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史

유럽사333.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78. 2

didasko 2020. 7. 28. 16:12

 

The planned 1672 French offensive; the alliance with Münster and Cologne allowed them to bypass the Spanish Netherlands

 

1672년 5월에 그랑콩데 와 투렌 이 출격하는 곳이 뫼즈강 따라서 리에주 지나 마스트리히트 지나 가는거야. 스페인네덜란드 라는 벨기에 땅은 중립 이라며 길만 비켜주는거고 저 지역부근에서, 그러면서도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물밑에서 지원하는겨. 저건 단순한 그림이고, 이전 데볼루션 전쟁으로 더 깊숙히 샬러롸, 릴, 투르네 등 이미 쑤시고 들어간겨 플랑드르 땅을. 저기엔 평행경계선으로 보이지만 들쑥 들어간거야. 스페인은 꼼짝도 못하는거고. 

 

 

데볼루션 전쟁 의 협약 결과는, 프랑스 로서는 완전히 이기고도 결과물은 신통치 않아. 부르고뉴 백작령을 다 갖고 오고도 저걸 다 돌려준겨. 플랑드르도 거의 다 먹었어 프랑스가. 그런데 저게 네덜란드 가 껴서 삼자동맹이랍시고, 야 상속분만 받어 해대면서 오히려 이전 30년전쟁 때 받은 땅도 돌려준겨 프랑스가. 이게 속으로 특히나 기분이 나쁜거야 루이가 네덜란드 에게. 

 

 

리에주 는 주교령이야. 뫼즈강 왼쪽이 리에주 이고 오른쪽이 마스트리히트. 야. 이 마스트리히트 가 지금 네덜란드 림부르흐 주 의 수도야. 여긴 당시 브란덴부르크 땅인겨. 리에주 주교령 이 벨기에 의 중심이야 이게. 리에주 대학살 의 리에주야 부르고뉴 용감공 샤를이냐 그때 침혹하게 버틴 곳이 이 리에주야. 카톨릭이야. 벨기에 란 나라는 이 리에주 가 버틴거고 절대 프로테스탄트 가 될 수 없는겨. 이게 안트베르펜 을 못 놓아준거고. 벨기에는 이 리에주 야. 

 

저지역의 카톨릭 중심 은 쾰른 대주교 이자 선제후야. 리에주 도 쾰른 관할이야. 이 위의 프리지아 에 북부 쪽은 뮌스터 주교령 이야. 뮌스터 의 윗쪽이 브레멘 주교령 인거고. 

 

Jülich-Cleves-Berg. 저 지역의 중심이 윌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령들 이야. 요게 유니온이 된게 1521-1614 여, 30년 전쟁 직전에 프로테스탄트 와 카톨릭이 여기 후계자 전쟁으로 먼저 터진거고, 이때 하필 남은 딸이 두 여자인데, 첫째딸은 브란덴부르크 에 시집간거고 둘째딸은 비텔스바흐 노이부르크 에 시집간겨. 브란덴부르크 의 호헨촐레른 과 노이부르크 의 비텔스바흐 의 경쟁이 된겨. 

 

윌리히 와 베르크 는 비텔스바흐 의 카톨릭 이 갖고가고, 클레베 를 브란덴부르크 의 프로테스탄트 가 갖고가는겨. 브란덴부르크 가 뚝떨어져서 여길 쥔겨. 이 클레베 가 네덜란드 접경인거야 특히나. 이걸 브란덴부르크 가 하필 갖고 간겨.

 

라인강 이 쾰른 을 지나서 하류에 뒤셀도르프 가 강 오른쪽에 있어. 이 뒤셀도르프 가 베르크 의 수도야. 왼쪽이 윌리히 야. 클레베 가 라인강이 숙 들어가서 네덜란드 경계를 주욱 누른 곳의 지역이야. 원래 겔더랜드(헬더란트. 겔더란드) 가 클레베 의 대부분 땅이야. 마스트리히트 가 저 클레베 땅인겨. 저 접경지역의 클레베 땅을 네덜란드 가 다 갖고간거야 지금. 

 

쾰른 은 이 아래 도시야. 윌리히-클레베-베르크 가 유니온 일때의 수도는 뒤셀도르프 인거고. 이게 뒤에 아래 라인강 서쪽과 합쳐서 라인 주. 가 되는거고, 저 셋 의 오른쪽이 베스트팔렌 주.야. 뮌스터 가 지금 여기 수도고. 

 

브란덴부르크 가 저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야. 독일을 만든 바탕의 그레이트 한 인간이야. 루이 때 동시대고. 하필 이 브란덴부르크 가 클레베 땅을 갖고 있는겨.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강력해. 상비군을 이삼만명을 뒀어. 상비군을 두었다는건 그만큼 상공업이 되어있다는겨. 브란덴부르크는 프로테스탄트야. 30년 전쟁때는 인물이 없어서 걍 중간에서 멍때리다가 프리드리히 가 등장하면서, 폴란드 델류지 때에 프러시아 더치 있는 이유로 조커 행세하면서 갑자기 다크호스로 등장한거거든. 마침 프리드리히 가 인물이었던거고. 

 

 

브란덴부르크 는 30년 전쟁 시작하는 1618년 에 프러시아 를 갖고온겨 2대에서 바로 자식없어서. 그리고 바로 죽고 게오르크 는 중립 을 선언해. 스위든 구스타프 아돌푸스 가 오히려 강압적으로 앞세워. 프리드리히 가 1640년 나이 20 에 오른거야. 여전히 전쟁 중이고. 이사람은 칼뱅 이고, 네덜란드 에서 오래 지냈걸랑. 네덜란드 랑 졸 친해 그래서.

 

브란덴부르크 가 30년 전쟁때, 슈바벤 지역 못지않게 가장 참혹하게 파괴 된 땅이야. 세번이나 편을 바꿔. 스위든 에 못이겨 편들고, 그런데 스위든 이 얘들에겐 철천지 웬수가 돼. 포메라니아 가 브란덴부르크 것으로 와야해. 보기스와프 14세 죽고서. 헌데 이걸 스위든이 저때 갖고 가는겨 포메라니아를. 서포메라니아 를 오데르강 넘어 오른쪽까지도. 자식이 동포메라니아 라며 갖고 가지만 저건 브란덴부르크 꺼란 거지. 눈뜨고 완전히 뺏긴겨 얘들은. 전쟁때는 이용 만 당하고, 땅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30년 전쟁 때 동포메라니아 만 갖고 온거고, 여기에 남은 그리핀 가문이 다스리다가 이걸 직접 취한겨 1653년에. 그리곤 폴란드 당할때 더 오른쪽 영지를 갖고 온거고. 

 

브란덴부르크 에겐, 스위든 이 가장 큰 웬수야 저애들이. 쟤들때문에 30년 전쟁 참전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더하여 포메라니아 땅을 절반 이상을 뺏긴겨. 

 

스위든 이 저때 프랑스 와 친해. 프랑스 가 돈 대주면서 스위든을 이용하다시피 한거고, 스위든과 프랑스는 한몸이야 저게. 

 

더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은 네덜란드 에서 오래 지낸 인물이야. 스위든 은 뼛속깊이 웬수야 브란덴부르크 에겐 저때. 

 

프랑스 가 쳐들어가는겨 네덜란드 를. 프리드리히 는 네덜란드 편이야. 저 스위든 은 프랑스 편이야. 

 

저때 프랑스 의 가는 길목이 클레베 인건데 이건 하필 윌리히 후계자 전쟁 때 브란덴부르크 꺼인겨. 저기에 마스트리히트 야. 

 

리에주 도 카톨릭 인데. 여긴 프랑스 라면 부르고뉴 부터 이가 갈리는 사람들이야. 같은 카톨릭 이지만. 여기 리에주 는 쾰른 대주교 관할이야. 쾰른 에서도 독립해 여긴. 자체 주교령으로 움직이는겨. 

 

쾰른 이란 대주교 및 선제후 가, 이것도 웃긴게, Gebhard Truchsess von Waldburg (10 November 1547 – 31 May 1601) 이전 겝하르트 트루흐세쓰 폰 발트부르크. 라는 대주교 가 아그네스 라는 칼뱅여자 에 빠져서  나 여자랑 결혼할텨, 근데 은퇴안해 아그네스 가 하지 말래. 결혼하고 여기 계속 대주교 하래. 하다가 얘 때문에 전쟁나고 이자리를 갖고 오는게

 

Ernest of Bavaria (GermanErnst von Bayern) (17 December 1554 – 17 February 1612) was Prince-elector-archbishop of the Archbishopric of Cologne from 1583 to 1612 as successor of the expelled Gebhard Truchsess von Waldburg. He was also bishop of MünsterHildesheimFreising and Liège.  

 

바바리아 의 에른스트 야. 비텔스바흐 가문이야. 쾰른 의 대주교 에 선제후 이고, 뮌스터 리에주 도 이사람꺼야. 히데스하임 은 저짝 베스트팔렌 동쪽이고, 프라이징 은 뮌헨 쪽이야.

 

비텔스바흐 가 애매한겨 이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를 싫어하는겨 얘들이. 그래서 30년 전쟁 말년엔 프랑스의 라인동맹에도 들어가는게 여기 라인강 쪽 비텔스바흐 야. 일단 너무나 당했지만. 저때 얘들은 프랑스 편이야. 합스부르크 가 얘들은 더 싫은겨 프랑스 보다. 쾰른 이 프랑스랑 손잡고 네덜란드를 쳐들어가는겨 같이. 뮌스터 도 동참하고. 쾰른 과 뮌스터 가 네덜란드 아래 경계의 프랑스 전초 기지가 되는겨 이게. 루이 가 네덜란드 를 쳐들어 갈때 가장 핵심 이 쾰른 과 뮌스터 여. 병참 의 중심이 여기가 되는거고. 저러면서 워터라인 까지 동쪽에서 쳐들어가면서 사악 먹은겨. 두달여만에 ㅋㅋㅋ. 워터 라인 은 훨 이전에 썰해서 넘어가고. 

 

 

그런데 비에주 는 저런 쾰른이 싫은겨 ㅋㅋㅋ. 프랑스 가 너무 싫어. 이들은 리에주 대학살이 너무나 찐해 바닥에. 아예 쾰른 에서 독립하면서 프랑스에 대들어 저때. 

 

마스트리히트 는 클레베 를 갖은 브란덴부르크 야. 얘들도 쉽게 안내줘. 

 

프랑스 에겐 리에주 에 마스트리히트 가 병참 길목이야. 여길 점령하고 쳐 올라가는겨. 

 

 

Christoph Bernhard Freiherr von Galen (12 October 1606, Drensteinfurt – 19 September 1678) was Prince-bishop of Münster. He was born into a noble Westphalian family.  

 

뮌스터 는 에른스트 를 이어 주교를 크리스토퍼 폰 갈렌 이 하고 이사람이 프랑스 와 함께 쳐들어가는데. 즉 이사람 사명은 네덜란드 땅을 카톨릭 으로 바꾸는겨. 

 

 he was in alliance with Louis XIV, who helped him take Groenlo. His troops went more east and north and conquered not only Deventer and Coevorden.  

 

뮌스터 에서 위로 그루늘로, 데벤터, 쿠보르덴. 여기가 오버아이셀 주. 드렌테 주. 야. 이 북쪽은 이사람이 먹는겨. 

 

 In October 1674 he withdrew his troops from the Dutch Republic and gave up his attempts to restore Catholicism to the Eastern provinces. In 1675 he deserted his former ally, and fought for the emperor Leopold I against France.  

 

그러다가 뮌스터 주교.가 1674년 10월. 전쟁 시작 후 2년 만에, 등 돌려서 프랑스 를 적으로 싸워. 황제 레오폴트 를 위해. 쾰른 도 이때 돌아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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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윌리엄. 이  이때 잘한겨. 이때 네덜란드 는 오렌지 들이 구한거고.

 

병참 기지들, 물류 길목들을 네덜란드 가 짜르는거야. 뮌스터 주교 의 폰 갈렌.이 저 네덜란드 를 다 먹는 지경이야 헬러란트에 오버아이셀에 그로닝엔에. 헌데 여기에 보급이 막히면서 굶주리다 가 그상태에서 편을 바꾼겨 얘들이. 

 

홀란드 워터라인. 이 최고의 설계였어. 여길 두달만에 왔지만, 여길 못건넌겨 프랑스 애들이. 낫사우 모리스 는 최고의 인간이야. 여길 오렌지 윌리엄이 방어하러 온거고, 이와중에 드비트 형제가 죽은거고. 여기서 프랑스가 멀 어떻게 진도를 못나가. 무조건 암스테르담 에 헤이그 를 조져야 해. 바다를 몰라 프랑스는, 강이 약하고. 저때 드라우터 의 해군의 네덜란드야. 홀란드 주 의 드라우터 지만 드라우터 는 실력의 할배고. 

 

그랑콩데 와 투렌 이 저기서 전선을 포기하고 딴 애한테 맡기고 옮기는겨 이게 전선을, 네덜란드 먹으려다가,  진도 못나가고, 어라 저 오버아이셀, 아이셀강 너머는 폰갈렌 뮌스터 주교가 알아서 먹네.

 

스페인 땅이나 다시 갖고 오자. 플랑드르 이전 갖고 왔던거 조약으로 줬는데, 아예 갖고 오고, 로타링기아 가운데 땅 다시 갖으러 가자.

 

플랑드르 에는 그랑콩데 가 가는 거고, 알자스 라인팔츠 라인강변에는 투렌 이 가는거야. 이게 1673년 겨울부터여. 

 

즉 저 홀란드 워터라인에서 1년을 버티고 전선이 아예 바뀐겨 이게. 오렌지 들이 드비트 처리하고 재정비 해서  잘 한겨 이게. 

 

François Henri de Montmorency-Bouteville, Duke of Piney-Luxembourg, commonly known as Luxembourg (8 January 1628 – 4 January 1695), and nicknamed "The Upholsterer of Notre-Dame", was a French general and Marshal of France.  

 

프랑스와 앙리 드 몽모랑시-부트빌, 피네-뤽상부흐 공작. 뤽상부흐 로 통칭해. 노트르담 의 업홀스터러. 노트르담 성당에 전쟁해서 이긴깃발들을 워낙 많이 보내서 여기서 머 덥개로 썼나본데. 그만큼 전투에서 단 한번도 지지않았어. 

 

그랑콩데 보다 7세 어린겨. 사촌간이야. 그랑콩데 한테 배운겨 이사람은. 저때 워터라인 을 이사람이 지킨겨. 겨울에 얼어서 저길 건너가다가 얼음 깨져서 후퇴해. 후퇴 의 천재야. 전쟁 중에 핵심 전법 의 하나 가 후퇴 하는 전술이야. 후퇴 할때 도 피해 안보게 후퇴하는것도 대단한 능력이거든. 이게 러시아 군대야. 후퇴의 달인이야. 그다음에 프랑스고. 할때 이 뤽상부흐 의 후퇴전법이 유명한거고. 

 

이사람은 곱추 야. 외모도 빈약해. 그런데 사람이  냉철해. 

 

François Henri de Montmorency was born at Paris. His father, the François de Montmorency-Bouteville, had been executed six months before his birth for participating in a duel against the Marquis de Beuvron. His aunt, Charlotte Marguerite de MontmorencyPrincess of Condé, took charge of him and educated him with her son, the Duke of Enghien.  

 

파리출생인데, 아빠 가 듀얼 에 참여해서 결투하다가 저게 문제가 되서 죽은겨. 그리고 6개월 후에 태어나고, 그랑콩데 엄마가 숙모 라서 애기때부터 키운거야. 그랑콩데 와 같이 자란거야. 같이 프롱드 로 겪고. 완전히 그랑콩데 의 카피본 이야. 

 

St-Simon said of Luxembourg:

...in his final calculations no one was ever more conscientious than M. de Luxembourg; no one more brilliant, prudent and far-sighted in the face of the enemy or in battle. He had daring and confidence, and at the same time a cool-headedness that allowed him to observe and foresee in the midst of the fiercest cannonade, in dangerously critical moments. That was when he was truly great. At all other times he was idleness itself; no exercise, except where absolutely necessary; gambling; conversing with intimates; every night a small supper party; nearly always with the same company, and, if they happened to be near a town, an agreeable mingling of the sexes.[2]

He was distinguished for a pungent wit. One of his retorts referred to his deformity. "I never can beat that cursed humpback", William was reputed to have said of him. "How does he know I have a hump?" retorted Luxembourg, "he has never seen my back." He left four sons, the youngest of whom was a marshal of France as Marechal de Montmorency.

 

이사람에 대해 쓴 글 을 보면. 아무도 뤽상부흐 보다 더 이성적 지능적인 인간은 없었다. 아무도 더 총명하지도 신중하지도 멀리 보지도 못한다 적과의 대면 또는 전투 현장에서 (이사람보다). 그는 용감함과 확신을 갖았다. 동시에 차가운 머리 를 갖고 관찰하고 예견하게 된다, 가장 날카롭고 위험한 순간에도. 그때가 그게 진짜 그레이트 한 때였다. 그런데 그외 다른 시간들은 걍 게으름 그자체다. 훈련도 없다, 진짜 필요한 것 아니면. 도박, 친한이들과 친목, 매일밤 작은 규모의 저녁 파티, 거의 언제나 똑같은 이들과 만 어울린다. 

 

그는 날카로운 위트 로 유명했다. 꼽추 인 그는, 자기 의 기형에 도 자학하면서 웃는겨 이사람은. "나는 결코 저주받은 곱추를 이길 수 가 없었다" 라고 오렌지 윌리엄 이 뤽상부흐 에 대해 회고한거야. 이걸 들었어. 그 사람이 내가 곱추인걸 어드래 알았지? 그는 내 등을 본 적이 없는데. ㅋㅋㅋ. 네 아들을 남겼는데 막내 가 필드마샬 이 되었지만. 

 

 The Dutch anti-French propaganda quickly exploited this massacre and when de Luxembourg bragged to Louis XIV that he had roasted any Dutchman he could find in the town, he was surprised to find that some at court considered such cruelties unnecessary. 

 

저 워터라인에서 후퇴할때, 보이는 족족 태워. 마을사람들을 태워죽여. 나중에 이걸 루이한테 허풍떨며 자랑했는데, 놀랐대, 왜 그런 잔인한 불필요한 짓을 했냐며 쿠사리 먹어서. 

 

투렌 이 죽고 그랑콩데 도 은퇴하고, 이 자리를 뤽상부흐 가 이으면서, 뒤의 리유니온 전쟁 을 이사람이 하는거야. 그리고 죽어 이 사람도. 그리고 터진게 스페인 후계자 전쟁이야. 루이의 마지막 전쟁. 더이상 프랑스 에 없는겨 인물이. 투렌 그랑콩데 뤽상부흐 가 루이14세 의 시대 있어서 루이 이름이 날린거야. 그리고 백년 후에 나폴레옹 이 나온겨 코르시카 섬에서. 갓 프랑스 식민지가 된. 

 

He was killed by an Imperial cannonball at the battle of Salzbach in 1675.  

 

투렌이 라인강 상류 잘츠바흐 에서 죽어. 1675년. 64세. 

 

Raimondo, Count of Montecuccoli (Italian pronunciation: [raiˈmondo monteˈkukkoli]GermanRaimondo Graf Montecuccoli; 21 February 1609 – 16 October 1680) was an Italian-born professional soldier who served the Habsburg Monarchy. He was also a Prince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Duke of Melfi,[1] in the Kingdom of Naples.  

 

이때 상대 가 오스트리아 편에 나폴리 킹덤 사람, 몬테쿠콜리 백작 라이몬도.야. 프랑스 에 투렌 그랑콩데 급이, 이 라이몬도 야 합스부르크 진영엔. 투렌이 라이몬도 와의 전투에서 죽은거고. 

 

그랑콩데 가 오는겨. 

 

The Battle of Seneffe took place on 11 August 1674 near Seneffe in present-day Belgium and was one of the most notable engagements of the Franco-Dutch War. It was fought between a French army commanded by the Grand Condé and a combined DutchImperial, and Spanish force led by William of Orange.  

 

그랑콩데 가, 1674년 세네페 전투. 를 벨기에 에노 땅에서 네덜란드 연합군 과 하는거고. 여기서 두배병력을 이겨, 그렇지만 프랑스 손실도 엄청난거고. 이 세네페 전투 이기고, 그랑콩데 가 태양왕 루이 의 응접을 받는겨 그 그림이. 앙트완 거리 전투가 1652년 이고, 22년 만에 적폐 대접 받다가 저 세네펠로 루이 의 화가 풀려. 이때도 뤽상부흐 가 참전한거고 같이. 그리고 투렌 이 죽고, 그랑콩데가 라인강으로 가고 플랑드르 를 뤽상부흐 가 맡아. 그리고 그랑콩데 가 저 라이몬도 와 전투에서 쫓아내고 복수겸, 바로 은퇴해 병들어서. 

 

Defeat ended Allied hopes of invading Northern France, but French losses shocked Louis XIV, who thereafter focused on sieges, the dominant form of warfare in the late 17th century. Of the two other battles fought in this theatre, Cassel was an attempt to relieve Saint-Omer, while Saint-Denis was fought to prevent the fall of Mons.  

 

벨기에 땅에서 세개 전투야 저때. 세네펠. 에, 카셀 이 1677년 생드니 가 몽스고. 1678년. 이걸 뤽상부흐 가 전담하는겨. 카셀은 이기고 생드니 는 비기고. 

 

오렌지 윌리엄.이  뤽상부흐 저걸 못 이기는겨. 

 

아 저거 저 꼽추 저주받은 애를 단 한번 못 이겨보내. 내가 꼽추인걸 어떻게 알았지? 내 등을 보여준적이 없는데. 

 

In June 1673, the French occupation of Kleve and lack of money temporarily drove Brandenburg-Prussia out of the war in the Peace of Vossem.[48] However, in August, the Dutch, Spain and Austria, supported by other German states, agreed the anti-French Alliance of the Hague, joined by Charles IV of Lorraine in October. In September, William recaptured Naarden, while Münster and Cologne left the war in November; with the war expanding into the Rhineland and Spain, French troops withdrew from the Dutch Republic, retaining only Grave and Maastricht  

 

즉 전쟁 시작하고 딱 두달 만에 결판이 났다가, 다시 저놈의 워터라인 에서 전혀 진도를 못나갔어. 아이셀 강 쪽으로 죽죽 먹다가, 벨기에 땅 스페인-네덜란드 지역으로 쳐들어가면서 병참로가 막히는겨 뮌스터 쪽이. 포기해 주교가. 더하여, 와 시작하자 마자 저런거에 놀래, 스페인 오스트리아 에 다른 스테이트들이 적극적으로 손잡아. 오  프랑스 저거 머여 진짜. 로렌 도 가운데 애매한 땅이고 손잡아. 그러면서 라인강 으로 전선이 가고, 스페인-네덜란드 라는 벨기에 땅 다시 갖기 오기로 전쟁이 완전히 방향이 바뀐겨 이게. 네덜란드 는 그래서 자기들 나라 밖에서 전쟁을 하는겨 이건. 이전 뮌스터 주교 가 갖고간 땅 되찾으면서. 

 

헌데 저때 브란덴부르크. 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이 돈이 없고, 저 클레베 먼 지역 하나 때문에 여기 낄 의지가 약한거야. 브란덴부르크 는 프랑스 와 조약해서 저기에서 빠진거야. 그리고, 프랑스가 전선을 스페인네덜란드 인 벨기에땅과 라인강으로 바꾸면서 신성로마제국인 오스트리아가 개입하게 되고, 브란덴부르크 가 라인강으로 상비군을 보내는거야.

 

그런데 프랑스 루이 가  착각한게 머냐면, 저때 오스트리아 와 나머지 독일지역 영지들이 손잡는다고, 스위든 한테 돈을 미끼로 독일땅 쳐들어가라는거거든. 

 

스위든이 저 돈 펄럭거림 과 머 욕심에 쳐들어가는데, 애들의 상대는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거든. 동포메라니아 에 바로 아래 브란덴부르크 야. 다 브란덴이야. 브란덴이 스위든 을 상대로 전쟁하게 되는겨 이게. 덴마크 가 이걸 보고 스위든을 쳐들어가서 스카니아 전쟁이 벌어져. 이건 프랑스 루이 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자기 전쟁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어. 브란덴부르크 를 너무 쉽게 본거야. 스위든이 쉽게 내려가서 오스트리아 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줄 알았는데, 브란덴부르크 가 의외로  강한겨. 프리드리히 빌헬름 이란 사람이 20세 에 올라서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든겨 이게. 오히려 이걸 보고 덴마크 가 어머 스위든  별거없어 함시롱 뺏긴땅 갖고오자 하는거고.

 

 

뜬굼없이 다시 프랑스 대 스페인-오스트리아 전쟁으로 변질이 되서, 플랑드르 는 헨트 까지 갖고 오는걸 다시 이 전쟁 결과로, 

 

플랑드르 의 이전 샬러롸 등 깊숙히 들어온 지역에 헨트 는 다시 스페인에게 돌려주고,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경계선을 만든겨. 경계 지역은 프랑스 가 완전히 갖고 오는겨 스페인-네덜란드 라는 벨기에 지역에서 경계는. 

 

대신 저때 다시 쳐들어간 라인강 상류에 프랑슈콩테 를 이 전쟁으로 제대로 갖고와

 

잉글랜드 는 적극적으로 안움직인거고, 얘들은 초기에 너무 협상 딜을 쎄게 한겨 오렌지 조카 복귀해서. 그리고 드라우트 의 물길을 못뚫어. 

 

저건, 암스테르담 과 헤이그를 지키기 위한, 홀란드 워터라인 의 승리여 저건.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야. 낫사우 모리스가 설계 했던. 네덜란드는 저 물길 이 살린겨. 프랑스는 아무것도 못했어. 그것도 단 두달 만에 다 먹고. 일이년 저기서 허송세월 보내고, 괜히 또 불쌍한 스페인 애들 두드려 팬거고. 이제 저런 스페인 구하러 네덜란드 가 가 준거고. 

스페인이 쌩뚱맞게 프랑슈콩테 인 부르고뉴백작령을 뺏겨

 

이정도면 다 본거지 머 이건.