡혀 죽는거고, 당연히 이사람의 교회는 없어.

 

헌데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정치리더이자 교리리더이자 핵심이걸랑. 이사람이 성경도 번역해. 카펠전투로 죽고, 이 츠빙글리의 유산을 칼뱅주의가 다 먹고 츠빙글리가 사라지는겨 이게. 이건 역사적으로 너무나 부당한건데. 

 

Christianity is the predominant religion of Switzerland, its presence going back to the Roman era. Since the 16th century, Switzerland has been traditionally divided into Roman Catholic and Reformed confessions. However, adherence to Christian churches has declined considerably since the late 20th century, from close to 94% in 1980 to about 66% as of 2017.[2]  

 

지금 스위스 종교를 보면. 여기도 크리스천들이 최근 급감을 했어. 1980년 94퍼였다가 2017년 66퍼야. 이건 유럽지역의 최근 추세야. 

 

The Federal Statistical Office reported the religious demographics as of 2017 as follows (based on a survey of 200,000 people aged 15 years and older[note 1]): 65.6% Christian (including 35.9% Roman Catholic, 23.8% Reformed, 5.9% other), 26.0% unaffiliated, 5.4% Muslim, 0.3% Jewish, 1.4% other religions. (100%: 6,981,381, registered resident population age 15 years and older).[2]  

 

여론조사 2017년을 보면 15세이상 20만명 대상. 66퍼 크리스천 중에, 로마 카톨릭이 36퍼. 칼뱅이 24퍼. 다른 그리스도가 6퍼.이고. 나머지 34퍼 중에. 무교는 26퍼. 8퍼 중에 무슬림이 5.4 유대교 0.3 기타 종교 1.4 걸랑. 

 

즉 츠빙글리.는 완벽하게 사라졌어. 아 슬픈. 

 

취리히.가 로마 카톨릭이 30퍼고 스위스개혁교회가 33퍼.야. 츠빙글리의 힘으로 그나마 여긴 칼뱅이 많은겨.

 

The Zürich Bible (Zürcher Bibel, also Zwinglibibel) is a Bible translation historically based on the translation by Huldrych Zwingli. Recent editions have the stated aim of maximal philological exactitude.

It is thought to be the first Bible to contain a map.[1] Froschauer Bible. High Alemannic (Swiss German)

 

취리히 성경. 츠빙글리비벨. 츠빙글리.가 스위스 독일어.인 고지대 알레마닉.으로 번역한 성경이걸랑. 루터 성경 참조해서 신약 구약 번역한거야. 프로샤우어 성경 이라고도 해. 인쇄소 이름이야. 야 샹 성경도 번역해주고, 지들 대표로 전쟁도 한 츠빙글리.를 어찌 이리로 홀대를 해버리니.

 

 

Martin LutherO.S.A. (/ˈluːθər/;[1] German: [ˈmaɐ̯tiːn ˈlʊtɐ]; 10 November 1483[2] – 18 February 1546)

Huldrych Zwingli[a] or Ulrich Zwingli[b] (1 January 1484 – 11 October 1531)  

 

John Calvin (/ˈkælvɪn/;[1] FrenchJean Calvin [ʒɑ̃ kalvɛ̃];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 27 May 1564) 

 

루터.와 츠빙글리.는 1483년생 1484년생.이야. 완전히 동시대여. 둘이 전혀 상관이 없어. 츠빙글리는 루터를 몰라. 모른 상태에서 에라스무스도 만나고 자기생각을 펼친 것 뿐이야. 어 나중 서로 저거 머여 한거고.

 

루터.는 작센 선제후 형제들의 보호하에 있는거고, 츠빙글리는 취리히 캔톤.의 정치권 지도부야. 토마스 뮌처.는 농민전쟁때 12개 조항에 관여한것으로 보이고 직접 총칼들고 싸우다 죽어. 친구들 츠비카우 세 예언자 놀이도 나오고. 이들은 모두 루터와 관련없는 제각각 들이야. 

 

츠빙글리.는 당연히 정치적 위치에 있어서 보수적으로 가야만 해. 아나뱁티스트 라는 재침례교자들을 사형시키는데 동의하는겨. 너무 급진적이고 빨라. 제동을 걸 수 밖에 없어 츠빙글리는. 그리고 카펠전투로 죽는겨. 취리히 란 곳은 스위스 아이트게놋센샤프트.의 셋에서 시작하고 1353년에 여덟동맹 Bund der Acht Orte 아흐트 오르테.의 캔톤이야. 이 취리히는 1291년 셋.으로 시작한 캔톤다음에 네번째 가입한 곳이야. 베른.도 직후 들어오고. 취리히 와 베른.이 프로테스탄트의 한축을 뒤에 이루는거고. 처음 시작 세 캔톤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은 로마 카톨릭.이야. 츠빙글리.는 저들에 당당히 총칼들고 맞서다 죽는거고. 죽기 전에 고해성사 하라는걸 거부해. 죽어 그냥. 

 

세상에 마르틴 루터.만큼 편한 인간도 없는겨 저게. 

 

장 칼뱅.은 다음 세대야. 츠빙글리보다 27년 후에 태어난겨. 

 

칼뱅.은 피카르디 사람이야. 활동중심은 제네바야. 칼뱅.은 제네바 입장에선 완전 외지인인겨. 칼뱅은 제네바의 정신적 리더일뿐이야. 이사람은 정치인이 아녀. 저들 각각이 말야 이게 전혀 세속에서의 자리가 다른거야 이게. 

 

 

제네바 라는 도시가 이게  애매한겨. 

 

제네바.는 지금 공식 언어가. 프렌취여. 여기에 독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써. 네이티브는 프렌취여. 학교에서 함께 공부시키는게 영어 독어여. 기본적으로 유럽애들은, 영어 독어 프렌취 이탈리아어 는 기본적으로다가 초딩때 배우는겨 이게. 특히나 스위스. 스위스 가 강국이 될 수 밖에 없어. 

 

제네바 란 도시는 제네바 호수 끄트머리걸랑. 중세때 여기 아래가 사보이.야. 바로 왼쪽은 부르고뉴 백작령 브장송.이고. 사보이와의 전쟁 에스칼라드 1602.가 여기 제네바이고. 프랑스와 사보이 사이에서 짝은 도시여.

 

칼뱅.이 하필 여길 온거야. 

 

The Prince-Bishopric of Geneva was a Prince-Bishopric of the Holy Roman Empire from 1154, but from 1290, secular authority over the citizens was divided from the bishop's authority, at first only lower jurisdiction, the office of vidame given to François de Candie in 1314, but from 1387 the bishops granted the citizens of Geneva full communal self-government.

As from 1416, the Dukes of Savoy attempted to annex the city, both by claiming secular authority and by installing members of the Savoy dynasty as bishops, the city sought assistance in allying itself with the Old Swiss Confederacy

 

제네바.는 1154년 부터. 비숍릭.이야. 주교.의 땅이야. 아주 로마카톨릭의 법에 따르고 교회에 세금을 내는 땅이야. 160년 지나 1314년.때 비담. Vidam 에게 줘. 바이스 도미누스. 대리인이 지배하는거야, 주교의 대리. 좀 덜 깝깝해진겨. 그러다 1387년.에 자치권을 주교가 주는겨. 사보이.가 1416년에 갖고 오려는거고, 주교를 자기들 영향력으로 바꾸려는거고, 그래서 스위스 아이트게놋센샤프트.에 손을 내미는거고. 사보이는 이미 제링거 가문 끊기고 13세기초엔 바로 위인 스위스 서쪽을 다 갖고 와. 제네바의 위.가 제네바 호수 길게 접한 보 캔톤 Vaud 이고. 

 

Elections to the Grand Council took place the same month and led to a pro-independence majority that voted to break away from Savoy rule. Eventually the Grand Council succeeded in protecting the liberty of its citizens by establishing union with the Old Swiss Confederacy (Alte Eidgenossenschaft), by concluding on February 20, 1526 a treaty of alliance with Bern and Fribourg. On March 12, representatives of the other Swiss cantons appeared before the Grand Council in Geneva and swore to protect that republic as part of their confederation. 

 

프로테스탄트 바람이, 츠빙글리의 취리히 에서 시작한거야. 여긴 슈바벤(스와비아) 접경이고, 라인강 상류 분트슈흐 운동이라는 농민반란이 독일농민전쟁 보다 먼저 있던 곳이고. 슈바벤 이란 지역은 오른쪽 바바리아 같은 비텔스바흐 가 쥐는 지역이 아닌, 호헨슈타우펜 이래 아주 자잘한 영지들로 쪼개진 땅이야. 검은숲 지대란 곳은 고원의 산악 숲지대고, 교회령 수도원령이 많은겨 여기가. 여기가 그래서 독일 자유의 중심이 되는겨. 딱히 누가 통제를 집중적으로 못하는 곳이야. 분트슈흐 운동에 기사들의 반란 의 지킹엔과 후텐.이 이쪽 라인강 상류에 농민전쟁이 여기여. 이들의 피난처가 바로 접한 스위스.고 취리히에 바젤이고 이게 베른 으로 가서 죽 아래 제네바 까지 가는겨 흐름이. 당연히 제네바.는 뚜욱 떨어져서 로마카톨릭이 대세이고 간당간당한겨 프로테스탄트는. 

 

제네바.는 1526년.에 저 분위기에서 독일 농민전쟁 1524년 터지고 진압되고, 요때 아이트게놋센샤프트.에 보호를 요청하는거야. 보 캔톤 넘어의 베른.과 프리부르크.와 동맹을 맺은거고, 스위스 캔톤 대표들이 제네바에 와서 보호해주겠다.고 직접 말을 해줘. 

 

그러다가 카펠 전투.가 터진겨. 1531년. 이때 츠빙글리가 죽는거야. 완전히 패할 전쟁에 죽을 거 알면서도 칼을 잡은겨 이사람은. 스위스는 아이트게놋센샤프트 시작 세 캔톤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은 카톨릭의 땅이걸랑. 취리히는 이전에 토겐부르크 상속문제로 내전하고 또 부닥친겨. 

 

츠빙글리.가 죽기 2년전에 마르틴 루터.를 마르부르크.에서 만난거야. 1529년. 여긴 헷세 땅이야. 츠빙글리 인생은 짧고 굵은겨 이게. 자기나름 깨달아서 교회설교한게 1519년.이야. 이사람은 스위스가 용병으로 먹고사는것에 특히나 문제의식을 느낀거고. 35세에 자기나름 복음만 읽어주기 시작한겨. 루터 대자보 1517년 후 2년지나서. 루터를 몰라 이사람은. 이후 딱 12년 지나서 죽은겨. 저 사이에서 취리히 권력의 중심에 있고, 아나뱁티스트들 사형에도 동의한 것으로 보이고, 성서 번역하고 루터도 만나고, 그러다가 직접 총칼들고 죽을 전쟁 알고 죽은겨. 아주 강렬한 12년을 보낸거야 이사람은. 

 

In June 1532, street skirmishes between Catholics and Protestants broke out, and the government of Fribourg threatened to tear up its alliance with Geneva if Protestant practices were permitted. The government of Bern, however, pressured the Grand Council of Geneva to allow Protestant preaching. The authority of the Catholic bishop was no longer recognized by the people and institutions of Geneva, but at first they refused to commit their city to the Protestant cause, for fear of antagonizing the Catholic rulers of adjacent kingdoms as well as the Catholic priests within Geneva.

 

츠빙글리가 죽고,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가 기세가 죽은겨. 이때 제네바.도 눌려있던 카톨릭이 일어나는거고. 제네바 란 도시는 시작이 로마 카톨릭 주교령이야. 이 주교령의 로마 카톨릭 신앙심과 단결력은 특히나 엄청난겨 이게. 그 대표적인 곳이 리에주.였던거고. 여긴 바닥이 로마 카톨릭이야. 헌데 위 보 캔톤. 이오른쪽 프리부르크 와 베른 캔톤들은 프로테스탄트고. 헌데 츠빙글리가 죽었어. 주춤해. 더하여 제네바는 왼쪽이 부르고뉴 백작령은 스페인 펠리페2세꺼고, 아래는 강력한 사보이야. 둘다 정통 로마카톨릭이여. 제네바는 걍 쬐끄만 도시일뿐이고 바닥은 로마카톨릭이고. 여기에 프로테스탄트들이 스위스 진영 동북에서 걍 들어온거걸랑. 그러면서 세가 생기다가, 츠빙글리의 죽음 1531년으로 주춤한겨. 

 

제네바.는 말야, 저당시도 결국 실세는 카톨릭 일 수 밖에 없어. 

 

저런 제네바.에 들어온 인간이 하필 칼뱅인거야. 

 

 

칼뱅이 1509년생.이고 나이 20정도에 나름 깨달음을 얻어. 일기장의 기록으로 유추하건데. 이걸 1530년으로 보고. 1534년 10월에 프랑스 주요 도시들에 대자보 사건이 발생해 Affair of the Placards. 프랑수아1세의 앙브와즈 성 Amboise 침실에도 붙어. 이걸로 대노하는거고. 여기에 칼뱅이름이 오르내려. 나이 25세여. 칼뱅은 바젤.로 도피를 해.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atin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s John Calvin's seminal work of systematic theology.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works of Protestant theology,[1] it was published in Latin in 1536 (at the same time as Henry VIII of England's 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and in his native French language in 1541, with the definitive editions appearing in 1559 (Latin) and in 1560 (French).

 

인스티튜트스 오브 더 크리스천 릴리전. 그리스도 종교의 구성.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쓴거야. 이건 바젤.에서 쓴거야 25세에. 2년 지나 1536년.에 바젤에서 출판이 되고. 칼뱅은 이 책을 죽을때까지 수정 보완해.

 

The Institutes is a highly regarded secondary reference for the system of doctrine adopted by the Reformed churches, usually called Calvinism.

 

이 책은. 칼뱅주의에서 두번째로 참조하는 책이야. 첫번째는 성경이고. 가장 중요한 책이야. 저걸 25세에 쓴거야. 별거 없다고 봐. 애가 멀 알겠니. 수정 보완하면서 내용이 좀 깊어지는거고. 

 

1534년부터 2년간을 바젤.에 페라라 로 가고, 프랑스 르네 프린세스 비서 역할하면서, 파리로 다시 갔다가 암울한 분위기에 돌아오고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여의치 않아서 제네바.로 간거야. 서기 1536년.에 여기서 기욤 파렐.에 잡힌거야. 협박으로. 이전 썰. 걍 칼뱅은 이때 무서웠어 쟤 협박에. 칼뱅은 걍 당시 마음을 솔직하게 써. 이들은 이런게 참 마음에 들어. 자기 감정을 그대로 쓰는겨. 아 저 기욤 파렐 이 자기가 도와준거 안갚고 튀면 내인생 저주가 내릴거라며, 그래서 제네바에 눌러 앉은겨.

 

The Protestant leader John Calvin was based in Geneva from 1536 to his death in 1564 (save for an exile from 1538 to 1541) and became the spiritual leader of the city, a position created by the Grand Council as the city turned Protestant. Geneva became a center of Protestant activity, producing works such as the Genevan Psalter, though there were often tensions between Calvin and the city's civil authorities. Calvin also supported the admission into Geneva of Protestant refugees, which some circles strongly opposed.

Though the city proper remained a Protestant stronghold, a large part of the historic diocese returned to Catholicism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under St. Francis de Sales. Geneva has played a historical role in the spread of Protestantism.  

 

칼뱅은 서기 1536년 부터 1564년, 27세에서 55세 까지. 28년 중에, 3년 빼고 25년 간 제네바에 있었던건데. 중간 1538-41년.은 기욤 파렐.과 함께 제네바를 떠나. 기욤 파렐.은 Neuchâtel 노샤텔 캔톤. 보 캔톤 위 작은 도시야. 여기로 가고 역사에서 사라져. 죽을때까지.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다시 제네바에서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3년만에 제네바로 가는거야. 

 

 

The Republic of Geneva was proclaimed in 1541, under John Calvin, and given a constitution (Édits civils) in 1543. The Republic of Geneva reinforced its alliance to the Protestant cantons of the Swiss Confederacy, becoming an "everlasting ally" in 1584.  

 

제네바.는 서기 1541년.에 독립적인 공화국.을 선언해. 칼뱅은 칼뱅이 저기서 정치적 힘은 없어. 제네바 공화국을 칼뱅이 주도하는것도 아니고 저 위키영어처럼. 칼뱅은 제네바에서 쫓겨나듯 다시 나갔다가 저해에 제네바에 온거야. 그리고 죽을때 까지 제네바에 있어.

 

제네바.는 1541년 리퍼블릭 선언하고, 스위스 아이트게놋센샤프트.와 동맹체제 맺다가, 나폴레옹 올때까지 리퍼블릭이야. 그리고 스위스 캔톤에 19세기 초에 캔톤으로 들어가는겨. 

 

제네바.는 아래 사보이가 있어. 왼쪽위에는 부르고뉴 백작령이고. 저당시 펠리페2세의 땅이야 부르고뉴 백작령은. 모두 빵빵한 로마 카톨릭이야. 특히나 사보이.가 항상 위협적인겨. 대표적인게 저 이후 1602년 제네바 아스칼라드.야. 

 

아직 1562년 프랑스 종교전쟁 아니고, 1568년 네덜란드 80년 전쟁 아니고, 저때는 농민전쟁 1524.에 기사들의 반란 지킹엔과 후텐.이 나온 직후여 저게. 루터 대자보 1517년 이후  바빠. 헌데 더 황당한건 저때가 이탈리아전쟁 1494-1559 라는 65년 전쟁이야. 이 전쟁은 가장 중요한겨 유럽사에서. 

 

사보이.가 13세기 초에 제네바위의 보 캔톤 지역과 바젤 지역까지 세력을 갖고 오면서 사보디아.란 이름을 만들고, 1291년 부터 아이트게놋센샤프트.가 나오면서 바젤 프리부르크 가 스위스연합 들어가면서 사보이가 저기서 약해질때야. 그러다가 백년전쟁 끝나고, 루이11세가 이탈리아 먹으려고 사보이의 샬롯데.와 결혼을 하고, 이 자식인 두 남매가. 장성해서 샤를8세의 이탈리안 전쟁 1494 가 시작이 되는겨. 이 사보이는 철저하게 프랑스의 퍼핏 꼭두각시가 된겨 이게.

 

Charles III of Savoy (10 October 1486 – 17 August 1553) 사보이의 샤를 3세.가 1504년 부터 50년을 사보이 공작을 하지만. 저때 사보이는 아무런 힘이 없는거야.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치이는겨.

 

제네바가 요 틈을 타고, 츠빙글리 죽은 1531년 카펠전투 이후로도, 뭉칠수가 있었던거야. 저 이후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가 주도권을 잡아. 이 제네바가 제일 빠른거야. 뮌스터 반란이 1534년이야 이들은 1년 인민놀이하고 지금도 세 개의 케이지 가 성당에 걸렸어 그 시체의 뼈가 되서리. 제네바가 동시에 일어난거야.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가 권력을 잡은겨 사보이를 벗어나서 카톨릭을 이기고. 이탈리아 전쟁 와중이라서 이게 가능했어. 

 

이탈리아 전쟁이, 저당시, 교황이 베네치아 몰아내려고 캉브해 동맹 했다가 프랑수 루이12세가 신나게 더 먹고 밀라노 차지하고, 이어서 프랑수아1세와 카를5세가 등장하고, 프랑수아1세.는 카를의 포로가 되서리 풀려나고, 교황이 카를5세 무서워서 코냑동맹 맺고, 카를 병력이 로마약탈 1527년 하고, 프랑수아1세가 다시 쳐들어가는게 서기 1536년 이야. 토리노 까지만 돌아와. 스위스 용병들이 특히나 이때 이탈리아에 쓰이는거고. 이걸 분개하는게 츠빙글리 였던거고. 완전히 이 현장 속의 인간들이야 저때가. 

 

프랑스가 이탈리아 북쪽에 다시 들어가는게 1536년 이고, 요때 제네바에선 프로테스탄트가 주도권을 잡은겨. 교회 파괴하고 성상 파괴하고. 자기들은 루터 라지만 루터보다 과격한겨. 뮌스터 반란과 모양새가 똑같아. 헌데 여긴 나름 지도부가 카운슬로 위원회로 이전부터 조직된 리더들이었어. 뮌스터의 일시적 인민놀이랑 다른거야. 기욤 파렐.도 제네바의 저 1534-36 저 당시에 같이 한거야. 이 기욤 파렐.은 Gap 가프 사람이야. 도피네이 지역이야. 사보이 아래여. 프로방스 위고. 카톨릭 개혁파였다가 루터 말에 공감대 갖고 제네바로 들어간거야. 저때 이사람은 나름 합세를 한겨. 정치적 지분이 있어 제네바에서. 

 

요때, 칼뱅이 들어온거야 제네바로. 그리고는 다시 가려는 칼뱅은 협박으로 윽박지르면서 붙들어 둔거걸랑. 칼뱅은 이후 기욤 파렐과 2년을 같이하고는 헤어진거야. 

 

Finally, a major ecclesiastical-political quarrel developed when the city of Bern, Geneva's ally in the reformation of the Swiss churches, proposed to introduce uniformity in the church ceremonies. One proposal required the use of unleavened bread for the Eucharist. The two ministers were unwilling to follow Bern's lead and delayed the use of such bread until a synod in Zurich could be convened to make the final decision. The council ordered Calvin and Farel to use unleavened bread for the Easter Eucharist. In protest, they refused to administer communion during the Easter service. This caused a riot during the service and the next day, the council told Farel and Calvin to leave Geneva.[24]

 

칼뱅과 기욤파렐 WilliamFarel 이 제네바에서 2년 있는데, 베른 캔톤과 이견이 생겨. 제네바 위는 바로 지금 보 Vaud 캔톤이야. 이 보 캔톤은 당시 베른 캔톤.의 속지여. 보 캔톤이란것도 19세기 초에나 캔톤으로 승격이 된겨 이게. 즉 제네바위에는 베른 캔톤 이 가장 강력한겨. 이들이 우리들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리터지. 예배식을 통일하자는 거지. 그러면서 유카리스트의 빵을, 무교병.으로 일괄적으로 쓰자고 해 베른.이. 칼뱅은 이걸 거부해. 유교병 무교병 상관이 없다는겨. 왜 이걸 선택을 하냐는거지 의미없게.

 

During the Reformation, leavened bread was generally used among Protestants, though the Church of England continued using unleavened bread for a time before allowing both. John Calvin considered the type of bread used an indifferent matter: “Whether the bread is leavened or unleavened, the wine red or white—it makes no difference. These things are indifferent, and left at the church’s discretion.” (On a related note, see Don Carson’s recent Themelios editorial “On Disputable Matters.”)  

 

칼뱅은 유카리스트 빵을 효모가 있던 없던, 포도주가 빨강 하양이든, 상관이 없다. 그건 교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베른이 그래도 강행을 하고, 저때 칼뱅과 기욤은 떠나는겨 제네바를. 그리고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가. 여기도 프로테스탄트가 자리잡은거고. 그러다가 3년후 제네바에서 편지가 오는거야.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띄운겨. 니들 카톨릭으로 돌아와라. 헌데 당시 제네바.에 마땅한 학자가 없는거야. 머라고 답을 못해줘. 이걸 여기저기 찾는데 거부를 하고, 칼뱅이 대신 써주는거야 추기경에게, 프로테스탄트를 옹호하고 카톨릭으로 안 가겠다는 제네바 시민들의 입장을. 제네바가 이것에 감동먹고 칼뱅을 부르는겨. 부디 오라고. 이게 서기 1541년 이야. 

 

His reaction to the suggestion was one of horror in which he wrote, "Rather would I submit to death a hundred times than to that cross on which I had to perish daily a thousand times over."[35]  

 

칼뱅이 공포를 느꼈어 저 제안에. 내가 저길 건너가면 하루에 천번을 가루가 되서 날라갈텐데, 차라기 백번 죽는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스트라스부르 위원회에서 몇달만 다녀오라하고 무장병력을 붙여주고 제네바로 가는겨. 저해에 제네바.는 리퍼블릭을 선언한거고. 이후 죽을때까지 칼뱅은 제네바에서 교리를 다듬고 설교하고 정신적 리더가 되는건데. 스콧의 존 녹스.도 이때의 말년 칼뱅에 오는거고. 

 

Michael Servetus (/sərˈviːtəs/SpanishMiguel Serveto as real name, FrenchMichel Servet), also known as Miguel ServetMiguel de VillanuevaMichel ServetRevés, or Michel de Villeneuve (TudelaNavarre, 29 September 1509 or 1511 – 27 October 1553), was a Spanish theologianphysiciancartographer, and Renaissance humanist. He was the first European to correctly describe the function of pulmonary circulation, as discussed in Christianismi Restitutio (1553). He was a polymath versed in many sciences: mathematicsastronomy and meteorologygeography, human anatomymedicine and pharmacology, as well as jurisprudencetranslationpoetry and the scholarly study of the Bible in its original languages.  

 

미구엘 세르베토. 마이클 서비터스. 스페인 신학자. 물리학자. 지도학자.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폐순환을 처음 기술한 사람이야. 온갖 만물학자야. 이 사람이 카톨릭을 피해서 제네바로 오걸랑. 

 

칼뱅보다 두살 어려. 나이 42세 에 죽어. 칼뱅이 있던 제네바에서 종교재판으로 죽는겨 이사람이. 제네바의 프로테스탄트인 칼뱅애들에게. 이단으로. 

 

이사람은 황당히 죽는겨

 

On 16 February 1553, Michael Servetus while in Vienne, France, was denounced as a heretic by Guillaume de Trie, a rich merchant who had taken refuge in Geneva, and who was a good friend of Calvin,[24] in a letter sent to a cousin, Antoine Arneys, who was living in Lyon. On behalf of the French inquisitor Matthieu Ory, Michael Servetus and Balthasard Arnollet, the printer of Christianismi Restitutio, were questioned, but they denied all charges and were released for lack of evidence. 

 

저해 2월16일.에 비엔. 리옹 아래에서 이단으로 고소를 당해. 제네바에 있던 부자 상인인데 칼뱅 친구여. 프랑스 도미니칸 카톨릭이 심문관이야. 혐의가 없어. 풀려났어. 

 

Meaning to flee to Italy, Servetus inexplicably stopped in Geneva, where Calvin and his Reformers had denounced him. On 13 August, he attended a sermon by Calvin at Geneva. He was arrested after the service[26] and again imprisoned. 

 

풀려나고 이탈리아로 가다가 제네바에 머문거야. 칼뱅이랑 그 파들이 고소를 해. 체포가 되고 다시 투옥이 돼. 8월 13일. 카톨릭애들한텐 증거부족으로 풀려났는데, 칼뱅애들에 잡힌겨 가는길에. 제네바에서.

 

At his trial, Servetus was condemned on two counts, for spreading and preaching Nontrinitarianism, specifically, Modalistic Monarchianism, or Sabellianism, and anti-paedobaptism (anti-infant baptism).[29]  

 

세르베토의 혐의가 두개야. 유포와 설교. 무엇을, 삼위일체아님. 특히나 모달리스틱, 가면론이야. 3세기 사벨리우스.의 어답션이즘에 신은 걍 가면만 쓰고 셋은 같다는거걸랑. 더하여, 유아세례반대. 

 

칼뱅 이 저걸로 저사람을 죽인겨. 유죄 판결나고 죽어. 저건 칼뱅이 직접 죽인겨. 

 

저게 저당시 종교재판이란 짓들의 모습이야. 

 

저기서도 말야, 중심은 삼위일체고, 지저스의 정체여.

 

칼뱅주의는, 다음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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